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길이는 언년이와의 사랑을 위해 양반과 노비가 없는 세상을 꿈꿉니다. 하지만 대길이의 이 꿈은 과거에 급제해 높은 벼슬을 한 후에라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꿈도, 실은 도술을 부린 홍길동도 바꾸지 못했기에 실현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송태하는 임금을 바꾸는 것이 아닌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역모를 도모합니다. 하지만 송장군이 꿈꾸는 세상은 양반과 노비가 없는 세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양반이라는 신분을 포기하지도 않을 것 같구요.
 
2.
업복이는 양반과 상놈이 뒤집어져 양반을 부리는 세상보다는 양반, 상놈 구분 없이 사는 게 더 좋은 세상이 아니냐고 나지막이 얘기합니다. 자신들을 이용하는 세력들이 만들려는 천지개벽이 결국 지금의 불합리한 세상과 별반 다를 게 없다면 그건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업복이는 끝내 양반과 상놈, 구분 없는 세상도 좋지만 그 전에 복수는 하고 싶다는 초복이의 말마따나 총을 들고 맙니다.   

 
3.
대길: 네 놈이 무슨 연유로 제주를 갔다 왔는지 모르겠다만 결국 네 놈은 네 놈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거 그거 말고는 없어. 예전처럼 떵떵거리면서 살고 싶은 거겠지.
태하: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는가? 조선의 질서를 바로잡는다며 추노를 한다지만 무고한 백성을 들볶고 왈패처럼 거들먹거렸겠지.
대길: 당연하지.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그래야 살 수 있는 세상을 너 같은 벼슬아치들이 만들었으니까.
태하: 그럼 너는? 단 한번이라도 그런 세상을 바꾸려고 한 적 있었나?
대길: 어이, 노비. 아니지. 노비양반. 홍길동이 알지? 그 놈은 도술까지 부렸는데 이 세상을 바꾸지 못했어. 근데 도술도 못 부리는 내가 이 지랄 같은 세상을 바꾼다?
태하: 세상은 도술로 바뀌는 게 아니다. 사람이 바꾸는 거지.
대길: 언놈이 지랄 연병을 해도 이 지랄 같은 세상은 말이야 절대로 바뀌지가 않아.
태하: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마라. 그런 말을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으니.  
 
4.
‘유토피아’는 그리스어의 U(없다)와 topos(장소)의 복합어로서 ‘어디에도 없는 땅’이란 뜻 입니다. 곧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 유토피아인 셈이지요.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저서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꿉니다. 필요한 만큼 일하고, 쓸 수 있는. 다스리는 사람과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구분 없는. 나아가 소유가 필요치 않은 사회를 말이지요. 16세기 혼돈의 영국 사회에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이상향’을 놀라운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단순한 픽션 혹은 문학으로만 분류되진 않습니다.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자유롭게 펼쳐냈다는 면에서는 소설임에 틀림없지만. ‘현실’을 고발하고, 부정함으로써 그 세계에 속박됐던 이상을 자유롭게 했다는 면에서. 정치, 경제, 교육, 도덕, 사회체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하고 설계함으로써 사회사상사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출간된 지 500여년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고전으로 대접받고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5. 
드라마라곤 보면서도, 또 봤으면서도 통 어디 가서 얘기 하진 않지만. 꼭 한번 되짚어 보고 싶었던 건. ‘추노’가 보여주는. 결코 양반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만이 양반, 상놈 구분 없는 ‘유토피아’가 어찌 가능한지를 꽤나 잘 알고 있다는 다소 거북한 설정 때문이었을까요. 아님 그래도 총을 거두었던 업복이가 다시 화약에 불을 댕기지 않았으면 하는 기대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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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5 10:38 2010/03/05 10:38
<범우고전선 가운데 8번째이네요. 1987년 개정 4쇄판으로 읽었답니다>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은 동시대를 살았던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과 함께 17세기 영국 청교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에게 이런 명성을 가져다 준 책이 바로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입니다.
 
하지만 <천로역정>은 그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어떤 의도(意圖)에 따라 저술된 것이 아니라 일련의 여러 사건들을, ‘거룩한 땅’으로 안내하기 위해 짜 맞추듯 늘어놓고 있어 보기에 따라서는 도식적이다, 거북스럽다, 느낄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로역정>이 존 번연의 대표작이라는, 단순한 종교서적으로 특정인들 사이에서만 읽혀진 것이 아니라,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걸작으로 인정받는 데에는,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이 쓴 <인간의 권리 Rights of Men>와 더불어 영국 노동계급 운동의 양대 기본 문헌 가운데 하나로 널리 읽혔기 때문입니다(E.P. Thompson, <영국노동계급의 형성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나종일 외 옮김 p.44). 즉, <천로역정>은 주인공인 크리스천이 고난과 역경을 넘어 ‘천성(天城)’에 당도한다는, ‘신앙의 문제를 우화(寓話) 형식으로 형상화한 종교소설’을 뛰어넘어 ‘1790년에서 1850년까지의 노동계급 운동의 기본 바탕을 이룬 이념과 입장의 형성에 가장 크게 기여(<영국노동계급의 형성> pp.44-45)한 ‘복음서’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무수한 비유(譬喩)들 속에서 ‘18세기를 통해 내내 보존되어 19세기에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터져 나오곤 했던 잠재된 급진주의(<영국노동계급의 형성> p.44)’의 흔적들을 읽어내기란 녹녹치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혹 그런 흔적들을 읽어냈다손 치더라도 곳곳에서 드러나는 ‘과장된 감동, 현세에 복종적인 태도, 개인적 구원에 대한 자기 중점적 추구(<영국노동계급의 형성> p.49)’,들을 보고 있자면 역시나 종교소설이라는 틀을 벗겨내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무래도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17세기와 18, 19세기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에 대한 또 다른 읽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할 때에야 비로소 <천로역정>을 특정인들 사이에서만 읽히는 ‘복음서’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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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0 12:37 2009/10/30 1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