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쿠바에서 혁명이 성공한 후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혁명이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각 나라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을 통해 압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노골적으로 군부 쿠데타를 조장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독점자본과 미국의 후원을 받는 군부가 저지르는 횡포에 맞선 라틴 민중들은 되레 혁명으로 한발, 한발 나아갔습니다. 까닥 잘못하면 목숨도 잃고 나라도 망가질 수 있었는데 말이지요. 이런 분위기로 보자면 칠레 역시 마찬가지 길을 걸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게바라로 상징되는 무장봉기가 아닌 선거로 이룬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말하자면 ‘선거 혁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1970년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살바도르 아옌데는 인민연합 후보로 나서 36.2%의 득표율을 기록합니다. 이어 의회에서 열린 결선투표에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내빈여러분, 여러분은 우리나라의 가난한 모습을 직접 보셨습니다. 칠레 역사의 전환점을 맞아 인민이 운명을 자신의 손에 쥐고 사회주의를 향한 민주주의적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봄을 맞이한 칠레는 온 셰계사람들과 형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선거 혁명’을 이룬 칠레가 겪게 될 고난과 시련은 이미 선거 기간 내내 예고가 됐었습니다. 국유화와 토지재분배 같은 혁명적인 공약과 함께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연대를 천명한 아옌데가 눈엣가시 같았던 미국이 저지른 일들 때문이었지요. 급기야 대통령 취임식을 전후해서는 쿠데타가 공공연히 나돌았습니다. 한편으론 구리 가격 폭락 조장 등을 통한 경제봉쇄를 하면서 말입니다. 
 
마침내 1973년 9월 11일 아침. 칠레 국영라디오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방송을 반복해서 내보냅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하지요. 바로 군의 행동 개시 신호이자 대통령 궁을 향한 폭격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맞서 아옌데 대통령은 끝까지 자리를 사수하겠다는 최후 방송으로 화답합니다.
 
“동포 여러분, 쿠데타군이 라디와 방송을 끊어버릴 수도 었습니다. 제가 여러분 곁을 떠나야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전투기가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총탄 세례를 퍼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나라에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민이 부여한 대로, 제 양심이 시키는 대로 인민의 대통령으로서 존엄함 제 직무를 끝까지 수행해나겠습니다.”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지키라며 준 자동소총을 들고 쿠데타군에 맞서다 사살당하고 맙니다. 선거로 사회주의 혁명을 이뤄낸, 역사상 전후 무후했던 칠레 사회주의 혁명 정부는 그렇게 막을 내립니다.         
 
<칠레, 또 다른 9.11>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은 살바도르 아옌데가 마지막 방송을 통해 칠레 민중이 다시 일어나 혁명을 완수할 것이라는 목소리와 쿠데타  직후 군에 체포돼 처형된 빅토르 하라의 노래, 베트남과 쿠바에서 쫓겨나 칠레를 갉아먹으려는 자들을 심판해야 한다고 외친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함께 실려 있습니다. 또 ‘트랙 2’로 불리는, 미국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군사쿠데타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도 알 수 있으며, 혁명 동지로 무한한 존경과 경의를 표했던 피델 카스트로와 혁명과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베아트리스 아옌데의 연설도 함께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다른 ‘9.11’이 여기에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2001년 미국에서 벌어진 공중 테러뿐만 아니라, 1973년 칠레 대통령 궁에 가해졌던 폭격도 함께 기억하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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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5 13:14 2012/11/05 13:14
1.
칠레를 얘기할라치면 미제국주의가 만들어 낸 독재자 피노체트, 그리고 그 독재자에 의해 살해된, 선거로 세워진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아엔데 정부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와 같이 쿠테타로 점철된 역사를 갖고 있는 제3세계를 되돌아볼 때면 말이죠. 하지만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는데 앞장섰던 다른 많은 이들에 대한 얘기는 잘 모릅니다. 이 책 <끝나지 않은 노래 Victor: An Unfinished Song by Joan Jara>에 등장하는 이들. 앙헬, 이사벨 파라 부부, 킬라파윤, 인티 이이마니 그룹의 멤버들, 파트리시오 카스티요, 인민연합을 구성하고 있던 이름 없는 수많은 칠레 민중, 그리고 여기 주인공인 빅토르 하라와 그의 노래와 투쟁을 전해주는 조안 하라가 그러합니다.
 
