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코로나가 바꾼 풍경(2020년 10월 9일)
우리 사회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가져다 준 것들이 무었일까. 죽음, 면역력이 약한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다. 해고, 역시나 비정규직과 같은 불안정 고용 노동자들에게 가장 먼저 닥쳐왔다. 폐업, 자영노동자의 삶도 피폐해졌다. 마스크, 요일제까지 등장했을 만큼 필수품이 됐다. 비대면, 원격수업과 재택근무가 일상이 된 풍경.
이동이 적어졌던 탓일까. 하늘이 맑아졌다. 올 봄, 예전과 달리 미세먼지 경보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 얼굴에 황사마스크는 여전했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동쪽바다는 늘 파랗다. 그것도 짙푸르게 파랗다. 죽변항 앞 바다도 그렇다. 아니, 여긴 파랗다 못해 옥색바다다. 세상 이렇게 맑은 바다가 어데 또 있을까.


점심 먹고 느긋이 커피까지 마셨는데도 이제야 2시다. 찬찬히 두, 세 시간만 걸으면 울진 읍내니 바쁠 이유야 없지만 사람 일은 모르니 슬슬 차비를 한다. 바람이 뒤쪽에서 불어오니 해를 가릴 양산은 소용이 없다. 몇 번 펼쳐보기는 했는데 그때마다 훌러덩. 오가는 사람이 없으니 이럴 때 마스크를 벗어도 좋으련만. 햇빛 가리개로 그건 또 쓰고 있다.
겨우 40여 분이나 걸었을까. 결국 온양 2리 마을 쉼터에서 얼굴 가리던 것들 다 벗어던지고 숨을 몰아쉰다. 비대면 시대, 오가고 먹고 마시는 중에만 조심한다면 이만큼 좋은 여행법도 없을 터인데. 내려쬐는 햇볕이 따가워도 어느 정도여야지. 산길도 아니고 푸른 바다 보며 걷는 평지길인데도 힘이 부친다. 숨쉬기가 쉽지 않아서인가.

그래도 어느 해안가 민박집 간판 ‘글랑블루’가 딱 어울리는, 바다가 연이어 펼쳐지니 눈만큼은 호사다. 그것도 바로 길 앞으로 20여 분이 넘게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묵호로 이사와 매일 바다를 봤지만 여긴 또 다르다. 조금 가다 바다보고 또 조금 가다 쉬고. 넉넉히 시간 잡아 걷기로 한 게 참 다행이다.

바다와 헤어질 때가 됐다면 이젠 울진 읍내로 들어왔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속초나 강릉, 동해와는 다르다. 번잡한 시내를 통과하는 것도 아니니. 초여름이면 연꽃이 한창이었을 연호공원, 남대천을 끼고 걷는 호젓한 둘레길이어서 그렇다. 오늘은 일찍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연호공원에서 멈추기는 했지만.
둘째 날, 망양정 풍경소리에 머뭇거리다(2021년 1월 16일)
바람이 불기 전부터 예상했던 대로 겨울 대유행이 곳곳을 휩쓸고 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불과 며칠 전만해도 천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오고 새로운 변이도 들어왔으니. 얼굴 분간이 어려우리만치 필수품이 된 마스크와 길거리에서마저 멀찌감치 떨어져 고개를 돌리는 모습은 더 이상 생경한 풍경이 아니다.
문 닫은 여행사와 항공사가 속출하고 숙박업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막대한 항공유가내 뿜는 대기오염물질을 생각하면 지구가 신호를 보낸 것은 아닌가도 싶다가. 일자리를 잃고 절망에 내몰리는 이들이 언제나 그랬듯 사회적 약자들임을 보면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 막막하다. 재난 역시 계급화 되어 있으니 말이다.
거리를 두고 지역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 그래서 그곳에 깃든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것. 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이 아닌 두 발로, 두 눈으로 만나는 여행. 코로나가 가져다 줄 새로운 비대면 여행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걷기는, 걷기여행은 가장 좋은 여행 방법이다. 심지어 함께 걷는 이와도 적당히 거리를 둘 수 있으니.
그래서일까. 지난번부터 은근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 같았으면야 “안녕하세요. 해파랑길 걸으시나봐요.” 인사를 나눴겠지만. 눈인사는커녕 마스크를 먼저 확인해야하는 안타까움. 그래도 반갑기만 하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도 씩씩하게 오르막을 오르는 사람들. 좁은 갓길에 한 발씩 이쪽, 저쪽으로 옮기는 사람들.
남대천을 따라 이어진 나뭇길을 걸으니 이전 길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시간도 짧게 걸리고 시야가 트이니 좋긴 하다. 특히 은어다리를 건너며 보이는 파란 바다와 살얼음이 내려앉은 강. 이쪽 바다와 저쪽 강을 넘나들며 한가로이 떠 있는 철새들. 쏟아지는 따스한 햇볕. 겨울은 겨울이라고 사정없이 몰아치는 바람만 아니라면 쉬엄쉬엄 걸을 터인데.

다행인지 세찬 바람을 피할 만한 곳이 금방 나왔다. 엑스포공원과 왕피천생태공원이 제방을 따라 나뉘어 있는 곳. 뜬금없는 동물원에 갇혀 있는, 사막에 있어야 할 여우와 거북이가 있는 엑스포공원은 바람과 햇볕을 피해 잠시 쉴 수 있었고. 바리바리 싸가져 온 감자와 고구마, 귤은 생태공원에서 먹었으니 어느 쪽이든 쉬어가기 좋다.
수산교는 26구간이 시작되는 곳이자 25구간이 끝나는 곳이다. 물론 거꾸로 걷는 이들은 끝나는 곳과 시작되는 곳이 반대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러하다. 여기서 잠깐 스탬프도 찍고 마트 앞 버스정류장에서 군것질도 하고 쉬어간다. 아무래도 겨울바람이 겨울바람이긴 한가보다. 걷는 속도도 그렇거니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금방 또 쉬고 싶어진다.

망양정은 멀리까지, 좌우로 넓게 내려다보이는 바다도 그럴싸하지만 풍경소리길이라는 산책길이 으뜸이다. 양옆으로 난 대죽 숲을 따라 짧지만 오르락내리락. 바람에 실려 오는 풍경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걷는 길. 여기선 숨소리도 더 줄여야 하겠다. 해서 발걸음을 더디게 했던 그 세찬 바람이 여기에선 되레 고맙기만 하다.
해맞이공원을 내려와서부터는 지난 번 걸었던 해안도로와 엇비슷하다. 왼편으로 쪽빛 바다가, 오른편으로는 고만고만한 마을이 쭉 이어진다. 산포4리, 2리, 3리. 그러고 보니 4리 다음 마을이 3리가 아니라 2리네. 시간이 쪼매 애매하게 남았긴 하지만, 오늘은 여기 3리에서 버스를 기다리기로 한다. 계속 발걸음을 늦췄던 그 세찬 바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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