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과학이 인간 문명을 이끌고 진보라고 하는 업적을 쌓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설사 과학 연구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말이지요.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과학이 차지하는 위치는 얼마나 될까요? 또 과학에 접근하는 것이 미술관에 가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일까요? 과학을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로 간주하거나 단지 수동적이고 동기화가 미약하며 ‘우발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과학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과학과 대중이 만날 때.....』, p. 239)까지 이런 물음에는 선뜻 답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더구나 최근 급속한 발전을 하고 있는 생명공학 기술과 IT기술의 급격한 발달에 대한 반응은 이해와 수용보다는 거부감과 불편함이 앞서는 상황입니다. 또 과학자 집단 혹은 정부가 이야기 하는 과학적 조언과 견해에는 신뢰보다는 의구심, 불신이 강하지요. 예컨대 우리 사회만 해도 광우병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명쾌하기 설명하지 못하는 것, 조작과 은폐로 의혹을 자초한 천안함 침몰 사건,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반면교사로 삼기는커녕 안전사고에 대한 축소, 은폐기도 등등으로 과학은 그 신뢰가 땅으로 떨어졌지요.
 
물론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과학자 집단 스스로가 자초한 면이 큽니다. 먼저 번 서평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던 간에. 과학자, 과학자 집단은 그들의 과학실, 컴퓨터와 현미경 속으로 빠져듦으로써 대중의 과학 이해라는 문제에 대해 소홀했던 것이지요. 게다가 자신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소통수단을 통해 견고하고 높은 성을 쌓는데 열중했던 겁니다. 결국 과학은 인류를 보다 나은 미래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포츠라 불리는 것에 참여-직접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배트를 휘두르는 사람들에서부터 소파에 누워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관람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 방법은 매우 다양하지요-하는 사람들 숫자보다도 못한 관심을 받게 된 겁니다.
 
물론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이제까지 취해왔던 접근 방식, 즉 ‘과학 대중화science popularization’라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대중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같아 멋진 왕자님이 키스만 해주면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 이 해결방식의 핵심인데요. 무지몽매한 대중에게 과학 지식을 전파해야한다는 생각은 전형적인 계몽적 관점으로 대중은 수동적으로 과학 지식을 수용할 뿐인 존재이며 대중의 역할은 철저히 배제되기 마련(같은 책 옮긴이의 말, pp.268-269)이므로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이에 새롭게 등장한 관점이 바로 ‘대중의 과학 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입니다. 이 방법은 과학의 사회적 구성론이라고도 하는데요. 불균질한(heterogenous) 대중, 암묵지, 민간지 더 나아가 무지까지 확장된 과학 지식, 불명료하고(inarticulate) 암묵적인 이해의 형태라는 세 측면을 대중이 처한 상황과 대중의 능동성을 토대로 새롭게 구성하는 것입니다. 즉 대중들이 과학을 이해하는 과정이 단순한 지식의 수용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능동적으로 과학 지식을 재구성하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보은 것이지요(같은 책 옮긴이의 말, pp269-270).
 
