사용자 삽입 이미지예전엔 ‘선거투쟁’이란 말도 있었더랬습니다. 듣기엔 거창할지도 모르겠지만. 솔까, 당선되긴 어려우니 하고 싶은 말이라도 실컷 해보자던 건데. 지금 봐도 참 그럴듯한 말을 갖다 붙였지요. 아무튼 그땐 소로우가 누군지 몰랐었음이 틀림없었을 터인데.   
 
투표란 장기나 주사위 놀음과 같은 일정의 놀음이다. 다만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노는 약간 도덕적 냄새가 풍기는 놀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기에 자연스럽게 따른다. 투표하는 사람의 인격은 내기가 상관없다. 나는 어쩌다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표를 던진다. 그러나 그 옳은 것이 승리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나에게 생명을 건 관심사는 아닌 것이다. 나는 기꺼이 그 결과를 다수자들에게 맡긴다. 그러므로 투표의 의무는 결코 편의(便宜)의 의무를 넘지 못한다. 옳은 것을 위해 던진 표도 진작 그 옳은 것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그것은 다만 사람들에게 정의가 이기기를 바라는 당신의 소원을 미약하게 나타낼 뿐인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정의를 다수자의 손에 맡기거나 아니면 그 다수자들의 힘을 통해 승리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수자들이 결국에 가서 노예 폐지를 위해 투표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들이 노예에 대하여 흥미를 잃었거나 아니면 그들의 투표로 해방될 노예들이 거의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때에 그들은 남아있는 유일한 노예가 될 것이다. 다만 자신의 투표로 자신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는 노예들의 투표만이 이 노예제도의 폐지를 빠르게 할 것이다. pp.193-194
 
라는 말을 들었더라면. ‘선거투쟁’보다는 좀 세련된 말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듭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 당시엔 선거에 통 관심이 없었었지요. 누가 되도 상관없단 식은 아니었지만. ‘부르주아 선거’에서 얻을 거라곤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물론 김대중과 노무현이 잇따라 대통령이 되고. 진보정당들도 의회에 들어가는 호시절을 지났어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현실을 보면. 영 틀린 말도 아니다,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투표를 하되 옹근 표를 던지라. 그저 한 장의 종이쪽만 던질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전 영향력을 던지라. 소수자는 다수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한 무력하다. 그렇게 되면 소수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소수자가 그 온 힘을 다하여 버티면 그것을 당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p.203
 
라는 소로우의 말도 또한 여전히 유효하단 생각도 듭니다. 금배지 달아보겠다고 과거에 잘못한 일들을 반성조차 하지 않는 이들과 손잡는 일도 벌어지고. 대중의 마음을 얻어 보겠다며, 고매한 ‘도덕’을 강요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생기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종이쪽만 던지는 게 아니라 내 온 영향력을 던진다면. 더 이상 죽을 수 없다며 다시 싸움을 시작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평화로운 제주를 만들기 위해 싸우고 있는 강정마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어깨를 건 이들에게 표를 던진다면. 맞습니다. 한 발은 더 내딛는 거란 얘깁니다. 물론 지금도 정부는 최소한도여야 한다는 소로우의 생각에 무조건 동의하지만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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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06 13:37 2012/08/06 13:37
<범우고전선 가운데 8번째이네요. 1987년 개정 4쇄판으로 읽었답니다>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은 동시대를 살았던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과 함께 17세기 영국 청교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에게 이런 명성을 가져다 준 책이 바로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입니다.
 
하지만 <천로역정>은 그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어떤 의도(意圖)에 따라 저술된 것이 아니라 일련의 여러 사건들을, ‘거룩한 땅’으로 안내하기 위해 짜 맞추듯 늘어놓고 있어 보기에 따라서는 도식적이다, 거북스럽다, 느낄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로역정>이 존 번연의 대표작이라는, 단순한 종교서적으로 특정인들 사이에서만 읽혀진 것이 아니라,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걸작으로 인정받는 데에는,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이 쓴 <인간의 권리 Rights of Men>와 더불어 영국 노동계급 운동의 양대 기본 문헌 가운데 하나로 널리 읽혔기 때문입니다(E.P. Thompson, <영국노동계급의 형성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나종일 외 옮김 p.44). 즉, <천로역정>은 주인공인 크리스천이 고난과 역경을 넘어 ‘천성(天城)’에 당도한다는, ‘신앙의 문제를 우화(寓話) 형식으로 형상화한 종교소설’을 뛰어넘어 ‘1790년에서 1850년까지의 노동계급 운동의 기본 바탕을 이룬 이념과 입장의 형성에 가장 크게 기여(<영국노동계급의 형성> pp.44-45)한 ‘복음서’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무수한 비유(譬喩)들 속에서 ‘18세기를 통해 내내 보존되어 19세기에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터져 나오곤 했던 잠재된 급진주의(<영국노동계급의 형성> p.44)’의 흔적들을 읽어내기란 녹녹치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혹 그런 흔적들을 읽어냈다손 치더라도 곳곳에서 드러나는 ‘과장된 감동, 현세에 복종적인 태도, 개인적 구원에 대한 자기 중점적 추구(<영국노동계급의 형성> p.49)’,들을 보고 있자면 역시나 종교소설이라는 틀을 벗겨내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무래도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17세기와 18, 19세기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에 대한 또 다른 읽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할 때에야 비로소 <천로역정>을 특정인들 사이에서만 읽히는 ‘복음서’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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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0 12:37 2009/10/30 1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