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지금도 모임이 이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혹 춘천으로 이사를 한 후로 혼자만 빠지게 된 건 아닌지도 모르겠네요). 한때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은 만나던 대학 동기들이 있습니다. 학교를 다닐 때도 그랬지만 졸업 후에도 그렇게 얼굴을 보던 친구들이 있었던 게지요. 한 번 모이면 겨우 두 자리 숫자를 채우기가 어려웠으니. 많아야 여섯, 일곱쯤 될까요.  그래도 서로 서로 연락들을 했고, 만나서는 삼겹살에 소주도 걸치고, 밤늦도록 PC방에서 게임도 했었습니다. 또 지난 흔적들을 떠올리며 함박웃음을 짓기도 하고, 하나, 둘 늘어가는 자식 자랑에 말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엊그제 누가 또 홈런을 쳤네, 주인공 누가 죽었네 하며 시답잖은 얘기들도 간혹 하곤 했지요. 그리고 툭하면 하는 푸념들, 자고 일어나면 뛰는 집 값 얘기, 얼마 전 새로 산 자동차 자랑,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사고팔고 하는 주식 소식들을 듣기만 했지,

 

‘노동자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 100일 넘게 고독과 싸우며 농성하고, 10년이나 묵은 해고 때문에 노동자들이 굴뚝에 올라가 목숨을 건 농성을 두 달이나 하다가 그 굴뚝에서 새해를 맞아야 하는 일’(“노사가 동등하다고?” p.34)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악세사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장애인이 서울시장 앞으로 “서울 시내 거리의 턱을 없애주십시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함부로 충고할지 말지어다” p.42)

 

과 같은 얘기들은 통 화제(話題)가 되질 못했습니다. 명색이 노동조합에서 활동을 한다고 하는 놈이 있으면 무얼 하겠습니까. 뭐, 변명 아닌 변명이겠지만. 지금도 그렇고 그때는 더 그랬지만. 어디서고 들려오는 소리들이란 게. ‘집단이기주의’니 ‘노동귀족’이니 하는, 가진 자들과 족벌 언론사가 죽이자, 덤벼들고 만들어낸 되도 않는 비난들뿐이었으니까(다들 알만한 대기업에 다녔던 것 때문일까요. 이마저도 술안주로 올라오지 못했네요). 선뜻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그리고 또 내로라하는 기업에, 중앙정부 공무원들을 하고 있어서 인지. 노동조합 조합원인 친구들이 한 명도 없었라구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함께 공부했을 땐 파이를 들기도 했고. 지랄탄이 날라드는 종로 한복판을 함께 휘젓고 다니고 했던, 그 동기들과도 제대로 이야기 한 번 하지 못했으니. 쥐구멍이라도 찾아야겠지요. 헌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한 번은 얘기한 적이 있었으니. 그것마저 연봉 1억원이 넘는 조종사들이 파업을 한다고(“조종사파업, 당신은 지지했습니까”, “맞아 죽을 각오로 하는 ‘친조종사파업’ 선언” pp.87-98) 침 튀기며 목소리를 높이던 것이었으니(물론 굉장히 수세적으로, 또 혼자서 맞받아치느라 힘이 들었지만). 가만이나 있을 걸. 괜스레 말을 꺼냈나 싶었습니다.

 

이제 곧 연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곧 하루에도 몇 개씩 핸드폰 문자들이 오겠지요. 대게는 집단문자라고 하나요. 딱 틀에 맞춰진 안부인사와 덕담들이기에. 한 번 쓱 보고는 곧 삭제하기만 했는데. 그래요. 그런 문자들, 울 동기들도 매년 그렇듯이 또 보내겠지요. 하지만 올 해엔 또 왔네, 하고 흘겨 보내지 말고 답 문자 하나씩은 보내야겠습니다. 아니 이번엔 먼저 문자를 보내는 것도 좋겠지요. ‘다들 잘 살고 있는가, 언제 한 번 얼굴이나 보고 사는 얘기 하세, 라구요. 그리고 올 해가 가기 전에, 바쁘더라도 책 한권씩은 읽어보자, 해야겠습니다.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과 같은 책들을 얘기하면서 말이지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11/04 22:44 2010/11/04 22:44
1.
칠레를 얘기할라치면 미제국주의가 만들어 낸 독재자 피노체트, 그리고 그 독재자에 의해 살해된, 선거로 세워진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아엔데 정부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와 같이 쿠테타로 점철된 역사를 갖고 있는 제3세계를 되돌아볼 때면 말이죠. 하지만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는데 앞장섰던 다른 많은 이들에 대한 얘기는 잘 모릅니다. 이 책 <끝나지 않은 노래 Victor: An Unfinished Song by Joan Jara>에 등장하는 이들. 앙헬, 이사벨 파라 부부, 킬라파윤, 인티 이이마니 그룹의 멤버들, 파트리시오 카스티요, 인민연합을 구성하고 있던 이름 없는 수많은 칠레 민중, 그리고 여기 주인공인 빅토르 하라와 그의 노래와 투쟁을 전해주는 조안 하라가 그러합니다.
 
