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천성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막아보겠다고 나선 지율 스님은 “저를 보지 말고 제 뒤의 천성산 생명붙이를 봐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바위를 깎는 포크레인 소리에 묻혀 그 목소리는 아주 가느다랗게 들렸습니다. ‘누구 없나요? 살려주세요...’라고.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늙은 어머님의 신음 같기도 한 이 소리’는 꼬리치레도롱뇽만이 울부짖는 소리가 아니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뭇사람들은 스님만 쳐다보며 하루, 하루 날짜만 샜습니다. 또 나라 걱정에 여념이 없는 이들은. 혈세(血稅) 낭비라는 얘기는 그나마 양반이었습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뜻도 모르는 말도 갖다 붙였지요. 스님이 하는 일은 ‘에코파시즘’이라나 뭐라나. 재판관에서부터 대선후보로까지 오르내리는 전(前) 청와대 수석까지. 사실 왜곡은 기본, 그나마 한 약속마저 손바닥 뒤집듯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님이 한 말, 아니 간곡한 호소에는 좀체 귀를 열지 않았습니다. 아니. 스님이 말씀한 대로 ‘천성산 생명붙이’는 외면하고 제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이지요.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 오른 지 250일이 훌쩍 넘었습니다. 아들 전태일 곁으로 가신 이소선 어머니마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해 꼭 살아 내려오라며 울부짖었지만. 또 김 지도위원 역시 여전히 정리해고가 철회되지 않는 이상, 내려오지 않겠다고 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저 하루, 하루 날짜만 꼽습니다. 희망버스며 희망비행기가 아무리 떠도. 현대자동차노조가 조합원 대신 식당 여성노동자를 버렸던 일이 다시 반복되고. 자본이 갈라놓은 정규-비정규가 노동자들을  옥죄고. ‘미래경영상의 이유’라는 기가 막힌 논리도 스스럼없이 말해지고. ‘귀족노조’니 ‘노조이기주의’란 공격에 꼼짝 없이 당해야 하는 현실이. 바로 그 정리해고 때문임을 보려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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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8 18:35 2011/09/28 18:35

1.

‘선’과 ‘악’은 무엇으로 구분될까요. 대게 영화에서는 ‘악당’이 등장하고 이에 맞서는 ‘영웅(들)’이 나옵니다. ‘나니아 연대기’에서와 같이 말입니다. 여기서 ‘선’은 당연 ‘아슬란’ 혹은 나니아에 초대된 네 명의 아이들이며 ‘악’은 ‘하얀마녀’입니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은 어떤가요. ‘선’과 ‘악’,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하나 더. ‘착함’ 또는 ‘나쁨’은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 사람들마다 이런 때엔 ‘착함’, 저런 경우엔 ‘나쁨’이라고 말하는 어떤 기준들을 갖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경우엔 ‘골룸’에서보다 더 ‘착함’과 ‘나쁨’을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나가수’에서 김건모의 탈락에 ‘재도전’ 기회를 말했던 ‘김제동’이 ‘나쁜가?’, ‘착한가?’와 같이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2.

석유,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는 쉽게 ‘나쁜’ 에너지로 분류됩니다. 반면 ‘천연가스’, ‘바이오 에너지’ 등은 ‘착한’ 에너지라며 높이 치는데요. 이때 ‘착한’과 ‘나쁜’을 가르는 기준은,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느냐, 발생시키지 않느냐 또는 많이 발생시키느냐, 적게 발생시키느냐, 일겁니다. 하지만 바이오 연료라고 불리는 팜 오일의 원료를 생산하는 여성노동자 조와 리마의 말을 듣고 있으면. 방금 붙인 이 ‘착한’이란 수식어가 적합한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난 오래 전에 이혼했어요. 열여덟 살인 큰 아이가 일을 한다고 하지만, 네 명의 아이들 모두 내게 의존하고 살아요. 그래서 난 아파도 안 되고, 다쳐서 병원비가 들어도 안돼요. 그런데 이미 한쪽 눈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고, 등은 무거운 농약 살포기를 견디지 못해 혹이 나기 시작했어요. 매일 하던 기침에 이제는 피까지 섞여 나오고 있구요. 이러다 정말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게 되는 건 아닐 지 걱정이에요.”(인도네시아 팜 플랜테이션 노동자 ‘조’ p.145)

 

“난 집안 일만 하던 가정주부였어요. 그런데 남편이 일하던 목재 공장 주변이 모두 팜 농장으로 변해버렸어요. 남편이 먼저 팜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이제는 남편이 벌어오는 것만으로 살림을 꾸려갈 수 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도 팜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죠. 그렇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어요.”(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북부의 팜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리마’ p.146)

 

3.

