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숨이 턱 막히더군요. 원체 수학을 싫어해 문과를 선택했던 터라. 그래도 전공이 경제학이니 수학이 전혀 없진 않겠지, 생각했는데. 1학년 첫 전공과목 수업부터 수요, 공급 곡선을 미적분으로 그려내더니. 2학년이 되자 과목 자체가 아예 경제수학에 경제통계더군요. 게다가 전공 교수들은 부전공으로 계량경제니 경제통계 같은 것들을 해놔서인지. 아, 정말 숨이 턱턱 막히더라구요. 평생 안 보고 넘어갈 줄 알았던 정석 2-2를 펼쳐놓고 확률, 통계에 4×4 행렬까지 하려니.
 
하지만 그것까진 어느 정도 참을만했습니다. 안 되는 머리지만 어찌어찌 수학공부(?)는 따라 갈만 했는데. 헌데 그 전공 교수들 말입니다. 나중에 들어온 한 사람 빼곤 모조리 미국물을 먹어서인가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끽해야 케인즈학파 언저리 정도가 한 명, 나머진 죄다 고전경제학들을 전공 했더군요. 이러니 교과과정은 싹 다 주류경제학으로만 채워졌고, 언감생심 정치경제학 혹은 맑스주의 경제학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나마 기대했던 한 과목, 경제사마저 그 나중에 들어온. 식민지근대화론을 얘기하는 사람이 강의를 차지하고 들어왔으니. 컥.
 
그러던 어느 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2학년 1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지요. 몇 명의 선배들과 동기들이 강의실에 모였더랬습니다. 돌이켜보면 거창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창립취지문도 대자보로 여기저기 붙이고, 회원도 미리 받고 했으니 조촐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열 댓 명이 모여 소위 주류경제학이 판치는 학과 분위기를 쇄신하고 대안 경제학을 학과에, 학내에 보급하자며, ‘정치경제학연구학회’ 발족식을 했습니다. 아름아름 맑스주의를 공부하던 선배들이 몇 있긴 했지만 이끌어주는 교수 한 명 없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비주류경제학을 공부해보자며 나선 것이었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2. 
숨이 턱 막히더군요. 두꺼운 책 두께도 그렇거니와. 한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그 많은 ‘사건’들-하지만 이도 웬만한 역사학자가 아니구서야 어찌 다 알 수 있을까요-에 대한 깊고 풍부한 이해. 그리고 그것에 바탕을 둔 저자만의 독특한 시각-물론 이 때문에 단숨에 책을 읽어 내려가기가 쉽진 않지만-에 책장을 넘길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더라구요.
 
하지만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혁명’에 관한 새로운 발견, 비주류에서도 다시 비주류적 해석으로 나아가는 사고의 전환, ‘자유의지’로 뭉친 민중에 대한 믿음을 올곧게 느낄 수 있는데 이르러서는. 기억으론 다 담나내기 조차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다시 천천히 음미해야겠다는 생각이 슬쩍 고개를 내밉니다. 한마디로 두 번, 세 번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이지요.
 
3.
첫 1년은 처참했습니다. 그나마 있었던 선배들은 졸업 학년이 되면서 활동 폭이 좁아졌고,  회원은 절반 이상 떨어져나갔습니다. 그리고 후배들은 통 학회에 관심을 두질 않았지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처음 학회를 제안했던 선배들 가운데 그래도 끝까지 해보자며 두 명의 선배가 나섰습니다. 그리고 동기들 가운데 광주에서 올라온 늦깎이 형을 중심으로 학생회 일을 맡고 있던 몇 명이 의기투합했습니다. 그리고 곧 주 1회 세미나와 월 1회 토론회를 시작했습니다. 요란하게 말잔치만 하지 말고 내실을 기하자는 의미였지요.
 
그 해 여름, 후배들과 함께 지리산엘 올랐습니다. 천왕봉 아래 장터목산장에 두 동의 텐트를 치고는 대접에 소주를 가득 부어 마시며 학회 정회원 승격식도 하고. 다음 날은 광주 망월동에도 갔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지리산도 그렇고, 망월동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차편도 변변치 않아 꽤나 긴 길을 걸어야 했지만. 지리산 자락을 걷는 동안에도 묘역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내내 모두들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천왕봉에 올라 굽이굽이 피어린 산자락들을 굽어보며. 또 구묘역에 늘어선 묘비 하나, 하나, 한 글자, 한 글자 가슴에 새기는 내내. 눈물을 흘리지 않은 회원들은 한 명도 없었더랬습니다.
 