우리와 마찬가지로 BSE와 인간 광우병 문제로 곤욕을 치렀던 영국이 2000년에 발간한 상원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민주적 시민권이 과학적 개념과 주장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비판하고, 사용할 수 있는 시민권들의 능력에 크게 좌우되며 … 이러한 신뢰는 과학자 공동체 자체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같은책 옮긴이의 말, pp.272-273).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광우병, 천안함, 핵발전소, 4대강 사업, 선관위 디도스 공격 등등. 2mb 정부와 기능적 지식인 아니 기능적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추문들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과 반(反)대응은 우리 사회의 시민권 확장을 둘러싼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독선과 아집, 거짓과 은폐로 점철된 2mb 정부로 인해 불러 일으켜진 이 투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 어떤 결과로 귀결될 것인지는 제처 놓더라도. ‘대중의 과학 이해’라는 측면에서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만한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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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6 13:46 2012/06/06 13:46
1.
바야흐로 ‘유기농’ 열풍입니다. 대형마트엔 어김없이 ‘유기농’ 코너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아파트 밀집 지역엔 ‘유기농’ 전문매장이 들어서 있으니 말입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유기농’이라는 말은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과 같은 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그에 비하면 정말 격세지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MB정부가 4대강 막무가내 ‘삽질’로 국내 친환경 유기농업 태동지인 팔당 일대 지역을 파헤치려는 꼴이나 이름도 괴상한 각종 첨가물로 범벅이 된, 기껏해야 성분 구성표 맨 뒷자리에 겨우 이름을 올려놓고서는 버젓이 ‘유기농’ 매장에 진열되고 있는 온갖 과자와 음료수들을 보고 있자면. 이 ‘유기농’이란 열풍이 한때의 ‘유행’ 정도로 치부되는 건 아닌지, 소비자들의 얇팍한 지갑을 노린 상업주의로만 흐르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그럼에도 이 ‘유기농’ 열풍이 우리 사회에 가져다 줄 영향을 고려해볼 때 아직은 실망보단 희망을 더 봐야 하겠지요. ‘돈’과 ‘인간중심’ 보다는 ‘생명존중’과 ‘평화’, ‘조화로운 삶’으로 이끌어줄 가치로 ‘유기농’이 이제야 발견된 셈이니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2.
15년이 넘게 농업생산방식과 건강과의 관계에 대해 연구해온 피에르 베일이 쓴 <빈곤한 만찬>은 생태계와 조화로운 방식의 농업만이 좋은 먹을 거리, 좋은 건강을 준다고 강조합니다. 비만, 당뇨병, 심장혈관계통 질환과 같은 현대병의 원인이 잘못된 섭생방식, 즉 식생활이나 운동부족과 같은 개개인의 문제이기 이전에 생태계를 보호하고, 먹이사슬을 존중하며,좋은 먹이와 좋은 환경이라는, 인간에게 알맞은 생산방식에서 멀리 달아났다는데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는 거대 제약업계와 농가공식품기업들에 의해 왜곡되고 과장됨으로써 한층 더 멀어졌구요.
 
그리고. 이젠 사람에게까지도 발병하는 광우병이니 조류독감이니 하는 것들이 베일의 말대로 애초 먹던 것들을 대신해 값싼 사료와 먹어선 안 되는 것들을 먹여서 생겨난 것이고. 어떤 어떤 성분을 강화했다고 하는 것들도 따지고 보면 인위적으로 화학물질을 첨가한 ‘약품 구실을 하는 식품’이거나 처음부터 그렇게 자라던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 놓은 것이니. 비틀린 먹이사슬을 복원하고 그 상태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생태계와 건강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시간문제일뿐이겠지요.
 
하지만. ‘해결책을 한 상 그득히 차린 희망의 잔치’가 ‘불꽃놀이와 만찬’만으로만 보이지 않는 건 왜일까요. 그건 분명 ‘좋은 품질의 영양을 섭취하도록 이끄는 예방 정책’임에 틀림없는데도 말이지요. 혹여 베일이 유달리도 고기를 좋아하는, 그래서 지금과 같은 고기 소비량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해서인가요. 아님 오메가 6와 오메가 3의 비율만 적정하면 지금과 같은 고기 소비량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해서인가요. 글쎄요. 솔직히 잘은 모르겠습니다. 
 
3.
가끔, 밭 구경을 나오신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유~ 풀이 왜 이렇게 많아. 약 한 번 치면 싹 죽는데. 그걸 그렇게 놔두나”
 
동네분들은 물론이고 생전 호미라고는 몇 번 쥐어본 적도 없을 이들까지도 한 목소리이지요. 사정이 이러하니 누구에게 밭을 보여주는 게 그리 썩 내키지가 않더랬습니다. 비료도 주지 않아 언제나 키가 작기만한 작물들은 그렇다 쳐도 고랑이며 두둑까지 풀들로 빽빽한 모습을 보고 한 마디 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제딴에는 다협한다고 해서 고추며, 참외 같이 기르기 쉽지 않은 작물은 비닐멀칭까지 했는데. 그런 맘은 몰라주니. 혹여 “농사라는 것 자체가 다른 풀들을 폭력적으로 몰아내며 인간을 위해 한 작물을 기르는 행위인데.....”라는 말이라도 꺼냈다간. 이번엔 뭔 소릴 들을지 상상도 가지 않아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요. 다른 이들이야 뭐라 한들 어떻습니까. 땅을 살리고 그 땅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과 조화롭게 사는 것. 그저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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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2 15:24 2009/12/12 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