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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아톰이 처음 흑백 애니메이션 영화로 제작됐던 1963년은 발전시험로 및 원자력 발전에 성공한 해입니다. 그 후 컬러텔레비전 애니메이션으로 리메이크 됐던 1982년은 1971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 이어 제2발전소가 가동을 시작한 해이기도 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다카하다 이사오와 함께 제작한 코난이 NHK에서 방영되기 시작한 1978년은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핵확산금지법을 개정한 해입니다. 이로 부터 일본은 미국의 새로운 행정부와 핵연료폐기물을 재처리하는 공장 건설을 위한 협의를 시작했고, 1993년 착공을 하게 됩니다.
 
2.
아톰은 핵분열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움직이는 로봇입니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의 위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톰이 등장한 겁니다. 패전 후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끝임 없이 고민하면서 사랑과 우정, 용기를 북돋우는 주인공이 역설적이게도 핵에너지였던 셈입니다.
 
반면 코난은 “그때 남아돌아가는 에너지를 가지고 멋대로 놀아난 결과가 그 대변동을 일으킨” 이후에 살아남은 세대들 이야기입니다. 다시 “하늘에서 빛나는 태양의 은혜로 대지와 바다는 식물을 키우고 동물을 기른다. 인간은 그 자연 속에서만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는” 시대로 돌아간 포비와 라나, 코난이 펼치는 모험 이야기인 겁니다.
 
3.
에너지 고갈과 기후온난화에 시대에 우리나라가 채택한 대응은 핵에너지입니다. 발전과정에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청정에너지라는 것이 그 이유라는데. 우라늄이라는 광물 역시 무한정 묻혀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그것을 채굴, 농축, 운송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화석연료와 그에 따른 탄소배출은 뭐랍니까.
 
아직까지도 처리방법을 정하지도, 정할 수도 없는 핵폐기물들은 또 어떻게 하려는지요. 더구나 핵으로 망했으나 핵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리해 되레 그 핵으로 전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나라가 바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니 핵 말고 다른 대안이 분명 있음에도 고집하는 이유는 혹 다른 데 있는 건 아닐까요.
 
4.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는 글쓴이가 과학전문 ‘기자’인 덕에 가능한 쉽게 에너지 문제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아톰의 시대’를 지탱하고 있는 화석, 핵에너지의 고갈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제기이자 석유 없는 세상 즉, ‘코난의 시대’를 서둘러 준비하자는 건데요. 결코 만만치 않은 두께임에도 하룻밤 사이 다 읽었으니까요.
 
물론 책에는 최근에 등장하는 이슈들도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석유정점을 둘러싼 쟁점과 바이오디젤, 바이오매스, 풍력 등 지속가능한 에너지들이 어느 나라, 도시에서 사용되고 있는지 말입니다. 덧붙여 각 장이 끝나는 곳마다 추천 도서들이 소개돼 있습니다. 꽤 많은 책들이지만 더 깊은 고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니 꼭 참고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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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7 20:54 2015/06/07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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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구제금융 이후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양극화로 치닫고 있습니다. 굳이 저소득층과 고소득층은 기존 소득계층을 유지하겠지만 중산층은 감소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아니라도. 팍팍한 살림살이에 동전회수율은 높아지는 반면 공항이용객은 해가 갈수록 늘어만 가는 것만 봐도. 80대 20을 넘어 90대 10으로까지 진행됐다는 얘기가 결코 빈말은 아닐 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화될 거란 우울한 전망만이 나오는 이유는, 맞습니다. 지난 20여년의 시간 속에서 체념되고 내면화된, ‘나만 잘살면 되는 겨’ 식의 삶이 너무나 보편화됐기 때문입니다. 경쟁, 아니 정확하게는 무한경쟁만이 사회를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믿음이 맹신이 된 겁니다.
 
게다가 어느 도지사가 스스럼없이 내뱉는 말마따나 신분사회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어느 순간 절망으로 떨어지곤 합니다. “상류층의 부와 신분 대물림”이라는 게 고작 아이들 밥그릇 빼앗아 교육복지에 써서 될 거였다면. 지금껏 해왔던 그 많은 ‘서민복지’들은 다 뭐였단 말입니까.
 