한국수력원자력(주) 홈페이지에 보니 ‘원자력발전’을 대략 이렇게 소개해놨습니다. ‘지금 지구 환경은 화석연료의 과다한 사용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는데 원자력발전은 발전원별 온실가스 발생량이 가장 적어 환경친화적 에너지이다.’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원자력발전’은 ‘착한’ 에너지로 구분할 수 있겠지요. 어, 아니, 아직은 잘 모르겠다구요? 왜지요? 옆 나라에서 발생한 사고를 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구요. 어허, ‘원자력발전은 석유파동(석유공급불안/고유가시대)이나 에너지무기화에 대비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원’ 인데다가 ‘우라늄을 원자로에 한번 장전하면 12~18개 월 가량은 연료를 교체하지 않아도 되므로 그만큼의 연료 비축효과가 있는 셈’인데, 어찌 ‘선’한 에너지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4.

‘선’과 ‘악’, ‘착함’과 ‘나쁨’은 결국 ‘정의’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의’는 철학과도 연관되는 것이요, 사상, 세계관과도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이쪽에 서 있는 이들에겐 ‘선’이요 저쪽에 서 있는 사람들에겐 ‘악’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착함’과 ‘나쁨’ 역시 철학, 사상, 세계관을 같이 하는 사람들로 또 달리 하는 사람들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에너지 문제와 관련한 ‘착한’과 ‘나쁜’의 구분 또한 사상, 세계관, 철학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 ‘핵발전’과 ‘팜 오일’을 어떤 철학과 세계관을 가지고 보느냐, 어떤 사상으로 평가하느냐에 따라 ‘정의’로운가, ‘정의’롭지 않은가, 로 나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착한 에너지 기행>에서 말하는 ‘기후정의’가 가지는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다.  

 

5.

모종이며 씨앗을 심은 지 이제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달력을 보니 6월.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모종이며 씨앗들 사이로 풀이 삐죽삐죽 올라오는 시기이기도 하지요. 처음 농사를 지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아니 재작년까지의 기억도 생생합니다. 고추며 토마토 사이로 하나, 둘 보이던 풀을 놔뒀다가 한여름 땡볕에 땀을 흠뻑 뒤집어쓰고 골 사이를 기어 다니던 기억이 말입니다. 처음엔 뭐 이쯤이야 하고 나중에 한 번에 풀을 매야지 했고, 조금 지나선 뭐 낫으로 쓱쓱 베어버리면 되지 했다가. 걷잡을 수 없이 자라는 잡초에 완전 두 손 든 것이었지요.

 

이제 ‘환경위기’, ‘지구위기’에 대해 딴죽 거는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그만큼 위기가 매우 빨리 다가오고 있고 또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도 캐나다의 몬트리올, 케냐의 나이로비, 인도네시아 발리, 폴란드의 포즈난,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렸던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는 코앞에 닥친 이 위기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논의했다기보다는 책임전가와 발뺌, 생색내기, 위장, 미루기 등등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돈과 권력을 움켜쥔 사람들에겐 이 ‘위기’란 남의 ‘위기’일 뿐이요, 다시 한 번 돈과 권력을 공고히 할 ‘기회’일 뿐인가 봅니다. 하지만 손으로 쓱쓱 지나가면 될 일을, 호미로 긁어내기만 하면 될 일을, 낫으로 쓱쓱 베어버리면 될 일을 멍하니 지켜보다 나중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 거라는 걸. 꼭 그들만 모르는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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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1 20:53 2011/06/01 20:53

사용자 삽입 이미지1. 

일본에서 발생한 핵발전소 사고 여파가 1천 킬로미터 밖에 있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까지 뒤흔들고 있습니다. 비라도 내릴라치면 비옷과 긴 우산 판매량이 늘어나고, 굳이 황사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마스크에 방독면까지 사가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아이를 가진 엄마들은 며칠 째인가요, 집밖을 나서기가 두렵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도 그 피해 정도와 방사능 유출량을 정확하게 또 신속하게 알리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정부는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더니 정수장에 천막을 두루는 어처구니없는 일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진 봐줄만 합니다. 국민들은 불안해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한나라당과 보수언론들은 예의 그 ‘빨강색’ 카드를 또 꺼내들고 있으니. 참 어처구니 없습니다. 

