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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에 대한 숙고

marishin님의 [보드리야르 재발견의 의미] 에 관련된 글.

관련 karl Heinz Kohl, Die Macht der Dinge를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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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춤과 우리의 춤

혁사무당파님의 [전국연대가 중앙일보 보다 더 우익] 에 관련된 글.

몸 파는 아픔을 가슴에 안고 반병신 모양으로, 쥐어 맞은 꾸부정한 모양으로[1] 가눌 수 없는 몸짓을 하는 우리는, 잡화상을 열고 인권을 이러쿵저러쿵 하는 마광수와 같은 잡화상주인이나 매춘을 단지 사회정화를(!) 위한  수단으로 보는 양선희와 같은 노련한 기회주의자와 기본적으로 달리하는 것이 있다.

 

우리의 몸에는, 매춘을 사유하는 우리의 실체에는 헝가리에 두고 온 두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서 독일 Hamm-Heessen이란 도시에서 길거리 매춘을 하다가 2009년 6월 5/6일 자정 즈음에 32세의 나이로 살해당한 헝가리 여성 Monika가 쐐기로 박혀있다. 그 뿐인가. 급진여성주의는 우리 사유의 실체에 쐐기를 박고 똑 박는다. 아니, 현실이 그리하고 있다.

 

이런 쐐기를 안고서 우리는 마광수와 양선희 따위의 무리와 맞서고 있다. 승무춤을 추면서. 동작 하나하나가 아프다.

 

우리는 마광수와 같은 춤을 추지 않는다. 홀가분한 몸으로 물구나무선 체 걸음마 연습하는 따위의 춤을 추지 않는다. 부부강간에서는 자유법치주의 원칙을 고수하다가 성매매 특별법에서는 머리를 땅에 쥐어박고 <봐라> 하고 자랑하면서 인권을 운운하고 매춘여성을 배려하는 척하는 천박한 물구나무서기 춤을 추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싸움이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가. 진보진영의 특산물로 생각했던 법정신과 법의미가 왜 마광수가 차지하는 것이 되었는가? 그리고 우리는 악은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수구꼴통들이나 취하는 입장을 고수하게 되었는가.

 

갑갑해서 할말이 없다.



[1] 최준식: <한국미, 그 자유분방함의 미학>에서 훔쳐온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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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

(§3) 이와 같이 판가름에 용이한 설명을 요구하고 또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이젠 잡화상에서나 볼 수 있는 동전으로 쉽게 사고팔기하는 것이 되었는데[1] 이런 것이 본질적인 것을 다루는 것으로 지금 통용되는 현실이다. 이런 자세는 철학 저술의 숭고한 내면이[2] 목적과 결론이 아니면 어디에서 더 밝혀질 수 있으며, 또 동시대가 같은 영역에서 산출한 것과의 차이가 아니면 어떻게 그 목적과 결론이 더욱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따위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그들은 자긍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가 인식의 출발점 그 이상의 것으로, 즉 현실을 안고 거기에 몰두하여 싸우는 실재적인 인식으로[3] 간주된다면 이것은 사실 진정해야 할 일은 옆으로 비껴나가면서 이와 같은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서 착안한 잔꾀라고 해야만 할 것인데, 무슨 말인고 하면 겉으론[4] 마치 사태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듯한 열정과[5] 사태 자체와 씨름 하는 척하는 노력은 [6] 보란 듯이 내놓지만 막상 그런 열정과 노력은 멀리하고 실지로 면해보려는 짓이라는 것이다. — 왜냐하면, 철학이 안고 해야 하는 일은[7] 그가 붙들어 안은 사태의 목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전개과정을[8] 통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속속들이 다룸으로서 완성되고, 또한 결론이 아니라 결론과 그의 생성과정을 합쳐놓은 것이 참다운[9]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목적 그 자체는, 즉 뭔가가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사상(捨象)되어 있는 한[10] 아무런 생명이 없는 것이고, 경향이란 것은 현실에 발 돋음 하지 않는 한낱 요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앙상한 결론이란 경향이 떠나버린 요동 없는 시체일 뿐이다. — 차이를[11] 이야기하는 것은 위와 같은 시체를 알아보는 것과 같은데[12] 차이는 사태의 외피일[13] 뿐이다. 차이는 사태가 끝난 곳에서 나타난다. 달리 표현하면 차이가 아닌 것이 사태다. 그래서 이런저런 철학체계의 목적과 결론, 차이와 판정을 빌미로[14] 한 이와 같은 노력은 겉으로 보기에는 어쩜 굉장히 어렵게 보이지만 사실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철학/행위는 사태를 붙들고 고심하기 보다는 사태는 아예[15] 뒤로 제쳐 놓거나 그 위에 붕 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지는 사태 안에 머물면서[16] 사태에 푹 빠져 들어가 자신을 망각하기보다는 자기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계속해서[17] 남의 것을 힐긋힐긋 쳐다보면서 자기 것보다 좀 나은 다른 무언가가[18] 있으면 움켜쥐려고 팔을 뻗기 일쑤다[19]. 그래서 이러 지는 사태와 함께 하고 거기에 몰입하기 보다는 자가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아집일 뿐이다. 아무튼[20], 내용이 충실하고 건실한 것을 평가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고, 더 어려운 것은 그것을 파악하는 일이고, 가장 어려운 것은 평가와 파악을 통일하는 서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1] 본문에 등장하는 , , 그리고 이란 낱말이 역자에게 잡화상주인이 하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2] 원문 . 낭만주의적인 내면을 엄청 까 내리는 말투다. 