2.
빅토르 하라(Victor Lidio Jara Martinez 1932-1973)는 칠레, 아니 남미의 살아있는 연극 연출가이자, 민요, 민중 가수입니다. 그리고 하라는 그의 노래들의 가사들처럼 늘 칠레 민중, 남미의 억압받고 착취당하나 끝내 희망을 움켜쥐고 전진하는 민중들과 연대했던 문화운동가였습니다. 
 
다시 한 번 그들은 내 조국을
노동자 민중의 피로 더럽히려 하네
입으로는 자유를 말하나
두 손은 죄의 흔적이 새겨진 자들
우리들의 자녀와 그 어머니들을
갈라놓으려 하네
그리스도가 졌던 십자가를
다시 지우려 하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대물림해온
수치를 감추려 하나
살인자의 표지들은
그들의 얼굴에서 지워지지 않네
이미 수천 수만 명이
그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쳐
그 흐르는 피의 강(江)이
빵 덩어리의 숫자를 불려왔건만
 
이제는 나는 살고 싶어라
내 아이와 형제와 더불어
우리 모두가 매일매일
건설하고 있는 새 세상에서
너희들의 위협도 나는 두렵지 않다
비참함의 주인들 너희들이여
희망의 저 별은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것이니
 
민중의 바람이 나를 부르고 있다
민중의 바람이 나를 실어간다
그 바람은 내 가슴을 열어젖히고
내 목을 통과해서 불어간다
그래서 시인의 음성은 들리게 되리라
죽음이 나를 앗아갈 때까지
민중이 가는 그 길을 따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 「민중의 바람」(<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 pp.293-294)
 
또 하라는. 죽음을 앞둔 그에게 기타를 던져주며 노래를 불러보라 조롱하던 그 순간에도 민중의 노래를 끝내 부르고야 말았던 혁명가였습니다.
 
3. 
90년대 초반, 대학에 갓 들어간 어느 날. 도서관 앞에서 벌어졌던 집회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던 선배들의 모습에 전율을 느꼈더랬습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커녕 애국가조차 부르지 않다니. 그리고는 움켜진 주먹을 하늘로 뻗으며 난생 처음 듣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좀 나중에야 알았는데 이걸 ‘민중의례’라 했습니다). 엊그제 입학식 때만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노래도 노래지만 선배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찌나 굳어 있던지요.
 
그 후로 학생회실에서, 대성리로 갔던 첫 MT에서, 지랄탄이 어지럽게 구르던 종로 거리에서. 이제까지 들어왔던, 불러왔던 노래들과는 전혀 다른, ‘민가’로 속칭했던 ‘민중가요’란 걸 ‘대중가요’ 보다 더 많이 듣고, 또 부르게 됐지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임을 위한 행진곡」*
 
4.
MB이 공식 석상에서 공무원노조의 ‘민중의례’에 대해 한마디 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MB의 이 한마디에 곧장 행정안전부는 징계 회부 운운하며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민중의례’가 무에, ‘공무원 품위에 떨어진다’고 그러는지 말입니다. 참말로 궁색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저들은요.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이유를 들어가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못하도록 하는 건요.
 
그래요. MB은 알고 있는 겁니다. 노래의 힘을 말이죠. 그것도 민중의 분노와 의지가 담긴 노래라면 더 그렇다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독재자 피노체트도 칠레의 음악혁명가 빅토르 하라를 그렇게, 다시는 기타를 치지 못하도록 손목을 꺾으면서까지 죽였던 것이구요. MB 역시 공무원 노동자들이 민중의 편에 서는 걸 막아보려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입에 올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에서 따온 것인데요. 1982년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있었던 광주민중항쟁 시민군 대변인 故 윤상원과 故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빛을 봤습니다. 당시 전두환 군부독재의 폭정으로 작곡을 했던 김종률 씨는  수차례 수사기관에 끌려 다니며 고초를 겪었다 하구요. 백기완 선생의 싯구절을 따 작사를 한 소설가 황석영 씨는 광주 운암동 산중턱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비밀리에 카세트레코더를 이용, 녹음할 수 있게 했답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집회는 물론이고 각종 행사와 회의 시작 전, 국민의례를 대신해 불리고 있으며, 민중의 희망을 위해 싸우다 먼저 산화해간 열사들에 대한 묵념과 함께 ‘민중의례’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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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3 10:06 2009/11/23 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