2.
글쓴이는 경상도 단성현의 ‘호적대장’에서 발견한 한 인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김홍발’이라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인데요, 실은 ‘김홍발’보다는 그의 조부 ‘김수봉’이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홍발’은 ‘김수봉’이 평민으로 신분상승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양반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다 알다시피 조선 시대는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왕을 최고 정점으로 양반과 중인, 평민, 천민으로 이루어지는 피라미드형 사회였던 겁니다. 책 제목과 부제에서 잘 드러나듯. 피라미드에서 가장 밑바닥이라고 할 노비였던 ‘김수봉’, 그리고 그의 자손들이 피라미드의 제일 윗부분인 양반으로 올라서기까지 과정을 추적한 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대대로 주인 집안에 예속된 소유물로 신분적 억압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생계를 보장받아야 했던 대부분의 다른 노비들과는 다른 삶을 이어갔던 ‘김수봉’과 그 후손들.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급격히 신분제가 흔들리기 시작하던 때임을 감안해도. 그들이 거친 과정은 그야말로 ‘머나먼 여정’이었음이 틀림없을 터이고, 글쓴이는 그 긴 여정을 꼼꼼히 기록한 겁니다.
 
3.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자수성가’라는 말도 흔하지 않았구요. 검정고시로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대통령까지 됐던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요즘엔 개천에서 용은커녕 모 항공사 회항사건에서 보이듯 새로운 신분사회를 알리는 말과 행동이 스스럼없습니다.
 
반면 ‘가난은 대물림된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도 복지 지출을 줄이려하는 정부를 옹호하는 데 쓰고 있구요. 물론 자기들이 하는 복지는 신분상승을 위한 ‘희망의 사다리’인 반면, 남들이 하고자하는 복지는 ‘포퓰리즘’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노비 ‘김수봉’과 그 후손들이 보여준 신분상승을 향한 의지와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이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쌓는 ‘스펙’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책에는 조선 후기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도 있지만 결국 노비에서 양반으로 올라선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보자면, 어찌됐거나 ‘김수봉’에서 ‘김홍발’로 이어지는 어느 한 노비 가계(家系)는 결국 양반으로 신분상승을 이뤘지만. 한 집 건너 볼 수 있는 ‘장그래’들은 과연 ‘정규직’이라도 될 수 있는 걸까요. 어찌 보면 조선시대보다도 더 한 신분사회, 그 속에서 신분상승은 꿈도 못 꿀 일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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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4 10:19 2015/04/14 10:19
사용자 삽입 이미지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폭발이 났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가 아직도 또렷합니다. 먼저, 결국 일이 터졌구나, 탄식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든 생각은, 맞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이전에 있었던 스리마일 섬과 체르노빌 사고가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던 것인데요. 대량으로 누출된 방사능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폭을 당한데다. 사고 인근 지역은 아직까지도 폐쇄된 채 언제 복구가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후쿠시마에 살고 있던 200만이 넘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피난구역으로 지정했던 반경 20-30km 내에 있는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더 걱정이 됐던 건.
 
상대적으로 방사능 피폭에 취약한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이었습니다. 가급적 빨리, 다른 무엇보다 우선 대피시켜야 한다. 20-30km가 아니라 50km, 100km까지 방사능 수치를 조사해 평상시보다 높으면 싹 다, 신속히 비워야 하는 거 아닌가 말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일본 정부도 같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핵발전소를 중심으로 20킬로미터 권역, 30킬로미터 권역을 설정하고 옥내 대피지역, 자발적 피난지역 등을 지정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사고 수습은 결코 적절하지도, 세심하지도 아니었음이 곧 드러납니다. 책에서 지적하듯이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피해보다 세심하지 못한 일괄 소개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게 된 겁니다.
 
수송과정에서 사망한 것은 물론이고 집과 땅을 잃었다는 상실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까지 더하면. 모두를 몰아내는 것은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아니 무책임한 방법이었다는 겁니다.
 