 

2.

물가가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747이라는 허황된 숫자놀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은 얼마나 다급했는지. ‘기름 값이 묘하다’는 말로 정유사를 압박했습니다. 사실 기름으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회에서 석유 값 폭등은 그 파급력이 무시무시하기 때문이지요. 자동차 굴리는 건 세발에 피. 하다못해 농사짓는데도 석유가 없으면 가능하기나 한 건가 싶으니.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영, 감이 없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독과점으로 매년 수천억 원씩 이익을 내고 있는 이 정유사들이 마지못해 찔끔 값을 내리기는 했는데. 2MB 대통령, 그거로는 치솟는 물가 잡기 쉽지 않다, 싶었는지. 아니 자신이라고는 통 없는지, 결국 속내를 드러냅니다. ‘기업소비, 가계소비, 소비를 줄이는 게 극복하는 길’이라고.

 

3.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엔 핵발전소가 없습니다. 다만 원자력발전소가 있을 뿐이지요. 또 원자력 공학 기술자는 텔레비전만 틀면 여기저기서 얼굴을 들이대는 데, 핵 공학 기술자는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듭니다. 분명 원자력이라는 게 핵분열을 이용하는 것임이 틀림없는 일인데도 말이지요. 아마도 그들은 핵폭탄과 핵전쟁이라는 끔찍한 이미지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공포를 감추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애써 눈감습니다. 아니 이 파괴적인 기술이 만들어내는 풍요와 소비를 더 누리기 위해 거짓말을 참말로 바꿔 세뇌합니다. “다 괜찮을 거야. 그리고 그런 일은 결코 내게 일어나지 않아”  

 

4.

2MB이 모처럼 정곡을 찔렀습니다. ‘소비를 줄여라.’ 맞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흥청망청 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땅에서 퍼 올리는 석유도, 우라늄도 언젠가는 끝을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뭐,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과학자들은 아직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유전도 많고 또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경제성이 낮은 기름도 끌어올릴 수 있다고도 하고. 핵분열 대신 핵융합을 이용하면 방사능도 없는 깨끗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으니. 지금 이 잔치를 지속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이 결국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걸 그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석유도, 우라늄도 자연이 품고 있는 한도 내에서만 인간이 가져다 쓸 수 있을 뿐이고. 핵융합이니 하는 것도 단 0.0001%의 확률에 의한 사고 하나로 상상조차 못할 일들이 생기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러니 끝이 보이기 전, 탈출구를 만들기 위한 밑천으로라도 쓰려면 지금부터 아끼고 또 아껴야 합니다. 정말 필요할 때 이마저도 없다면 대체 어찌하겠습니까.   

 

5.

이필렬 교수는 책머리에 다음과 같은 구절로 얘기를 시작합니다. 

 

“석유가격이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세계 주식시장도 깊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페르시아만에 또다시 전운이 돌기 시작한 탓이다”(p.3)  

 

그리고는 이 휘황찬란한 산업문명사회를 떠받치는 석유를 둘러싼 논란들과 석유를 대신할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추앙받는 핵기술이 가진 반(反)생명성을 파헤칩니다. 석유시대와 핵시대가 가져다 준 축복을 영원불멸의 것으로 여기고, 그 달콤함을 놓지 않으려는 인간의 탐욕이 지금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 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석유시대는 필연적으로 종말을 맞게 되어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한다. 석유 자동차를 타고, 석유 난방을 하고, 석유 전기를 쓰는 이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p.23)

 

“핵기술은 자연의 아주 미세한 원자핵이라는 부분까지 침투해서 건드리고 조작하고 파괴한다. 이 기술로써 인간은 물질적 자연을 거의 정복한 셈이다. 즉, 물질적 자연에 대해 신적인 존재가 되어 원자핵이라는 물질적 자연의 가장 내열한 곳까지 ‘희롱’할 수 있게 된 것이다”(p.201)

 

이필렬 교수는 대안으로 풀뿌리 에너지 자립운동과 전력구조의 분산적 구조 개편을 얘기합니다. 어찌 보면 너무 뻔한 결론으로 가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이 길로 가는 것이야말로 파국을 막는 길임에도 가지 않으려, 잘못된 길이라는 거짓 선동에 내심 찬성하고 있는 건. 또 지금까지 위기다, 라는 말은 많았지만 지금까지 잘 되어 왔기에,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도 그때 가서 어떻게 되겠지, 하는 태도는.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이 뻔한 결론. 뻔한 길. 뻔하다고 귀 닫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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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16:18 2011/04/17 16:18

1.