[3] 원문 <현실을 안고 실재적인 인식>이라고 옮겨 보았다. 은 아직 끝나지 않은 숙고의 대상이다. 정신현상학 서론 §1에서 잠깐 언급하였다.

[4] 원문

[5] 원문 이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미하엘 토이니센(Michael Theunissen)의 철학을 다 읽어봐야 할 것이다. 우선 중세 기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생사를 놓고 일대일 대결에 임하는 그런 정신자세라고 하고 넘어가자. 그냥 <진지한>이라고 하면 뭔가 아닌 것 같다. 이것은 정신현상학 서설 §4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다.

[6] 원문 [Bemühen um die Sache]. 이란 전치사가 갖는 <둘러싸다>라는 의미에 주목했다. 물론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영향을 받은 번역이기도 하다.

[7] 원문 . 여기서부터 철학이 해야 하는 일이 두 갈래로 나눠지는 것 같다. 즉 철학이 하는 서술운동(Darstellung)이 사물자체의 운동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점이 부각되는 것 같다. 이 착안되는 대목이다.

[8] 원문 ührung>

[9] 원문 . 번역하기 힘들다. <현실>로 번역하면 <참다운>이란 의미가 결여되는데. 법철학에서와 같이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라고 해버리기엔 현실과 참다운 것간에는, 적어도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는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현실과 참다운 것 간의 긴장과 모순이 헤겔이 프랑크푸르트에 있을 때 거의 획 돌아버릴 지경까지 몰고 간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횔더린은 확 돌아버렸지만 그러나 그렇게 확 돌아버린 상태에서 솟아오르는 횔더린의 말보다 더 깨끗하고 자기모습 그대로 나타나는 말은 보지 못했다.

[10] 원문 ür sich>를 이렇게 옮겼다.

[11] 원문 . 원문은 이탤릭체로 강조되었다. 이 낱말에 <죽었다>(Er ist verschieden.)라는 소리가 들린다.

[12] 원문 . §2에서 역자주에서 언급한 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거기서는 사유에서 존재의 장으로, 여기서는 존재의 장에서 사유로 전환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13] 원문 . 이런 인식이 껍데기만 보는 천박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14] 원문 . 보통 함께 쓰이는 이 여기에선 와 함께 사용되었다. 이 갖는 수단적이라는 의미를 이렇게 <빌미>로 옮겨보았다.

[15] 원문 <immer>. 여기엔 <항상>이라는 의미보다 on> (아예 처음부터)라는 의미가 더 강하게 있다.

[16] 원문 . 이 갖는 의미의 폭(Bedeutungshof)을 보자면, 우선 동작을 멈춰 산만한 마음을 가다듬고, 부동자세로 눈을 대상에 맞춰 거기에 고정시키고 바라보는 것이다. (클레멘스 브렌타노, 고드비) 그리고 이렇게 하염없이 머물면서 대상에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접하는 사물에 대한 애착이다. (괴테, 파우스트 1).    

[17] 원문 . 여기서도 위와 비슷하게 라는 의미가 강하다.

[18] 원문 einem Anderen>. 여기서다른 것이란  사태와 다른 것보다는 할 줄 모르는 지의 행위를 이해하는 연장선에서 그리고 부정관사와 함께 쓰여졌다는 점에서 어린 아기가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매번 지금 자기 손에 쥔 것을 내팽개치고 이 새 것을 향해 팔을 내 뻗치는 행위와 비교해서 이해한 것이다.

[19] 원문 . 시제는 현재인데 버릇이 굳어져 습성이 되어버린 상태를 표현하는 현재형이다.

[20] <아무튼>으로 본문의 삽입구와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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