게다가 정확한 정보를 주지도 않은 상황에서 시행되는 일방적이고도 강제적인 방식은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글쓴이가 살고 있는 미나미소마 시 하라마치 구만 해도 옥내대피역이지만 주민 3만 명 중 80퍼센트가 자발적 피난생활을 택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사키 다카시 역시 같은 지적을 합니다. 98세의 노모와 치매에 걸린 부인을 데리고 집을 떠나는 것, 그것은 그 자체가 또 다른 재앙이라는 겁니다. 면밀하고 세심하게 주의를 살피며 주민들을 대피시키지 않는 이상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사사키가 머물렀던 지역은 방사능 수치가 낮았습니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전소로부터 반경 몇 km 이내는 모두 ‘어쩌구, 저쩌구’와 같은 대책들은 세심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반경 안이라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서는 방사능 오염 정도가 다를 수가 있기도 하구요. 경계선을 놓고 한 마을 내에서도 어느 집은 대피지역으로 어느 집은 대피하지 않아도 되는 지역으로 나누어지기도 하니.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처음 사고 소식을 접하고 들었었던 생각도, 사고 직후 일본 정부가 취했던 조치들은. 그다지 세심하지 않은데다 사태를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대처하는 모습이 아니었음이 분명해집니다.
 
물론 전대미문의 사태 앞에서, 또 피해 수준을 예상할 수 없는 사고 앞에서는 가장 보수적이면서도 할 수 있는 한의 최대치를 해야 한다는 것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과거에 발생했던 비슷한 사례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되레 그렇기 때문에 좀 더 세심하고 주의 깊은 대처가 있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태를 신속히 수습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속에서 지속되는 삶은 그 무엇보다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이니까요.
 
다카시가 치매에 걸린 아내와 함께 핵발전의 재앙 속에서 행한 ‘농성’에 대한 기록은 2012년 12월 3일이 마지막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인간 존재와 실존에 대한 물음과 무책임한 국가에 대한 분노, 그것들 말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처럼 “내 삶이 계속되는 한, 내 ‘이야기’는 계속 것이다. 그리고 분노할 것이고, 그 정당한 분노를 에너지 삼아 끝까지 꿈을, 희망을, 이상을 이야기 할 것”(p.313)임은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거대한 사태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배울 게 없을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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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0 15:11 2014/12/2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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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종종 ‘진실’과 마주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진실’을 아는 순간 겪게 될 갈등과 죄책감 때문이지요. 가령 물을 가둬둔다면 썩게 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진실’을 받아들인다면. 뛰게 될 집값과 죽어갈 강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은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또 녹조로 변해버린 강을 보며 마냥 쾌재를 부를 수만은 없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거짓’을 ‘진실’이라 믿기도 하고. 때론 나서서 ‘진실’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특례입학이니 의사자 지정을 요구하지도 않았건만. 세월호 유가족들이 제출한 특별법이 어느새 ‘노후보장특별법’으로 얘기되고. 법률에 의해 설치된 될 국가기관인 특별위원회에 수사와 기소권을 부여하는 것마저 ‘초헌법적 요구’가 되기도 합니다.
 
2.
매우 자극적인 제목을 뽑았다는 것만 빼면. 이 책 역시 사람들에게 갈등과 죄책감을 주기에 충분한 ‘진실’들을 담고 있습니다. 예컨대 1980년 이후로 1인당 식량생산량이 5배나 증가했지만 여전히 10억 명 이상이 굶주리고 있는 기이한 현상에는 공장식(기업식)축산업이 자리하고 있다는 ‘진실’ 말입니다.
 
그러니 188쪽에 소개돼 있는 낭비되는 단백질 비율과 185쪽의 고기 생산에 필요한 물의 양, 그리고 195쪽에 제시된 해결책을 보고 있노라면. 굶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기부를 요청하는 것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빠지는 대신. 식탁에 비육식 식단을 올림으로써 기아 해결에 효과적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3.
국정조사는 하기는 했었나 싶게 아무런 성과가 없이 끝났습니다. 검찰 수사와 관련 재판은 피의자들이 부인하고 떠넘기기를 작정한 마당에 지지부진하구요. 대통령은 말에 대한 책임을 지기보다는 단호히 사법체계를 흔드는 쪽을 택했습니다. 구조를 위한 ‘골든타임’을 허망하게 보낸 만큼이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골든타임’ 역시 그렇게 지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유가족이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진실’은 아직 저 진도 앞 바다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축산업계에 지원되고 있는 직.간접 보조금 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형 축산기업이 내뿜는 환경오염은 피해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측정조차 하질 않구요. 동족의 뼈와 살에 항생제, 성장촉진제를 섞은 먹이는 사일로에 늘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 공장식 축산업이 환경에, 건강에, 지역사회에, 노동자들에게, 납세자들에게, 기아문제 해결에 어떻게 해로운가 하는 ‘진실’은 축사 안에 갇혀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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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3 10:48 2014/12/03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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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항은 이제 겨우 대 여섯 살인 얼라가 혼자 걸어가긴 먼 곳이었지요. 그래서 얼라는 늘 막내 삼촌을 졸라야만 했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에 대나무 낚싯대를 꼭 쥔 채 말이지요.  막내 삼촌은 넓디넓은 논 한가운데서 피를 뽑다가도. 무릎까지 자란 풀 더미를 낫으로 베다가도 허허 웃으며 자전거에 올랐습니다.
 
