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전작 <동물농장>과 마찬가지로 <1984> 또한 종종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책으로 소개되곤 합니다. 하지만 두 책을 읽고나면. <동물농장>은 풍자와 해학이 섞여 있고 <1984>는 좀 더 어둡고 암울하다는 차이만 있을 뿐. 전체주의에 대한 엄중한 경고 일뿐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1984>나 <동물농장> 모두 미래 사회 혹은 상상된 사회에 대한 경고 정도로만 소개되곤 합니다. 하지만 전체주의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사회 모두 에서 분명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범죄예방이라는 미명하에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CCTV만 보더라도 감시사회는 성큼 우리 곁에 다가왔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자의 의도를 왜곡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하는 걸 보면. 정말 읽었나봤나 싶기도 하고. 보긴 봤어도 자기 좋을 대로만 읽었구나 싶은 게. 꼭 무슨, 무슨 신문과 방송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그가 쓴 일련의 다른 책들, 이를테면 <카탈로니아 찬가>나 <위건부두로 가는 길>과 같은 글들까지 함께 본다면.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철저한 옹호자가 바로 오웰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터이니. 무슨 말을 하던 그냥 그대로 내버려둬도 괜찮겠단,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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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6 10:52 2013/04/26 10:52

사용자 삽입 이미지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류와 같은 자본주의 예찬서와 마찬가지로 엄연히 다르건만. 심심치 않게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서로 소개되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한 사람이 썼다는 이유로 더욱 그러했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꼼꼼히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는지 알 수가 없는데요.

 

아마도 마르크스와 겹쳐지는 메이저, 스탈린은 나폴레온, 트로츠키는 스노우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랬을 것이란 추측을 해보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딱 봐도 이건 풍자와 우화 형식으로 쓴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와 비판인데. 뜻과 의도를 잘 못 이해해도 한 참 잘 못 한 것이지요.

 

아무튼, 그래서일까요. 고전 중에 고전이라고 얘기되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이제야 읽게 된 것, 말입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땡볕을 피해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만만하게 봤다, 결국 녹초가 된 몸으로 머물렀던 성심원에서.....

 

나폴레온이 기른 사나운 개들과 입만 열면 찬양일색으로 나팔을 불어대는 오리들이 먼 곳에 있는 게 아닌데, 하며.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 이어 다시 빠져들게 된 오웰의 글 솜씨와 생각에. <카탈로니아 찬가>며, <1984>도 찾아봐야지.....

 

참 오랜만에 휴가다운 휴가를 보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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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4 21:03 2012/10/04 21:03

<죽음의 밥상> -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함규진 옮김

<“먹지마세요” GMO> - 마틴 티틀.킴벌리 월슨 지음/김은영 옮김

 

 

사용자 삽입 이미지1.

봄 농사로 바쁜 하루다. 퇴비 넣어주랴, 밭 갈아주랴, 이랑 만들랴, 눈코 뜰 새 없다. 특히나 비소식이라도 있으면 모종 사다 심으랴, 씨앗 뿌리랴, 그야말로 한 손이라도 아쉽기만 하다. 게다가 올 해 역시 작년과 마찬가지로 밭을 뒤늦게 구하는 바람에 남들보다 곱절은 바쁘다. 급한 마음이지만 서두른다고 드넓은 밭을 한 번에 다 채울 수는 없으니 일기예보에 귀를 쫑긋 세우면서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야 한다.

 

며칠 전엔 퇴비를 사러 인근 농협에 들렀다. 농지원부도 모르는 부재지주의 밭을 빌린 탓으로 농협 조합원 가격보다 1포대 당 200원이나 더 주고 퇴비를 사면서 한 참이나 속이 상해 있는데 고추며, 오이며, 호박 모종들이 왜 그리 자꾸 눈에 밟히는지. 아무래도 늦은 밭농사 준비로 마음이 급할 대로 급한 모양이다. 