대동강 물을 팔았다고 유명한 봉이 김선달이 있지요. 요즘은 하도 이 김선달 같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다지 시선을 끌진 못하겠지만. 그때만 해도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사건이었겠지요. 생각해보세요.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렀고. 내일도 그냥 저렇게 흘러갈 강물을 팔아먹었으니 오죽했겠어요. 뭐 지금 같았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들 하겠지만 그때라고 어디 그게 가능한 일 이기나 했겠습니까. 하지만 김선달은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고, 후대 사람들은 거만한 한양사람들을 골려먹은 지혜로운 장사꾼으로 칭송하고 있으니. 그래서일까요. 현대판 김선달들이 판을 치는 것이요.
 
2.
물을 팔아먹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됐습니다. 골목 슈퍼에서 지하철 자판기에까지 진열돼 있는 생수를 보면 말이지요. 뭐, 이웃나라에는 공기도 깡통에 넣어 판다고 하던데. 몇 백만 년 동안 땅 속에 있던 석유니 석탄이니 하는 광물자원들을 캐내서 자기 거라 파는 거나 물, 공기를 담아 파는 거나 다를 게 하나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기가 막히는 건 일 년 뒤 밀 수확량, 한 달 후 날씨를 가지고도 돈 내기를 하니. 이만하면 주변에 봉이 김선달이 꽤나 많지요.
 
3.
인천시가 탄소 상쇄 공원을 조성한다고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만든다고 하는데요.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과 기부, 그리고 각종 국제회의를 개최할 경우 예산의 일부를 공원 조성 사업비로 확보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국내 모 항공사는 재작년 5월부터 탄소 중립(상쇄)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는데요. 비록 항공사 내 전 임직원 업무 출장 시에만 적용하고 있긴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통해 모은 적립금으로 국내엔 태양광 발전시설 설치비용을 지원하고, 국외엔 어떤 나라에 색동 태양광 가로등 거리를 조성하는 데에 썼다고 합니다.     
 
4.
얼마 전 ‘온실가스배출권거래제도에관한법률’ 제정안이 입법예고 됐습니다. 지정된 할당대상업체가 배출권 할당량을 초과해 온실가스를 배출하게 되면 과징금을 부과합니다. 대신 할당대상업체는 배출권 시장에서 배출권을 살 수 있으며, 여분의 배출권을 팔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그 동안 온실가스 감축 목표 달성을 위해 도입이 논의돼 왔던, 시장을 통한 효율성 도모라는 계획을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얘기입니다. 
 
5.
물, 공기도 팔아먹는 세상에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탄소도 시장에서 팔고 산다면. 별로 놀라지도 않은, 아니 당연한 일인가요. 여기 봉이 김선달도 울고 갈 일이 있습니다. 바로 ‘탄소배출권시장’입니다. 책을 쓴 이(케빈 스미스: TNI Transnational Institute가 진행하는 카본트레이드워치 Carbon Trade Watch 프로젝트 연구원이자 활동가)가 봉이 김선달을 알 리 없었겠지만. 중세 후기 가톨릭교회가 ‘사람들이 지은 죄를 이윤 창출 수단으로 삼으려고 시장주의적 접근을 하는 모습’(p.14)을 빗대 탄소 상쇄 제도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 걸 읽고 있으면. 아차차, 이 정도면 이거 봉이가 어느새 저쪽에서 성직자 행세를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하기야 김선달이나 교회나 모두 이재(理財)에 밝다는 점에선 똑같으니 옷차림새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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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피트가 심은 나무는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있을까.”
 
인천시가 추진하는 탄소 상쇄 공원과 강원도가 고성군에 조성한 탄소배출권 조림사업은.
 
그렇다면 국내 모 항공사의 탄소 중립(상쇄) 프로그램은 기후 변화를 늦추는데 얼마나 기여를 할까.
 
혹시 입법예고 된 ‘온실가스배출권거래제도에관한법률’가 답이 될 수는 없을까.    
 