외할아버지는 화포리 집 뒷산 대나무 숲에서 장끼 잡는 일에 꼭 여섯 살배기 얼라를 데리고 갔습니다. 대낮에도 짙은 녹음으로 햇빛을 보기 힘든 그 숲은 얼라에게 꽤나 무서운 곳이었지요.  그래서일까요. 지금은 고걸 어떻게 잡았는지 통 기억이 나질 않지만, 꿩 잡는 외할아버지와 떨어질 새라 연신 발뒤꿈치를 쫓아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었답니다.
 
2. 
처음부터 새만금 사업은 낙후된 지역을 살려낼 구세주로 떠받들어졌습니다. 그러니 경제성이니 식량안보니 하는 말들은 말장난에 불과했지요. 또 갯벌이니 그 안에 사는 뭇 생명들, 망둥이, 도요새, 피조개 등은 처음부터 관심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개발로 인한 ‘돈 잔치’만이 중요했던 겁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업 목적도 바뀌었습니다. 이미 들어간 돈이 있으니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말도 나왔구요. 썩어가던 시화화가 해수와 만나자 살아났는데도 여긴 다르다고 강변했습니다. 결국 ‘세계 최대’라는 요란한 수식어만 남게 됐습니다. 바닷물은 들어올 수 없게 됐고 만경강, 동진강 물은 나갈 수 없게 된 겁니다.
 
3.
갯벌 가장자리에 장화를 신고 선 막내 삼촌은 밀물 때를 맞춰 낚싯대를 던졌습니다. 망둥이는 낚싯줄에 줄줄 올라왔습니다. 거의 매번, 던지는 족족 잡혔단 말입니다. 익숙한 솜씨로 머리와 꼬리를 잘라낸 막내 삼촌은 어린 조카에게 된장을 듬뿍 바른 마늘을 올려 내밀었습니다. 얼라는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아직 꿈틀대고 있는 망둥이를 덥석 입에 넣었습니다.
 
잡아온 꿩을 할머니께 건네주고는 외할아버지는 썰물 때를 맞춰 수건을 챙겼습니다. 이번엔 할아버지가 외손주의 발뒤꿈치를 아니, 손을 꼭 잡고 미쳐 다 빠지지 못한 바닷물이 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갯벌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바닷물에 몸을 담근 아이는 또 놀란 눈입니다. 가만 누워 있으니 몸은 저절로 둥둥 뜨고, 발가락 사이로는 갯지렁이가 꾸물꾸물. 
 
4. 
새만금은 박정희와 전두환이 서남해안 간척 자원 조사를 한 이후 대통령 선거 때마다 난도질당할 처지로 떨어졌습니다. ‘역사의 반동이며 집권 여당인 민정당은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p.37)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까지 그야말로 ‘제가 대통령이 되면 새만금, 확실하게 밀겠습니다.’(p.174)가 반복되며 밀어붙였던 겁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 막내 삼촌 등 뒤에서 새근새근 잠에 빠졌던 아이는. 미끈한 갯벌에 발이 푹푹 빠지면서도 외할아버지 등에 업히지 않았던 아이는 삼심년도 더 지난 지금 그 심포항과 화포리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막내 삼촌이 잡아줬던 망둥이, 외할아버지와 목간했던 갯벌에서 아직 살아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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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5 23:18 2014/09/15 2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