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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12

(§12) 지야 <네 잣대와 내 잣대는 틀리다>라고 하고, 아니 법리와 같이 눈부신 논증을 가지고 위와 같은 분절과 그 전제를 논할 수야 있겠지만 그러나 [1]  우리의 대상이 되는 지의 본질은 우리가 이런 분절논리에 걸리지 않게 한다. 조금만 더 파헤쳐보면 의식은 자신과 씨름 하는 가운데 매번 필요한 잣대들을 스스로 마련한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2]. 그렇기 때문에 이 조사는 의식이 자기자신을 자기와 비교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진리와 지간의 구별은 의식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의식 내부를 살펴보면 한편으로 뭔가가 타자에 대해서 있음으로써 어떤 형식이든지 의식 그 자체가 지로 향하는 규정성을[3] 지니게 되며, 동시에 이 타자가 의식에 대하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관계 밖에서도 존재하는 것으로, 즉 불변하는 즉자적인 것으로[4] 의식에 나타나기 때문에 의식은 진리로 뻗어가는 방향성이[5] 있다. 그래서 의식이 자기 내부에 있는 것 중에서 불변하는 즉자적인 것, 달리 표현하면 참다운 것이라고 선언하고 또 그렇게 드러난 것에서[6] 우리는 의식이 스스로 내세운 척도를 얻고 이 척도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지를 재보는 것이다. 여기서 지를 개념이라고 부르고 본질 또는 참다운 것을 존재자 또는 대상이라고 부른다면 진위를 가르는 우리가 하는 일이란 단지 개념이 대상과 일치하는지 그냥 바라보기만[7] 하는 것이다. 반대로 대상의 본질 또는 불변하는 즉작적인 것을  개념이라 하고 타자에 대해서 있는 대상을 말 그대로[8], 달리 표현하면 의식에 대해서 있는 대상이라는 의미로서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이때 진위를 가르는데 우리가 하는 일이란 역시 단지 대상이 그의 개념과 일치하는지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양쪽이 다 똑같다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양대 요소가[9], 이것을 개념과 대상으로 표현하든 아니면 대타존재니[10]  즉자존재니[11] 하는 것들로 표현하든, 하여간 양대 요소 모두 우리가 조사하고자 하는 지 그 자체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조사가 끝날 때까지 견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척도를 마련할 필요가 없고, 우리에게 언뜻 떠오르는 착안이나 생각을 조사에 적용할 필요도 없다. 이런 것들을 다 잘라 내야만[12] 비로소 우리는 사태 그 자체의 운동을 허심탄회한 [13]  마음가짐으로 관찰하는 경지에 들어서서 사태를 온전히 인식하게 된다.



[1] 원문 . <대화체 불변화사>로서 는 기대에 어긋한 것을 표현하기도 한다.

[2] 원문 ßstab an ihm selbst.> 정말 머리 아픈 문장에다 머리 아픈 전치사 이다. 위 문장은 사실, 문법상 틀린 문장이다. 은 여기서 이 주어인 을 가리키기 때문에[재귀하기 때문에] 사실 가 와야 한다. 그러면 ßstab an sich selbt.>가 된다. 이렇게 하면 당시에 흔히 쓰이던 하고 혼동될 우려가 있어서 문법상 틀린 표현을 헤겔이 쓴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무슨 말을 하려고 헤겔은 이렇게 문법상의 오류를 무릅쓰고 이렇게 표현했을까? 위 문장은 간단하게 ßstab.>(의식은 스스로 척도를 마련한다.> 이러면 충분하지 않았겠는가? 아니면 혹시, 문법상 틀린 문장이 사태의 실재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렇다면 문법상 틀린 문장이 올바른 문장이고 또 문법상에도 맞는 문장이 아니겠는가? 정말 그렇다면 위 문장의 주어인 <의식>이 재귀의 대상으로서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사이 움직이고 이동해서 그전과 달라져야 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주어인 <의식>은 자기소외(Sebstentfremdung) 운동을 하는 것일까. 그럼 운동하는 것을 어떻게 주어가 고정되어 있는 한 문장에 담을 수가 있단 말인가. 빙글 돌게 머리가 아프지만 참고 함께 춤추면서 이 문장이 무슨 춤을 추는지 살펴보자. 의식이 추는 이 춤을 헤겔이 이 문단에서 전개하는 것 같다. 일단 이라는 전치사만 살펴보고 넘어가자.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an ihn?> 할 수도 있고 ihm nicht einfach?> 할 수도 있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익히 알고 있듯이 <접촉>을 표현하는 전치사다. 그래서 전자는 교제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편지를 쓴다는 의미가 있고, 반면 후자는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고 그에게 마음을 쏟는 편지를 쓴다는 의미가 있다. (Harald Weinrich, 2007, 622f 참조.) 그래서 여기서 에는 <다리를 놓다/중개하다/매개하다>라는 의미가 묻어있다. 이렇게 보면 위의 추측, 즉 주어로 사용된 <의식>이 자기소외운동을 통해서 자기와 멀어지고 이렇게 멀어진 자기와 다시 소통한다는 추측이 그다지 틀린 추측이 아닌 것 같다. 은 또 <어떤 것의 표면에>라는 의미가 있는데 하면 표면적으로 붓을 들고서 그림을 그린 때는 언제였나 물어보는 질문이다. 반면 하면 목적의식적 행위의 대상으로서의 그림을 언제 완성했느냐의 의미가 있다. 이런 자기소외적인 관계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프로세스를 <조금만 더 파헤쳐보면 의식은 자신과 씨름 하는 가운데 매번 필요한 잣대들을 스스로 마련한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나는데>라고 옮겨보았다.

[3] 원문 는 나중에 따로 고찰해 보겠다, 여기서는 이정도로 번역하고 넘어가면 될 것 같다.

[4] an sich

[5] 원문 . 여기서도 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아주 쉽게 물리적인 돌리는 힘으로 이해하고 <어디로 향하게 하는 힘>이라는 의미로 옮겼다.

[6] 원문 . 역자주 참조

[7] 원문 . 정말 바라보기만 하는지 강제하는지 나중에 엄밀하게 살펴봐야 할 문제다.

[8] 원문 .

[9] 원문

[10] 원문 üreinanderessein>

[11] 원문

[12] 원문 . 역자는 훗셀의 의 의미에 주목한 것 같다.

[13] 원문 ür sich>. ür sich>는 자기자신을 완전히 전개하고 정신으로 승화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지를 관조하는 우리가 취해서 하는 마음가짐(Verhaltungsweise)에 더 주목하는 것 같다. 이 추측을 뒷받침하는 것은 헤겔이 대신에 를 사용한데 있다. 그래서 ür sich>을 옮기는데 <무엇> 초점을 맞추지 않고 <어떻게> 해야 의식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의식이란 운동하는 것이라는 면을 부각시키고, 그 운동을 따라 잡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조명해서 <허심탄회>란 낱말을 사용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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