이매진에서 올 4월에 펴낸 <공기를 팝니다>. 그리 두껍지도 않고 또 쉽게 쓰여 있어 맘만 먹음 하루, 아니 반나절이면 충분하니. 이 모든 궁금증을 해결하는 데는 안성맞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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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4 00:45 2011/01/24 00:45
사용자 삽입 이미지1.
17세기 자크 갈로로부터 고야, 도미에, 콜비츠, 루오, 리베라, 피카소, 샤갈을 거쳐 20세기 달리, 마그네트, 뷔페, 에로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반전그림들을 작가별로 두루 살펴보고 있는 <총칼을 거두고 평화를 그려라: 반전과 평화의 미술>이라는 책의 책장을 넘기고 있자면. 참 오랜만에 눈이 호강을 합니다.
 
물론 소개된 그림들이 하나의 주제, ‘반전과 평화’여서 보기에는 다소 암울하고 칙칙한, 어둡고 절망적일 수 있겠지만. 또 미술관이나  화집에서는 대게 구경하기 어려운 색체와 구도로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말이지요. ‘언제나 잠들지 않는 정신으로 전쟁이라는 지옥의 심연을 표현하고 평화를 갈구(p.278)’한 화가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진실한 민중예술, 참된 민주예술’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2.
클래식이라고 얘기하는, 모차르트나 바하, 비발디, 브람스와 같은 이들이 만든 음악은 여전히 우아함, 품격, 귀족 등과 연결돼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됩니다. 더불어 인상주의니 야수파니, 입체파, 표현주의와 같이, 고갱, 피카소, 클림튼, 마네, 르느와르가 그린 그림들 역시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진 미술관에나 가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미술관, 오페라하우스는 결코 노동자들이 사는 곳, 민중들이 가까이 할 수 있는 곳과 가까이 있지 않은 것과 같지요.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부르디외가 <재생산 (La)Reprouduction : elements pour une theorie du systeme d'enseignemen>이란 책에서 문화자본으로 개념화한 것은 일상생활에서의 ‘구별짓기’를 사회학적 개념으로 탁월하게 분석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뭐, 중언부언하자면 많은 시간과 함께 거금의 돈이 있어야만 누릴 수 있는 이런 류(類)의 예술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나누는 경계선 상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 거란 얘깁니다.  
 
3.
책을 낸 이가 전에 썼던 글들에서 심심치 않게 풍겼던, ‘일반 독자들에게 친숙한 서양화가를 중심으로(p.8)’란 말에서 그 냄새의 정체가 의심되는 계몽주의 혹은 ‘세계미술사에서 이미 그 작품의 예술성이 충분히 인정된 화가들의 작품만 엄선(p.8)’했다는 말 속에 숨은 또 다른 서구중심주의, 그도 저도 아니면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친절하지 못한 개념들에 대한 나열들에 자칫 지적유희에 빠지게 될 위험을 갖고 있어 조금은 거북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약점들이 있다고 해도 박홍규 교수가 하고자 하는 말들이, ‘아무리 전쟁이 정당하더라도 그것은 부당한 평화보다 못하다(p.278)’라는 외침은 묻히지 않습니다. 아니 지금과 같이 여기저기서 ‘전쟁불사’를 외치는 때엔 되레 그 울림이 더 크게 퍼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두고두고 읽어볼만한, 두고두고 감상할만한 책이지요. 더군다나 피카소, 고야, 샤갈, 달리와 같이 주류 미술계에서도 거장으로 추앙받는 이들이 그린, 그러나 결코 주목받지 못하거나 외면당하고 있는 그림들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데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눈을 뜨게 하니. 부족함이 없습니다.   
 
4.
책에서 볼 수 있는 그림들 가운데 멕시코 혁명을 벽화로 작업한 이들의 작품이야 말로 켜켜이 마음에 남는 그림들입니다. 아니요. 꼭 한 번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건 아마도
 
“우리는 일하는 사람들과 무관하고, 그림을 보려고 일부러 찾아올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미술을 거부한다. 민중이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볼 수 없다면 전시회를 도로에서 열자. 작업장에서 술집에서 열자. 거리의 벽에 그림을 그리자. 노동조합의 벽에 그림을 그리자. 일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그림을 그리자.” (p.205. 리베라, 오로스코, 시케이로스: 멕시코혁명과 반전화가)
 
는 목소리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뭔가 부족하단 느낌이 드는데요. 그건 아마도.
 
예술이 예술가에 의해서만, 일하는 사람들은 그저 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으로만 남는 다는 것 때문일까요. 일하는 사람들이 쓴 글, 그림, 음악들이 미술관에 오페라하우스에 책에 담겨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그럴 때야만 오롯한 반전평화의 예술이 완성되는 것 아닌가 싶은데..... 맞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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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6 22:02 2010/12/06 2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