     

드넓은 밭에 낑낑대며 퇴비를 다 뿌리고 나니 슬슬 여기엔 토마토며 오이를 심고, 저쪽엔 콩 두이랑에 고추 한 이랑을 섞어 심고, 조기엔 여름 내 먹을 옥수수, 저짝엔 겨울 내 먹을 고구마를 심을까 행복한 상상도 해본다. 의욕 넘치는 2년차 새내기 농부로서 조그맣게 비닐하우스 하나 지어 놓고 좋은 씨앗 골라 모종 길러 심고는 싶지만 내 밭이 아닌 이상 그것도 매년 이 밭 저 밭 기웃기웃하며 겨우겨우 밭을 구하는 신세에 그저 마음뿐이다. 허나 내 밭이 있다고 해서 그 꿈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밭작물들은 모종을 내서 옮겨 심어도 되는 것이 있고 씨앗을 뿌려야만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조그맣게 텃밭농사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잘 아는 얘기일 게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종을 내서 옮겨 심는 것도 씨앗을 심어 모종을 길러내는 것이니 쪽파나 감자와 같이 구근으로 심는 것을 빼면 모든 작물이 씨앗으로 번식을 하는 셈이다. 그러니 옛날부터 농부네들은 여름 내 땀 흘려 길러낸 작물을 수확하고 나면 가장 실한 것들만 따로 모아 다음 해에 쓸 종자를 만드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겠는가.

 

2.

어머니 49재 음식을 준비할 때였으니 벌써 3년 전 일이다. 동그랑땡이니 적을 만드느라 돼지고기를 만졌는데 전에 없이 빨간 두드러기가 몸 여기저기에 생기는 게 아닌가. 처음엔 그냥 고기가 상했나 싶기도 했지만 그 후로도 두 번인가 더 돼지고기를 접할 기회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번은 입안에 넣었고 한 번은 역시 손에 대기만 했는데도 예의 그 두드러기가 또 나타났다. 이를 어째, 별수 없어 이번엔 한의원엘 찾았는데, 체질이 바뀌었으니 고기를 끊던가, 약을 먹던가, 하란다.

 

쩝. 하지만 어쩌랴. 애당초 시골로 내려가 살게 되면 ‘공산품 고기는 그만 먹어야지’ 하고 맘먹고 있었던 차라 아예 잘 됐다 싶어 그 기회로 육고기를 멀리하기 시작 했다. 그리고는 제사상에 빠지지 않고 올라왔으나 이제껏 관심 밖에 머물러 있던 온갖 나물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때맞춰 봄나물까지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맛을 들이기에는 제격일 것 같았고, 된장에, 고추장에, 초장에, 들기름에, 이렇게 저렇게 맛을 내니 어느새 나물 맛에 흠뻑 빠지게 됐다.

 

그 이후로 어찌된 게 가끔은 생선 한, 두 마리를 밥상에 올리기도 하고, 아직은 멸치국수와 초밥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데도 채식주의자이냐, 묻는 이들이 더러 있다. 아마도 소나 돼지, 양과 같은 붉은 살코기는 먹지 않으나 해산물과 물고기는 먹는 페스코 베지테리안임을 확인하는 것이겠지만 그건 아니다, 라고 말한다. 종교적이거나 문화적으로 혹은 건강상의 이유로 채식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겠지만 환경적이고 인권적이어야 진정한 채식주의인 것 같아서다.

 

3.

다소 생소하지만 매우 논쟁적인 ‘종(種)차별주의자’라는 용어로 잘 알려진 피터 싱어와 농부이자 변호사이며 싱어와 함께 <동물 농장(Animal Factories)>라는 책을 내기도 했던 짐 메이슨은 두 번째로 펴낸 <죽음의 밥상(The Ethics of What We Eat)>을 통해 이전의 저작에서와 같이 공장형 농장 시스템 속에서 비윤리적이로 수태, 사육, 도살되는 동물들을 밥상에 올리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들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 인근 대형 마트에서 먹을거리를 구매하는 전형적인 미국식 가족, 가족의 건강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먹을거리를 구매하는 다른 한 가족, 그리고 가장 엄격하게 윤리적인 기준을 지키며 오직 채소만을 먹는 베건 가족의 식탁에 대한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에 나선다.

