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는 것

from 말을 걸다 2017/05/10 22:25
1.
남자는 세 번 운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태어났을 때야 아무것도 모르는 때니 넘어가더라도. 두 번째 울음은 군대는커녕 대학 신입생이던 91년 5월 대한극장 앞과 종로 거리에서 맡았던 최루가스에 젠장. 앞으로 살면서 흘릴 눈물을 다 흘린 만큼이나 될까 싶게 밤낮으로 줄줄줄. 그리고는 93년, 화생방 훈련 때 남들은 죽네사네 할 때 코웃음 치며 그 말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 후로도 저 되지도 않는 말이요. 남자아이에게는 권총을 여자아이에게는 인형을 사다주는, 뿌리 깊은 남성우월주의, 아닙니다. 마초이즘일 뿐이라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믿어왔던 것 같습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10여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는 말이지요.
 
2.
지금은 고기를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잘 입에 올리지 않지만요. 대학원 다닐 때쯤부터 해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전까지 고기는 술과 늘 함께였습니다. 일주일에 적어도 두, 세 번은 술을 마셨으니 고기 역시 삼겹살에 목살, 치킨, 적어도 껍데기를 그만큼은 먹었을 겁니다. 물론 술과 함께 먹었던 것 말고도 제육볶음이니, 불고기덮밥이니 시도 때도 없이 먹어댔으니 그 양이 꽤나 됐겠지요. 게다가 밥은 또 어찌나 많이 먹었던지요. 아버지가 쌀가게를 했던지라 어렸을 때부터 밥 하나는 걱정 없이 먹었던 게 몸에 배서였나요. 그 나에 때면 으레 그 정도는 먹어야 했던 건가요. 고봉밥을 그것도 두 그릇은 게 눈 감추듯 먹어댔었습니다. 덕분에 어머니는 도시락을 몇 개씩 싸셔야했지요.
 
3.
공부를 그리 썩 잘하지는 못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다시 선생님께 갖다드려야 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성적표를 고치다 부모님께 들통 나 혼쭐이 난 적도 있었고요. 고등학교 때는 밤 10시까지 이어지던 야자를 빼먹고 당구장을 기웃거리기도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렇지만. 아무리 1시간 넘게 버스타고 친구 하나 없는 재수학원을 다녔다고 해도 말이지요. 대학이라는 데를 간 건. 역사책 129페이지 오른 쪽 상단에 무슨 그림이 있었는지, 사회책 몇 페이지에는 어떤 표가 있는지 까지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곯아떨어진 이등병이 한 밤중에 불려 들어간 당직실에서 사단장부터 훈련소 동기들 이름까지 줄줄이 꿰차 몽둥이찜질을 피할 수 있었던 것 말입니다.
 
4.
밤새 술 마시는 건 일도 아니었습니다. 2박 3일 MT를 다녀와서도 그날 바로 다른 MT를 갔습니다. 아무리 20대 때라고 해도 말이지요. MT라면 밤새 술 마시는 거 말고는 딱히 하는 것도 없으니 말 그대로 4일, 5일 내리 술만 마셨단 얘깁니다. 물론 속은 부대꼈지만 그렇다고 다음 날 수업을 빼먹거나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되레 어디 또 무슨 건수나 없나 만나는 사람마다 슬쩍 떠보기도 하고 학교 근처 술집을 배회하기도 했으니까요. 누군 40일 연속 마셨다고 하기도 하고 또 누군 두 달 째라고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아침엔 세미나, 오후엔 집회, 저녁엔 술, 밤에도 술. 방학이고 학기 중이고, 주중이고 주말이고 달력이 따로 필요치 않았더랬습니다.
 
5.
꼭 세월호 참사 때부터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전에는 영화나 특히 드라마를 볼 때 옆에서 누가 눈물이라도 흘릴라치면 좀 이해가 되질 않았는데요. 정확하진 않지만요. 아마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40이 넘어가는 언저리부터였을까요. 그땐 옆 사람 몰래였겠지만요. 한 번씩 쓱 눈을 훔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화장실에 간다던가, 물을 마신다던가. 아무튼 그런 횟수가 조금씩 늘더니요. 지금은 옆에 누가 있던, 혼자 보던 말입니다. 조금만 슬픈 장면이 나올라치면 복받쳐 오르는 눈물 때문에 자꾸 멈춰보게 됩니다. 물론 세월호가 물속으로 잠기는 걸 지켜보던 그 때.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통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습니다.
 