하지만, 그 눈물들은 그리 오래 흐리지 않았습니다. 계엄군에 갇힌 광주의 민중들은 죽음을 앞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도. 기어이 ‘자율공동체’를 만들어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래 이내 눈물은 환희와 용솟음, ‘격정’으로 바뀌었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지리산 산행과 광주 망월동 묘역 참배는 ‘정경연’ 정회원이 되는 통과의례가 됐지요. 물론 15년도 넘게 지난 지금도 후배들은 여전히 지리산엘 또 광주엘 가고 있구요. 아픈 역사 속에서 건져낸 ‘격정’이 여전히 주류경제학만을 유일경제학으로 치부하는 학풍 속에서도 꿋꿋이 학회를 이끌어 오고 있는 힘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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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6 01:14 2010/11/26 01:14

사용자 삽입 이미지지금도 모임이 이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혹 춘천으로 이사를 한 후로 혼자만 빠지게 된 건 아닌지도 모르겠네요). 한때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은 만나던 대학 동기들이 있습니다. 학교를 다닐 때도 그랬지만 졸업 후에도 그렇게 얼굴을 보던 친구들이 있었던 게지요. 한 번 모이면 겨우 두 자리 숫자를 채우기가 어려웠으니. 많아야 여섯, 일곱쯤 될까요.  그래도 서로 서로 연락들을 했고, 만나서는 삼겹살에 소주도 걸치고, 밤늦도록 PC방에서 게임도 했었습니다. 또 지난 흔적들을 떠올리며 함박웃음을 짓기도 하고, 하나, 둘 늘어가는 자식 자랑에 말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엊그제 누가 또 홈런을 쳤네, 주인공 누가 죽었네 하며 시답잖은 얘기들도 간혹 하곤 했지요. 그리고 툭하면 하는 푸념들, 자고 일어나면 뛰는 집 값 얘기, 얼마 전 새로 산 자동차 자랑,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사고팔고 하는 주식 소식들을 듣기만 했지,

 

‘노동자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 100일 넘게 고독과 싸우며 농성하고, 10년이나 묵은 해고 때문에 노동자들이 굴뚝에 올라가 목숨을 건 농성을 두 달이나 하다가 그 굴뚝에서 새해를 맞아야 하는 일’(“노사가 동등하다고?” p.34)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악세사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장애인이 서울시장 앞으로 “서울 시내 거리의 턱을 없애주십시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함부로 충고할지 말지어다” p.42)

 

과 같은 얘기들은 통 화제(話題)가 되질 못했습니다. 명색이 노동조합에서 활동을 한다고 하는 놈이 있으면 무얼 하겠습니까. 뭐, 변명 아닌 변명이겠지만. 지금도 그렇고 그때는 더 그랬지만. 어디서고 들려오는 소리들이란 게. ‘집단이기주의’니 ‘노동귀족’이니 하는, 가진 자들과 족벌 언론사가 죽이자, 덤벼들고 만들어낸 되도 않는 비난들뿐이었으니까(다들 알만한 대기업에 다녔던 것 때문일까요. 이마저도 술안주로 올라오지 못했네요). 선뜻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그리고 또 내로라하는 기업에, 중앙정부 공무원들을 하고 있어서 인지. 노동조합 조합원인 친구들이 한 명도 없었라구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함께 공부했을 땐 파이를 들기도 했고. 지랄탄이 날라드는 종로 한복판을 함께 휘젓고 다니고 했던, 그 동기들과도 제대로 이야기 한 번 하지 못했으니. 쥐구멍이라도 찾아야겠지요. 헌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한 번은 얘기한 적이 있었으니. 그것마저 연봉 1억원이 넘는 조종사들이 파업을 한다고(“조종사파업, 당신은 지지했습니까”, “맞아 죽을 각오로 하는 ‘친조종사파업’ 선언” pp.87-98) 침 튀기며 목소리를 높이던 것이었으니(물론 굉장히 수세적으로, 또 혼자서 맞받아치느라 힘이 들었지만). 가만이나 있을 걸. 괜스레 말을 꺼냈나 싶었습니다.