 

부리가 잘린 채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사육장에서 길러지다 한 시간 만에 7,200마리를 도살할 수 있는 도살라인에 억지로 밀어 넣어지는 닭. 일생에 한 번도 바깥나들이를 못하며, 풀밭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콘크리트와 강철로 지어진 축사에 갇혀 성장촉진제와 항생제를 맞으며 크는 돼지. 접시쓰레기(레스토랑의 고기요리 찌꺼기), 닭고기와 돼지고기, 닭장쓰레기(닭똥, 닭 시체, 닭털, 먹다 남은 모이 등등), 그리고 소의 피와 지방이 포함된 사료를 먹고 키워지는 소.

 

대형 마트에서 일주일치 음식을 한꺼번에 쇼핑하고, 패스트푸드점에서 외식을 즐기는 그리고 닭고기와 돼지고기를 즐겨먹는 평범한 현대인의 식단 속에 감춰진 진실들을 들춰내는 것에만 멈췄다면 저자들이 서문에 썼듯이 이전의 저작과 별반 다르지 않은, 단순한 수정.증보에 지나니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싱어와 메이슨 두 저자들은 최근 불고 있는 유기농 열풍, 공정무역(fair trad) 운동, 로컬푸드(local food), 그리고 여러 윤리적 소비주의(ethical consumerism) 등등 더 넓은 쟁점들에 대해 시선을 넓히고 있어,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지에 대해 윤리학적인 접근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 부응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4.

서구 사회 어디에서나 관습적으로든 법적으로든 소유권을 인정하는 제도가 갖춰져 있고 사람들은 개인의 소유권을 완벽하게 확립하고 강화하기 위한 투명한 메카니즘을 만드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이 소유권이 하나의 공동체가 보여준 인내와 수 세대에 걸친 집단적인 노력의 소산이었던 식물이나 종자와 같은 자연의 산물들에까지 딱지를 붙일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일까?

 

굶주림 혹은 기아의 문제는 작물의 수확량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 정치적인 문제라는 점은 이미 1960년대 거대 화학 기업들, 영향력 있는 재단들, 그리고 정부가 나서서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을 주도했던 때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 공학 기업들은 기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여전히 생산량을 늘려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이들의 말대로 막대한 양의 식량을 생산하도록, 그냥 그들이 모든 사람들을 먹여 살릴 만큼 생산하도록 놓아두어야 하지 않을까?

 

유전공학의 사회적, 윤리적 의미를 공론화하기 위해 의식 있는 과학자, 의사, 활동가들이 함께 결성한 ‘책임 있는 유전학 위원회(Council for Responsible Genetics: CRG)’ 의장을 맡고 있는 마틴 티틀과 역시 이 위원회 위원이기도 했으며 현재는 그린피스에서 생명공학기술과 관련된 시민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킴벌리 윌슨은 이러한 질문들의 밑바탕에는 바로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두 저자들은 식품과 관련된 유전자 조작 혁명의 모든 것을 자세히 파헤치고 있다. 유전공학이 작동하는 방식, 유전자를 조작해 만들어진 식품들의 위험성, 이러한 식품들로부터 이익을 얻는 자들은 누구이며 손해를 보는 이들은 누구인지, 굶주린 이 세계를 먹여 살릴 것이라는 거대 다국적 곡물 기업의 망언, 생명을 조작하는 행위가 가지는 윤리적이고 정신적인 측면까지.

 

하지만 <“먹지마세요” GMO>가 앞서의 책과 마찬가지로 단지 유전자 조직 식품의 모든 것만을 알려주는 것에 멈추었다면 GMO에 대한 불편한 진실의 폭로 혹은 유전공학에 대한 위기의식의 환기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놀라운 힘과 정당한 윤리적 권위를 지닌 평범한 시민들이 행동에 나선다면 안전한 먹을거리를 되찾을 수 있음을 역설함으로써 자칫 무력감에 빠질 수 있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일상생활에서, 각자의 공동체에서 인정된 유기농 제품을 사고, 자신이 먹을 것은 스스로 기르고, 제철 식품을 구입하고, 편향되지 않은 정보를 얻기 위해 약간의 노력을 기울이고, 지역 단체 혹은 전국 규모의 단체에 가입하는 자그마한 실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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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6 15:04 2009/05/16 1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