6.
밥을 고봉으로 먹고 하루가 멀다 고기를 먹어도 30인치를 넘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좀 살이 불었다 싶을 땐 며칠 운동 하거나 술을 마시지 않으면 한결 몸이 가뿐해졌구요. 남들은 제대하고 난 후에는 살이 좀 졌다, 담배를 끊었더니 배가 나오더라 하던데요. 어찌된 게 변하는 게 없더라구요. 체중도 그렇고 허리도 그랬습니다. 그런데요. 하던 일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어보겠다고 했던 때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옆구리에 살이 좀 붙는가 싶긴 했지만 배는 그대로였거든요. 헌데 지금은요. 먹는 건 예전에 비해 반도 안 됩니다. 물론 고기는 연례행사마냥 거의 먹질 않구요. 하지만 조금씩 잡히던 허리 살부터 윗배까지 만만치 않습니다. 맘먹고 산에를 오르고 아침, 저녁으로 1시간씩 걸어도 말입니다.
 
7.
책상 위는 말할 것도 없고 노트북 여기저기에도 포스트잇이 붙어있습니다. 탁상달력은 중요한 일정을 적어놓는 것하고 자잘하게 기억해야할 것들을 써 넣은 것, 두 개입니다. 일을 할 때 요긴하게 쓰기도 했지만요. 이젠 년 말이나 년 초 다이어리를 사러가는 게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들고 다니는 기자수첩에 노트만도 몇 개씩. 그런데도 약속 날을 잊기도 하고, 치과 갈 날을 놓쳐버리기가 일쑤니. 대체 이게 뭔 일란 말입니까. 어제 분명 이건 꼭 사야 돼, 하고 다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건 이미 꽤 됐습니다.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내일 꼭 하자,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꼭 하는 거야”라고 아무리 되새겨도 안 되기에. 메모지에 적고 수첩에 써 놓는데도 깜빡깜빡. 머리통이 비워가는 느낌입니다.
 
8.
새로 이사 한 집이 동남향집인 탓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해가 뜰 때쯤 눈이 떠졌으니까요. 또 오래된 아파트라 층간 소음 때문 아닌가도 싶었지요. 낮잠을 자든 밤이 됐든 소스라쳐 일어나고 나면 어디선가 쿵쿵 거리는 소리가 났거든요. 그런데요. 밖에 나가 잘 때도 역시 새벽녘이면 절로 깨어나고 조그만 소리나 움직임만 느껴도 쉬이 잠들 수 없는 날이 점점 늘어만 갑니다. 해서 새로 암막커튼을 달아보기도 하고 안대를 써보기도 합니다. 하지만요. 할머니가 그랬던가요. 아니요, 할아버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닭이 채 울기도 전, 마당 쓸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모습. 단잠을 깨우던 그 소란스러움이 말입니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건만 몸이 따라가고 있는 겁니다.
 
9.
지난주 연휴에 지리산 둘레길을 다녀왔습니다. 거리가 워낙 먼 탓도 있지만요. 한 이틀, 사흘 걷고 나면 그만큼은 또 쉬어야 합니다. 그러니요, 연휴가 아니면 쉽게 맘먹기도 어렵습니다. 동해안 바닷길 따라 걷기도 그렇습니다. 강릉에서 가까운 삼척을 걷고 있는 데도 말입니다. 춘천 살면서 다녔던 고성, 속초보다도 속도를 못 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거리를 짧게 잡고 무리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지요. 버스타고 걷고 그러고 나면 다음날 일요일은 종일 쉬어야 하니요. 주말이 짧게 느껴져 나서기가 쉽지 않은 겁니다. 헌데요. 이렇게 걸어서 여행한 것 말구도요. 어디 한 삼, 사일 밖에 나갔다 오거나, 혹 아침 일찍 또는 저녁에 조금만 늦게 집에 들어오기만 해도요. 다음날은 꼬박 쉬어야 합니다.
 
10.
30대엔 30km로 40대엔 40km, 50대는 50km 속도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도 있지요. 젊었을 때와 나이 들었을 때 느끼는 세월의 흐름을, 갓 입대한 병사와 말년 병장이 가지는 서로 다른 마음입니다. 하지만 세월유수(歲月流水)는 30대도 70대도, 이등병도 예비역도 막지 못합니다. 다만 느낌만 저리 다를 뿐이지요. 그러면서도 마음 아린 건. 청춘이 오래지 않음을 모르는 건 그들 뿐, 나이가 든다는 걸 애써 외면하는 것도 오직 그때뿐이라는 겁니다. 쉬이 피곤하고 눈물이 많아지며, 아침잠이 없어지는 것. 나오는 배가 더는 어쩔 수 없다고 돌아서면 자꾸만 까먹는 걸요. 40이 넘고 50이 다 돼서야 이제 겨우 깨닫는 것. 언제쯤 깊고 넓어질 수 있을까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7/05/10 22:25 2017/05/10 2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