 

이제 곧 연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곧 하루에도 몇 개씩 핸드폰 문자들이 오겠지요. 대게는 집단문자라고 하나요. 딱 틀에 맞춰진 안부인사와 덕담들이기에. 한 번 쓱 보고는 곧 삭제하기만 했는데. 그래요. 그런 문자들, 울 동기들도 매년 그렇듯이 또 보내겠지요. 하지만 올 해엔 또 왔네, 하고 흘겨 보내지 말고 답 문자 하나씩은 보내야겠습니다. 아니 이번엔 먼저 문자를 보내는 것도 좋겠지요. ‘다들 잘 살고 있는가, 언제 한 번 얼굴이나 보고 사는 얘기 하세, 라구요. 그리고 올 해가 가기 전에, 바쁘더라도 책 한권씩은 읽어보자, 해야겠습니다.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과 같은 책들을 얘기하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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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4 22:44 2010/11/04 22:44

사용자 삽입 이미지1.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누이, 우리 엄마들이 가졌던 ‘소박한 꿈’들이 있었습니다. 
 
“나뿐이 아니라 내가 지금 이런 식으로 물러나면 나 같은 사람이 계속 생길 거 아니냐? 내가 다른 데 가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또 피할거냐? ......(중략)...... 내가 마지못해 끌려갔다면 모르겠지만 나름 열심히 했는데 중간에 포기해 버리면 그게 계속 남아 있을 거야. 그래서 결론을 빨리 봤으면 좋겠고.” (pp.71-72 월드컵분회 조합원 서은주) 
 
“2008년부터 100-299인 사업장도 비정규직법이 적용될 텐데. 그러면 언제든 다른 데서도 우리처럼 할 것이고, 대량 해고하겠죠. 그런 사태를 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현실에 눈을 떴으면 좋겠어요.” (p.95 월드컵분회 조합원 장은미) 
 
“없어야죠, 그런 건 무조건 없어야 돼요. 원래 비정규직이 없었던 것처럼, 파업이 없어도 되는, 이런 갈등 자체가 없어야 해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비정규직이네 뭐네, 이런 거 알고서 했나요. 아니잖아요. 아무도 몰랐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말이 생겨난 거잖아요. 이런 식으로 절망적인 단어가 새로 나타나지 않았으면 해요. 갈등을 부르는 단어가 안 나오길 바랄 뿐이죠, 그냥.” (p.141 월드컵분회 조합원 김남희)
 
“같이 하라는 얘기는 감히 안 해요. 저도 옛날에 그랬어요. 차도를 막고 여러 사람한테 불편을 끼치고 투쟁을 하는 게 불편하고 짜증도 나겠지만. 저 사람들이 왜 저럴까. 저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오죽하면 저럴까 한 번쯤은 생각해 주면 좋겠어요. 그 정도, 우리 입장이 되어 달라고는 절대 안 해요.” (p.215 월드컵분회 조합원 이경옥)
 
2.
‘소박한 꿈’이라고는 했는데, 참 많이 부끄럽네요. 그이들이 가졌던 이 ‘소박한 꿈’을 그이들 말마따나 제대로 ‘응원’ 한번 해봤는지. 지침으로 내려오는 집회 일정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고. ‘불매운동’에 동참한다고 한동안은 ‘2001 아울렛’에 드나들지 않았다고. 그게 ‘응원’이나 됐을까요.
 
“여기 김경옥 부위원장님이 자주 오셨는데, 우리가 30분 더 쉬게 된 것도 거기서 투쟁해서 얻어 낸 거라고 얘기하셨죠. 추석이랑 설 때 회사에서 상품권을 줬는데 정규직은 7만원, 우리는 5만원 이었어요. 매출이 좀 올랐을 때도 직원과 파트를 구별해서 줬어요. 그런 데서 상당히 기분 나빠요. 똑같이 일하는데 차별대우 하니까요. 상품권도 나중에는 똑같이 10만 원씩 줬는데, 그것도 투쟁해서 따 냈다고 하시더라고요.” (pp.109-110 00분회 조합원, 가명 이선화)
 
“솔직히 처음에는 조합에 관심도 없었어요.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 내 위치가 흔들리니까 ……. 곧 사람이 잘린다더라, 구조조정이 된다더라, 뭐 이래저래 말이 많았어요.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래도 노동조합에 가입하면 그나마 회사가 함부로 하지는 않겠구나 생각한 거예요.” (p.133 월드컵분회 조합원 김남희)
 
