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얼마 전이었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 발사체라던 나로호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 뒤 정상궤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대기권에서 소멸됐던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 이 나로호가 발사됐을 때만해도 성공에 대한 자축의 박수가 연신 터져 나오고, 또 곧이어 나로호의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다 결국엔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타 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까지만 해도 그저 그것 참 고소하다, 는 생각만 들었었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절반의 성공’에 안타까워하는 데. 무슨 심보인지 연신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고 있으니 대체 뭐 때문일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2. 
공존(共存):
명사 ① 함께 존재함
         ② 함께 도우며 살아감
공생(共生):
명사 ① 공동의 운명 아래 함께 삶
         ② (생) 종류가 다른 두 생물이 한 곳에서 서로 이익을 주고받으며 공동생활을 하는 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 중에는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같은 뜻인 것처럼 혼용해서 사용하는 것들이 꽤나 있습니다. 공존과 공생도 그러하지요.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공존은 함께 도우며 살아감, 공생은 공동의 운명 아래 함께 삶,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핏 보면 그게 그 말 같고 그 뜻이 그 뜻 같은데. 혹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반핵, 반원자력 활동가로 알려진 다카기 진자부로는 에콜로지라는, ‘자연을 제어, 지배,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으로서 향상시키고 자유를 확대시킨다는 이른바 합리주의적 사상, 사실은 실리적인 자연 이용의 사상 이상으로 인간중심주의의 자연관’을 대신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 속에서 이 두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데요.
 
에콜로지는 “지구 생태계는, 다양한 생물이 놀라울 만큼 정교한 공존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우리가 직면한 모든 위기는 대부분 이 공존관계를 인간이 파괴하고 있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인간 중심의 입장에서 벗어나 인간도 자연계의 일원으로,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자”는 의미를 지닌 다고 합니다. 결국 ‘자연과의 공존’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죠.    
 
하지만 이 지점에서 다카기는 ‘자연과의 공존’이 지닌 애매한 입장에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가 ‘자연과의 공생’을 얘기합니다. 즉 인간과 자연을 대치시키고 나서 조화나 공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전체 내에서 인간을 상대화하는, 오히려 자연 속에서 사는 것 자체가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인간에게 최고의 원리였던 이성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원리로서 자연의 영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가요. 이쯤 되면 공존과 공생의 의미가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지 않나요. 
 
3.
‘우주시대’, ‘우주개발’, ‘우주강국’
나로호가 발사되기 전부터, 아니 개발 단계에서부터 우리 언론들은 이런 수식어들을 붙여댔습니다. 우주 역시 인간을 위해 이용되는 수단으로 밖에 인식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기사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우주개발을 체계적으로 진흥하고 우주물체를 효율적으로 이용·관리하도록 함으로써 우주공간의 평화적 이용과 과학적 탐사를 촉진하여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우주개발진흥법>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지나갔을 겁니다. 우주발사체 개발을 주도하는 정부의 시각조차 이러한데 자신의 정체성을 시시각각 바꾸는 우리 언론들에게서 뭘 더 바랄까요.
 
그래요. 솔직히 처음엔 MB정부 때 이런 일이 생겨서 그저 고소하단 생각만 했었습니다. 발사체가 성공하게 되면 고스란히 자신의 치적으로 생색낼 게 뻔 한 그림이었잖아요. 그런데 말이죠. 공존과 공생의 미묘한 차이를 깨닫게 해 준 이 책, 벌써 10년도 전에 쓰인 <지금, 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읽고 나니 그저 고소하다고만 생각했던 게 너무 한심해지는 거 있죠. 
 
공존이냐 공생이냐, 지금부터 다시 고민해야겠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9/11 20:25 2009/09/11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