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놉티콘이 죄수로 하여금 스스로 규율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들고, 점차 규율을 ‘내면화’해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것(pp.22-23)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무슨 의미를 갖게 될 것인지를 스스로가 검열을 하게끔 만드는. ‘국가보안법’은 어떤가요. 
 
또 파놉티곤이 푸코(Michel Foucault)가 지적하듯 아무렇게나 선택된 누구라도 이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음으로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 가는 중요하지 않는 것(p.24)이라면.
 
일제가 조선 식민지 사상 통제와 해방투쟁을 탄압하는데 사용했던 ‘치안유지법’에 그 뿌리를 둔. 1948년 해방 정국에서 자유로운 민중들의 욕구를 억누르는 수단으로 부활해. 김대중이었든 노무현이었든. 지난 60여 년 간 사상의 자유를 사장시킨 ‘국가보안법’ 말입니다. 
 
2. 
파놉티콘이 죄수를 교화하기 위해 설계되었지만 동시에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도, 학생을 가두는 데에도 그리고 거지와 게으름뱅이를 일하도록 시키는 곳에도 적용(p.24)될 수 있다면. 아니 실제 이러한 기관들이 감옥과 매우 닮아 푸코가 말하는 ‘세상의 파놉티콘화’라면.
 
혹 이 글이 누구로부터 고소를 당하지나 않을까. 플래카드에 써 넣은 저 문구 때문에 월급 통장과 집에 딱지가 붙지는 않을는지. 끊임없이 주저하게 만들고, 멈칫멈칫하게 만드는. ‘가압류’와 ‘명예훼손’은 어떤가요. 
 
또 파놉티콘이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벤담에게 말한 것처럼 거미줄을 쳐놓고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가 있다면.
 
정부 정책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한 비판이나 문제제기. 해소되지 않는 의문점들을 끄적거릴라 쳐도. 아주 돈이 많거나, 속된 말로 ‘빽’이 있나, 되돌아보게 만드는. ‘가압류’와 ‘명예훼손’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3.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전공한 저자가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벤담의 감옥 개념에 처음 접한 건 힘멜파브와 미셀푸코가 쓴 두 글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두 글은 <파놉티콘-정보사회 정보감옥>에 자세히 소개돼 있구요. 그러다 90년대 말 빠른 속도로 확장돼 가고 있던 사이버스페이스에서 경험한 전자 감시, 데이터 감시로부터 정보 파놉티콘, 전자 파놉티콘이라는 개념에 접하게 됐답니다. 그리고는 “벤담이 설계한 파놉티콘에 구현된 감시의 매커니즘과 이에 대한 푸코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전자 감시와 프라이버시 침해, 그리고 감시의 역학관계를 뒤집는 역감시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하는데요.  
 
4.
벤담은 끝내 자기가 구상했던 판옵티콘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벤담이 살아온다면 무척이나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몹시도 흐뭇해할 겁니다. 
 
그 자신은 물리적인 상상 속에서만 파놉티콘을 그려냈지만. 후대 권력자들은 이를 시공간에서 뛰어넘어 만들어내고 있으니 말이지요. 손에 잡히지도 않는 원형감옥을 말입니다. 그러니, 이정도면 놀라거나 흐뭇해하는 걸 너머 혀를 내두르지나 않을까요. 
 
헌데 어찌된 것인지. CCTV니 전자주민증이니 전자여권, 말들도 많지만. 또 인터넷 실명제에 휴대폰 감청 같은 것들도 문제이겠건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난데없이 ‘국가보안법’과 ‘가압류’, ‘명예훼손’이 떠오른 건 왜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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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6 19:26 2010/10/06 1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