“같이 일하던 직원 중에 5년 된 파트타임들이 진급이 안 되는 거예요. 같이 들어온 다른 비슷한 사람들은 진급이 되는데. 인사과장도 진급시켜 준다는 얘기는 했는데 계속 뺀질뺀질대면서 안 해주는 거야. 부장이 입장을 고수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노동조합을 만나본 거지. 같이 있던 과장이 한 명 있었는데, ‘단순히 부장이나 과장이 건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노동조합을 통해서 하자’고 했어요.” (p.144 이랜드노조 총무부장 손명섭)
 
“고객센터 직원들은 집에서 쉬고 있을 때도 회사에서 나오라고 하면 나와야 해요. 손님이 그 아가씨 나오라고 그래! 그러면 회사에서 전화 하는 거예요. 전화를 안 받고 싶은데 다음날 가면 더 힘들어지니까 할 수 없이 받는대요.” (p.33 월드컵분회 조합원 조희숙)
 
“저는 11년 동안 근무했는데 어려움이 항상 있었죠. 장시간 근로도 그 중 하나고요. 7시에 출근해서 저녁 7시 이전에는 퇴근해 본 적이 없어요. 거의 10년 가까이 그렇게 일했어요. 초과근무 수당이 없는 건 당연한 거고요. 그것도 그나마 이랜드로 넘어오기 전 이야기고, 이랜드로 넘어오고 나서는 7시에도 퇴근을 못했어요. 보통 10시, 늦게 가는 사람은 12시까지 있어요.” (pp.110-111 병점분회 조합원 서형태)
 
“근데 정말 재미있는 일은 노조에 가입하고 한 달 인가부터는 두 시간 일하고 15분 쉬고 한 시간 밥 먹고 두 시간 일하고 15분 쉬고 이게 된 거예요. 야, 노조 가입하니까 이렇게 되는구나, 그걸 몰랐던 거예요. 미련하게 일만 했어요.” (p.23 월드컵분회 조합원 조희숙) 
 
3.
얼굴을 들고 있기가 민망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런 말들을 했다지요. 그이들은 너무도 큰 꿈을 꾸었기에, 아직은 이룰 수 없는 꿈을 가졌기에, ‘사탄’이었다고. 정말 그럴까요. 
 
“지금은 우리가 너무나 힘들고 괴롭지만 참고 이겨 낸다면 너희들은 노동자가 되어도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지 않겠니? 엄마가 너희들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자본가와 어깨를 나란히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구나.”(p.295)
 
“그러니까 위원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저희 아내 모르게 비자금 숨겨 놓은 거 있는 데 1,000만 원입니다. 그거까지 털겠습니다. 그러면 열 명은 살릴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저도 어렵거든요. 근데 그 얘기를 들으니까, 나는 한 명은 살릴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파업하고 있으니까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은 안 되고. 내 주위에서 끌어 모아서 어떻게 100만 원은 될 수 있을 거 같은 거예요. 한 사람은 구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고요. 그럼 열 달 동안 갚으라고. 결의가 생기더라니까요.” (pp.87-88 월드컵분회 조합원 윤수미)
 
“우리는 우리의 미래뿐만 아니라 노동자 모두의 미래에 대한 조그만 희망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사람이 기계 부품으로 전락하지 않는 세상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청컨대, 당신이 다루는 모든 서류 안에는 이러한 사람들과 세상과 신념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잊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싸웁니다. 당신이 잊고 있기 때문에.”(p.303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조합원 편지글>)
 
4.
그새 3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동안 또 다른 싸움을 ‘응원’하느라 그랬을까요. 아님 또 다른 ‘소박한 꿈’들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싸우느라 그랬을까요. 한 달에 80만원, 일 년 960만원 받는 일자리, 그것을 위해 싸웠던 그이들의 속내를 이제와 헤아려보려니. 참 무심하게도 살았구나, 또 살고 있구나, 아니 애써 외면하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만 자꾸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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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5 12:44 2010/10/15 12:44

1.

파놉티콘이 죄수로 하여금 스스로 규율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들고, 점차 규율을 ‘내면화’해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것(pp.22-23)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무슨 의미를 갖게 될 것인지를 스스로가 검열을 하게끔 만드는. ‘국가보안법’은 어떤가요. 
 
또 파놉티곤이 푸코(Michel Foucault)가 지적하듯 아무렇게나 선택된 누구라도 이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음으로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 가는 중요하지 않는 것(p.24)이라면.
 
일제가 조선 식민지 사상 통제와 해방투쟁을 탄압하는데 사용했던 ‘치안유지법’에 그 뿌리를 둔. 1948년 해방 정국에서 자유로운 민중들의 욕구를 억누르는 수단으로 부활해. 김대중이었든 노무현이었든. 지난 60여 년 간 사상의 자유를 사장시킨 ‘국가보안법’ 말입니다. 
 
