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도처에 전문가입니다. 입시전문가, 부동산전문가, 투자상담사 같이 ‘합리성’이나 ‘이성’과는 무관한 ‘짝퉁’ 전문가들도 판을 치고. 장 담그는 것조차 대학교수 정도는 돼야 말 빨이 먹히니 말입니다. 어디 토론회나 방송에라도 나설라치면 학위는 기본, 자격증에 학술논문 몇 편은 있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 때처럼 死대강 사업 때도 그랬듯이. 밀양 송전탑 건설 현장에도 어김없었고,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에도 앞 다퉈 나섰지만.
 
천안함 침몰에 이의를 제기한 과학자가 몇 안됐던 것처럼. 死대강 사업이 재앙이라 경고한 학자들을 손으로 꼽았을 만큼. 돈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해 있었던, ‘관심을 올바른 방향에 두고, 인식과정에 철저한 비판의 메스’(p.92)를 가하던 전문가는 보기 힘들었습니다.  
 
‘체제 측의 프로젝트에 대항할 수 있는 비판능력을 조직적으로 확립하는 일’(p.109)은커녕 ‘어떠한 조직이나 권위에 대해서도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고 모든 문제에 지적 성실성을 가지고 대처’(p.107)하는 과학자가 많지 않았던 겁니다.
 
‘아주 세분화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거기에서 전문가가 되려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전문가의 길’(p.65)을 갈 뿐인 전문가들이 ‘인식과정에서 철저한 비판의 메스를 가해야만 사회를 더 나은 쪽으로 나가게 할 수 있는 창조적이 힘이 나온다는’(p.92) 사실을 철저히 외면했단 얘깁니다.
 
타까기 진자부로는 폐쇄된 실험실 밖으로 나와 사회와 시민과 함께하는 ‘시민의 과학’을 애기합니다. ‘이런 저런 때마다 침묵하다보면 늘 승인하는 것처럼 되어 결정적인 순간에조차 아무 말도 못하게 되는 이른바 ‘일본형 공동체’의 구조’(p.81) 속에서 벗어나, ‘체제 내의 지위를 버리고 자립적인 과학(학문).기술을 지향(p.88)’하자는 겁니다. 
 
“그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거대한 입을 벌리고 덤벼드는 불도저는 문자 그대로 국가권력 자체였고, 그 앞에 맨 몸으로 농토를 지키려고 싸우는 농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서 있는 나 자신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p.82) 
 
타까기는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에 행동으로 답을 합니다. 안정된 대학교수 자리도 마다하고, 촉망받는 연구원 신분도 박차고. ‘농토를 지키려고 싸우는 농민’들 편에 서서 싸우기 시작한 것이지요. ‘시민과학자’로서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관심을 어디에다 두어야 하는가를 문제 삼고, 그러한 관심을 전제로 인식이 나아가는 과정을 성찰한다. 그러한 성찰 없이 객관성이라는 명분만 가지고 측정 데이터 등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이다. 관심을 올바른 방향에 두고, 인식과정에서 철저한 비판의 메스를 가해야만 사회를 더 나은 쪽으로 나가게 할 수 있는 창조적이 힘이 나온다는 것을 하버마스에게 배운 것’(p.92)이라는 고백을 실천한 것이기도 합니다.
 
MB 정권이 물러나기를 손꼽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 같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뻔 한 걸 가지고 이제와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도 눈꼴 시린데. 그것도 토목공학이나 환경학이나 하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그러고들 있으니. 이젠 보(洑)  철거를 두고 한 자리 또 해먹겠다는 심보들인 것만 같아 한숨만 나옵니다. 대체 우린 언제까지 이런 전문가들 입만 바라봐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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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16 2014/08/09 22:16
1.
얼마 전이었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 발사체라던 나로호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 뒤 정상궤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대기권에서 소멸됐던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 이 나로호가 발사됐을 때만해도 성공에 대한 자축의 박수가 연신 터져 나오고, 또 곧이어 나로호의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다 결국엔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타 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까지만 해도 그저 그것 참 고소하다, 는 생각만 들었었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절반의 성공’에 안타까워하는 데. 무슨 심보인지 연신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고 있으니 대체 뭐 때문일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2. 
공존(共存):
명사 ① 함께 존재함
         ② 함께 도우며 살아감
공생(共生):
명사 ① 공동의 운명 아래 함께 삶
         ② (생) 종류가 다른 두 생물이 한 곳에서 서로 이익을 주고받으며 공동생활을 하는 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 중에는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같은 뜻인 것처럼 혼용해서 사용하는 것들이 꽤나 있습니다. 공존과 공생도 그러하지요.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공존은 함께 도우며 살아감, 공생은 공동의 운명 아래 함께 삶,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핏 보면 그게 그 말 같고 그 뜻이 그 뜻 같은데. 혹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반핵, 반원자력 활동가로 알려진 다카기 진자부로는 에콜로지라는, ‘자연을 제어, 지배,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으로서 향상시키고 자유를 확대시킨다는 이른바 합리주의적 사상, 사실은 실리적인 자연 이용의 사상 이상으로 인간중심주의의 자연관’을 대신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 속에서 이 두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데요.
 
에콜로지는 “지구 생태계는, 다양한 생물이 놀라울 만큼 정교한 공존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우리가 직면한 모든 위기는 대부분 이 공존관계를 인간이 파괴하고 있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인간 중심의 입장에서 벗어나 인간도 자연계의 일원으로,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자”는 의미를 지닌 다고 합니다. 결국 ‘자연과의 공존’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죠.    
 
하지만 이 지점에서 다카기는 ‘자연과의 공존’이 지닌 애매한 입장에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가 ‘자연과의 공생’을 얘기합니다. 즉 인간과 자연을 대치시키고 나서 조화나 공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전체 내에서 인간을 상대화하는, 오히려 자연 속에서 사는 것 자체가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인간에게 최고의 원리였던 이성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원리로서 자연의 영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가요. 이쯤 되면 공존과 공생의 의미가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지 않나요. 
 
3.
‘우주시대’, ‘우주개발’, ‘우주강국’
나로호가 발사되기 전부터, 아니 개발 단계에서부터 우리 언론들은 이런 수식어들을 붙여댔습니다. 우주 역시 인간을 위해 이용되는 수단으로 밖에 인식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기사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우주개발을 체계적으로 진흥하고 우주물체를 효율적으로 이용·관리하도록 함으로써 우주공간의 평화적 이용과 과학적 탐사를 촉진하여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우주개발진흥법>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지나갔을 겁니다. 우주발사체 개발을 주도하는 정부의 시각조차 이러한데 자신의 정체성을 시시각각 바꾸는 우리 언론들에게서 뭘 더 바랄까요.
 
그래요. 솔직히 처음엔 MB정부 때 이런 일이 생겨서 그저 고소하단 생각만 했었습니다. 발사체가 성공하게 되면 고스란히 자신의 치적으로 생색낼 게 뻔 한 그림이었잖아요. 그런데 말이죠. 공존과 공생의 미묘한 차이를 깨닫게 해 준 이 책, 벌써 10년도 전에 쓰인 <지금, 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읽고 나니 그저 고소하다고만 생각했던 게 너무 한심해지는 거 있죠. 
 
공존이냐 공생이냐, 지금부터 다시 고민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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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1 20:25 2009/09/11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