2.
빅토르 하라(Victor Lidio Jara Martinez 1932-1973)는 칠레, 아니 남미의 살아있는 연극 연출가이자, 민요, 민중 가수입니다. 그리고 하라는 그의 노래들의 가사들처럼 늘 칠레 민중, 남미의 억압받고 착취당하나 끝내 희망을 움켜쥐고 전진하는 민중들과 연대했던 문화운동가였습니다. 
 
다시 한 번 그들은 내 조국을
노동자 민중의 피로 더럽히려 하네
입으로는 자유를 말하나
두 손은 죄의 흔적이 새겨진 자들
우리들의 자녀와 그 어머니들을
갈라놓으려 하네
그리스도가 졌던 십자가를
다시 지우려 하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대물림해온
수치를 감추려 하나
살인자의 표지들은
그들의 얼굴에서 지워지지 않네
이미 수천 수만 명이
그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쳐
그 흐르는 피의 강(江)이
빵 덩어리의 숫자를 불려왔건만
 
이제는 나는 살고 싶어라
내 아이와 형제와 더불어
우리 모두가 매일매일
건설하고 있는 새 세상에서
너희들의 위협도 나는 두렵지 않다
비참함의 주인들 너희들이여
희망의 저 별은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것이니
 
민중의 바람이 나를 부르고 있다
민중의 바람이 나를 실어간다
그 바람은 내 가슴을 열어젖히고
내 목을 통과해서 불어간다
그래서 시인의 음성은 들리게 되리라
죽음이 나를 앗아갈 때까지
민중이 가는 그 길을 따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 「민중의 바람」(<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 pp.293-294)
 
또 하라는. 죽음을 앞둔 그에게 기타를 던져주며 노래를 불러보라 조롱하던 그 순간에도 민중의 노래를 끝내 부르고야 말았던 혁명가였습니다.
 
3. 
90년대 초반, 대학에 갓 들어간 어느 날. 도서관 앞에서 벌어졌던 집회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던 선배들의 모습에 전율을 느꼈더랬습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커녕 애국가조차 부르지 않다니. 그리고는 움켜진 주먹을 하늘로 뻗으며 난생 처음 듣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좀 나중에야 알았는데 이걸 ‘민중의례’라 했습니다). 엊그제 입학식 때만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노래도 노래지만 선배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찌나 굳어 있던지요.
 
그 후로 학생회실에서, 대성리로 갔던 첫 MT에서, 지랄탄이 어지럽게 구르던 종로 거리에서. 이제까지 들어왔던, 불러왔던 노래들과는 전혀 다른, ‘민가’로 속칭했던 ‘민중가요’란 걸 ‘대중가요’ 보다 더 많이 듣고, 또 부르게 됐지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임을 위한 행진곡」*
 
4.
MB이 공식 석상에서 공무원노조의 ‘민중의례’에 대해 한마디 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MB의 이 한마디에 곧장 행정안전부는 징계 회부 운운하며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민중의례’가 무에, ‘공무원 품위에 떨어진다’고 그러는지 말입니다. 참말로 궁색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저들은요.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이유를 들어가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못하도록 하는 건요.
 
그래요. MB은 알고 있는 겁니다. 노래의 힘을 말이죠. 그것도 민중의 분노와 의지가 담긴 노래라면 더 그렇다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독재자 피노체트도 칠레의 음악혁명가 빅토르 하라를 그렇게, 다시는 기타를 치지 못하도록 손목을 꺾으면서까지 죽였던 것이구요. MB 역시 공무원 노동자들이 민중의 편에 서는 걸 막아보려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입에 올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에서 따온 것인데요. 1982년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있었던 광주민중항쟁 시민군 대변인 故 윤상원과 故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빛을 봤습니다. 당시 전두환 군부독재의 폭정으로 작곡을 했던 김종률 씨는  수차례 수사기관에 끌려 다니며 고초를 겪었다 하구요. 백기완 선생의 싯구절을 따 작사를 한 소설가 황석영 씨는 광주 운암동 산중턱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비밀리에 카세트레코더를 이용, 녹음할 수 있게 했답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집회는 물론이고 각종 행사와 회의 시작 전, 국민의례를 대신해 불리고 있으며, 민중의 희망을 위해 싸우다 먼저 산화해간 열사들에 대한 묵념과 함께 ‘민중의례’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11/23 10:06 2009/11/23 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