2. 
파놉티콘이 죄수를 교화하기 위해 설계되었지만 동시에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도, 학생을 가두는 데에도 그리고 거지와 게으름뱅이를 일하도록 시키는 곳에도 적용(p.24)될 수 있다면. 아니 실제 이러한 기관들이 감옥과 매우 닮아 푸코가 말하는 ‘세상의 파놉티콘화’라면.
 
혹 이 글이 누구로부터 고소를 당하지나 않을까. 플래카드에 써 넣은 저 문구 때문에 월급 통장과 집에 딱지가 붙지는 않을는지. 끊임없이 주저하게 만들고, 멈칫멈칫하게 만드는. ‘가압류’와 ‘명예훼손’은 어떤가요. 
 
또 파놉티콘이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벤담에게 말한 것처럼 거미줄을 쳐놓고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가 있다면.
 
정부 정책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한 비판이나 문제제기. 해소되지 않는 의문점들을 끄적거릴라 쳐도. 아주 돈이 많거나, 속된 말로 ‘빽’이 있나, 되돌아보게 만드는. ‘가압류’와 ‘명예훼손’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3.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전공한 저자가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벤담의 감옥 개념에 처음 접한 건 힘멜파브와 미셀푸코가 쓴 두 글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두 글은 <파놉티콘-정보사회 정보감옥>에 자세히 소개돼 있구요. 그러다 90년대 말 빠른 속도로 확장돼 가고 있던 사이버스페이스에서 경험한 전자 감시, 데이터 감시로부터 정보 파놉티콘, 전자 파놉티콘이라는 개념에 접하게 됐답니다. 그리고는 “벤담이 설계한 파놉티콘에 구현된 감시의 매커니즘과 이에 대한 푸코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전자 감시와 프라이버시 침해, 그리고 감시의 역학관계를 뒤집는 역감시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하는데요.  
 
4.
벤담은 끝내 자기가 구상했던 판옵티콘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벤담이 살아온다면 무척이나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몹시도 흐뭇해할 겁니다. 
 
그 자신은 물리적인 상상 속에서만 파놉티콘을 그려냈지만. 후대 권력자들은 이를 시공간에서 뛰어넘어 만들어내고 있으니 말이지요. 손에 잡히지도 않는 원형감옥을 말입니다. 그러니, 이정도면 놀라거나 흐뭇해하는 걸 너머 혀를 내두르지나 않을까요. 
 
헌데 어찌된 것인지. CCTV니 전자주민증이니 전자여권, 말들도 많지만. 또 인터넷 실명제에 휴대폰 감청 같은 것들도 문제이겠건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난데없이 ‘국가보안법’과 ‘가압류’, ‘명예훼손’이 떠오른 건 왜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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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6 19:26 2010/10/06 19:26
2MB이 모 일간지의 특집기사에 꽤나 힘을 얻었나봅니다.
반성해야 할 사람이 되레 큰 소리를 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모 일간지야 워낙에 악의적인 왜곡과 편집으로 정평이 난 곳이라 이번 건도 그러려니 싶었는데.
역시나 소설에 가까운 짜집기와 자의적인 해석, 치졸한 인터뷰 방식까지.
 
베트남 속 수많은 ‘노근리’를 발로 찾아 세심히 기록한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이란 책 머리말에는 소설가 김남일씨가 이런 말을 썼습니다.
 
"기억은, 한 개인의 삶에만 파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민족이나 국가의 도덕적 성숙을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글쓴이는 자유의 십자군’이라는 미명아래 남의 땅, 남의 하늘에서 자행했던 잔인한 학살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 그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해 ‘기억’ 운운하는 것에서부터 벌써 불쾌함을 느끼고 있는 건.
그러면서도 위안부 할머니들의 외침에 귀를 막고 있는 일본 정부에 분노하고, ‘노근리’의 비극을 슬퍼하는 건. 단지 위선일 뿐이라고 얘기합니다. 
 
신문이야 그렇다 쳐도.
이거 2MB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요.
“역사에 남겨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기가 막혔습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도덕 재무장의 관점에서 국민운동이 필요하다.”고까지 떠들고 있으니.
이쯤 되면.
찌라시 신문과 2MB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사뭇 자명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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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3 22:29 2010/05/13 2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