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주 오랫동안 여성노동자들은 억압과 착취의 가장 직접적이면서 일차적인 대상으로 존재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경제기적의 시대’라 칭송받을 만한 때였는지 심히 회의감이 드는 1970년대. 그래요. ‘산업역군’이란 허황된 이름아래 노동권은커녕 생존권도 보장받지 못한 생존의 길목에서 그 시대를 올곧이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그이들은 이 절망의 시대에도 희망의 물을 길어 올렸고. 끝내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을 만들어냅니다. 여기 YH노동조합과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여성노동자들이 말이지요. 
 
2.           
 
이어 호소문이 낭독되었다. “이제부터 어머님의 약값은 누가 댈 것이며 동생의 학비는 누가 보탤 것입니까 … ” 이순주 부지부장은 눈물로 목이 메어 끝까지 읽지를 못한 채 오열했다. 이어 김경숙 상집위원(경찰 침임 때 추락하여 사망 함)이 하늘을 찌를 듯한 목소리로 결의문을 읽었으며 박사무장의 성명서 낭독을 끝으로 종결대회를 마쳤다. 눈물범벅이 된 조합원들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동지들의 몸을 부둥켜안고 떨어질 줄 몰랐다. 조합원들의 뜻은 “우리의 직장을 정상화시켜 달라”는 것이었고 “죽음으로 투쟁한다”는 것이었다. , 전YH노동조합/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엮음. p.198.

 
1966년 자금 100만원, 종업원 10명으로 시작한 작은 가발공장은 밀어닥치는 가발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 정책에 힘입어 불과 2년 만에 면목동에 5층 건물을 지어 본공장을 이전하고 1970년에는 국내 최대의 가발업체가 됐습니다. 바로 장용호라는 이름의 영문 이니셜을 따 이름 지은 YH무역 주식회사입니다. 장용호는 당시 수출실적으로 대통령표창, 동탑산업훈장까지 받기도 하는데요. 1970년 진동희를 사장을 앉혀놓고는 미국으로 건너가 용 인터내셔널 상사를 설립, YH 제품을 수입 판매합니다. 국내에서 여성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내 상품을 만들어내면 이를 외상으로 수입해 판매함으로써 이중으로 치부를 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장용호는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겠지만 이로 인해 회사는 급격한 하향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때,
 
YH무역 노동자들은 1974년 5월 24일 서울역 앞 우남빌딩 섬유노조 본조 회의실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합니다. 회사와 유신독재정권의 비인간적인 처사와 노동 착취, 휴 폐업에 맞서기로 한 것이지요. 하지만 YH노동조합의 목숨을 건 투쟁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합니다. 독재정권의 비호아래 막대한 외자를 빼돌리고 문어발식 사업 확장에만 열을 올린 나머지 부채와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져간 것입니다. 그러나 회사와 박정희 정권은 YH노동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며 “노동조합이 강하기 때문에 회사가 망한다”, “노동조합이 있어서 다른 기업에서 인수를 꺼린다”는 악의적인 헛소문을 퍼뜨립니니다. 결국,
 
YH 노동자들은 김경숙 조합원이 공권력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린 신민당사로 향하게 됩니다.
 
3.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무참히 학살을 당하던 1980년 5월 말. 숨 쉬는 것 말곤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던 암흑의 시기. 학살당한 이들을 위해 모금운동이라는 무모한 짓거리를 벌인 이들이 있었습니다. 영등포 대림동에 자리 잡고 있었던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바로 그이들입니다. 당시 1,700여 노동자들은 모금을 시작한 지 이틀 만에 4백 70만원이라는 돈을 모아 천주교 광주교고장 윤공희 대주교에게 전달을 했는데요. 원풍모방 노동조합이 걸어왔던 그 1970년대를 돌이켜보자면 이 무모한 짓거리가 가능했던 건. 그렀습니다. 그만큼 전설적인 노동자들이었지요.
 
원풍모방 노동조합은 비상사태가 선포돼 단체행동이 일절 금지되었던 1972년, 파업농성을 통해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민주노조를 출범시켰습니다. 이후 노조는 회사가 부도위기에 처했던 1974년에는 경영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 권력에 빌붙어 되레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앞장서고 있던 섬유노조 본부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하며 싸움에 나서기도 합니다. 허나.
 
광주를 피로 물들이면서까지 권력에 집착하고 있던 신군부가 ‘노동계 정화조치’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민주노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의 표적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곧 지부장과 부지부장은 수배가 떨어지고 간부들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갑니다. 회사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도산(都産)이 들어오면 도산(倒産)한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퍼뜨리며 조합원들을 흔들어댑니다. 결국 원풍모방 노동자들은 한가위 달이 환하게 비추는 가운데 수백 명의 사복경찰들에게 쫓겨 회사 앞 6차선 도로를 맨발로 내달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새벽 5시경, 드디어 작전은 개시되었다. 수백 명의 폭력배들이 야수처럼 달려들어 끌어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농성장은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사람 살려!” 울부짖는 소리, 뒤를 돌아보니 아, 소름이 끼쳤다. 눈이 뒤집혀 있는 폭력배들, 그들의 모습은 인간이 아니었다. 조합원들은 온 힘을 다해 악착같이 버티었다. 끌려가면 안 된다. 다시는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 결코 끌려가면 안 된다. (중략) 때 아닌 추석날 새벽 대림동 바닥은 비명과 통곡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쫓겨 달리는 대림동 육교 위에 펄럭이는 ‘선진조국창조’라는 플래카드는 딴 나라 얘기인가? 난리도 그런 난리는 없었다. 구경꾼마저도 없는 조상대대로의 명절날 새벽에 차도 한가운데에서 광분한 늑대에게 쫓기는 양떼마냥 조합원들은 맨발로 달리다 새벽예배를 보기 위해 훤하게 불이 켜진 예배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민주노조 10년: 원풍모방 노동조합 활동과 투쟁>, 원풍모방 해고노동자 복직투쟁위원회 엮음. pp.302-303.
 
4. 
올해도 지하철 청소용역 여성노동자들은 시간당 4,110원인 최저임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길거리에서 몇 날을 새울 겁니다. 하긴 노조를 만들기 전엔 화장실에서 숨어 똥 누는 소리를 들으며 밥을 먹어야했던 여성노조 인천지부 인하대분회 여성조합원들을 생각해보면 길거리에서 일 년을, 십 년을 더 싸워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수세력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고 나선 2010년의 풍경들. 이 땅에 여성노동자들은 경제성장의 기적을 얼마나 더 만들어내야 하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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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7 13:58 2010/04/07 1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