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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14

(§14) 이런 운동을 놓고 우리는 변증법적 운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1]  의식이 자기 안에서 운동하는 가운데[2], 지의 운동뿐만 아니라 대상이 하는 운동 안에서 볼 수 있는 변증법적 운동이[3], 이런 운동을 통해서 새로운 대상이 발생하고 그 대상이 다시 참다운 대상이 되는 정황에 한해서[4], [우리가] 사용하는 경험이라는 낱말이 뜻하는 것의 핵심이다. 의식이 하는 변증법적 운동이 이렇게 이해되는 경험이라는 맥락에서 바로 앞에서 [§13] 언급한 의식의 과정에서 드러나는[5] 한 면을[6] 끄집어내어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면을 아래와 같이 새롭게 조명해 보는 일은 [의식을 관조하는] 우리가 하는 일인데, 이렇게 조명해 보면 [의식이 하는 운동을 서술하는] 학문이 취하는 입장이 훤해지지 않을까 한다.[7] 조명해 보자.[8] 의식은 뭔가를 안다. 이렇게 의식의 대상이 되는 그 무엇이 본질 또는 불변하는 그 무엇이다. 이렇게 지에 대해서 불변하는 그 무엇이 다가 아니다[9]. 이 무엇은 또한 의식에 대한 불변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의식이 의미하는] 참다운 것이란 원래 불변하는 것으로서의 진리라는 의미였는데 사태가 이렇게 되면[10] 진리가 엇갈리는 것이 된다.[11] 우리가 보기에 이제 의식은 두개의 대상을 갖고 있다. 하나는 [원래적인 의미로서의] 맨 처음의  불변하는 그 무엇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에 대한 그 불변하는 그 무엇이다. 후자는 회의주의가 서슴없이 말하듯이[12] 의식이 자기 안으로 반성해 들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분명[13] 보인다. 뭔가를 다시 자기 앞에 갖다 놓는 것이 아니라[14] 첫번째 대상이 되었던 불변하는 그 무엇에 관한 지를 자기 앞에 갖다 놓는다는 것인데, 이때 불변하는 그 무엇을 대상으로 삼았던 지의 행위만이 반성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우리가 위에서 보여주었듯이 그렇지 않다. 회의주의가 관념적으로 그러듯이 이때 첫번째 대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15] 변화하여 다가간다. 그래서 이 대상은 더 이상 홀로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식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불변하는 그 무엇이 된다.[16] 이렇게 되면 다음과 같은 결과로 귀착된다. 즉, 불변하는 그 무엇이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양식이 참다운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더 살펴보면[17] 참다운 것이 본질이 되기 때문에 불변하는 그 무엇이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양식이 이제 의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대상이 바로 첫번째 대상의  허무함을 내포하고 있는바 첫번째 대상을 딛고 올라서면서 얻은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다.



[1] 원문 . 이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면 하고 난 다음 잠깐 멈추고 에 액센트를 주고 계속 읽어나가게 된다. 우리말에서도 말을 하는 도중에 적합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그>하고 잠깐 멈춰 눈길을 내면으로 돌리고(innehalten), 그리고 지금까지의 생각을 정리하여 [의식의] 눈앞에 갖다 놓고(vorstellen) 그 Vorstellung에 부합하는 개념이 떠오르면 말을 계속 이어간다. 그래서 원문은 <그.변증법적인 운동> 정도로 옮겨지겠는데, 이런 <목소리>가 복제될 수 있는가, <이편에서 저편으로 옮겨질 수 있는가/번역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데리다가 붙들고 싸웠던 문제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 는 지금까지 살펴본 의식의 운동을 종합해서 표현하는 terminus technicus이기 때문에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설명하면 대려 설명하는 사람의 엉뚱한 생각이 될 수가 있겠다.

[2] 원문 §12 첫 문장에 등장하는 표현인데, 거기서 살펴보았다. 거기서 했던 추측, 즉 의식이 어는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그곳을 떠나 움직인다는, 자기소외운동을 한다는, 그리고 다시 자기로 돌아오는 운동을 한다는 추측을 해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이런 운동을 문법상 틀린, 그러나 사태에 맞는, 그래서 결국 다시 문법에 맞는 란 표현으로 표현했다고 추측해 보았다.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데 있어서 문장을 시작할 때의 <주어>가 문장을 다 끝내고 나면 다른 <주어>가 되어있는 이런 사변적인(spekulativ) 운동이 독어가 지니는 특성이며 또 독일이상주의 특성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주어가 움직이는 운동을 담아내는 논리는 대체 어떤 논리인지 궁금하다.

[3] 지의 운동과 대상의 운동을 통합해서 의식의 운동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Einheit der Einheit und Differenz의 근거가 되는 상황이 아닌가 한다.

[4] 강조는 역자. 회의주의에서는 새로운 대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13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an sich> 가 단지 ür es an sich>였다는 과거로 떨어지는 한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운동이 있을 수 없다. 과거가 현재완료형이 되어 지나간 것이지만 현재에 결과로 남아있어야 한다. 이 이것을 담보하고 있지만 그 <제한적 부정>의 힘이 정말 회의주의 힘을 꺾는 힘이 되는지  헤겔은 보여줘야 한다. <정신현상학>을 읽어 내려가는 과정에서 길목길목에 이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헤겔이 여기서 이 문제는 보류한다는 느낌을 주는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회의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개연성도 참작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때 가서 실지로(ernsthaft) 따져보자.

[5] 원문 . 이 갖는 <표면적>이라는 의미를 <드러나는>으로 옮겼다.

[6] 원문 .

[7] 이 문장은 헤겔이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좀 두리뭉실하게 표현하였는데, 한가지만 집고 넘어가자면 에서 이 주격적 소유격인지 목적격적 소유격인지 확실하게 해주지 않았다. 헤겔의 논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본문을 <아래 서술이 갖는 학문적인 면>으로 번역하면 이 문단과 다음 문단이 아리달송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서술을 하는 학문의 입장>으로 옮겼다.

[8] <정신현상학>의 담론적 성격을 살렸다. <정신현상학>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이런 담론적 성격 외 독어의 특성이 애로사항이 된다고 역자가 지적한 적이 있다.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정신현상학>에 무수히 쓰이는 문장기호다. 적절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 damit tritt die Zweitdeutigkeit dieses Wahren ein.> <이중의미>로 번역하지 않고 에 가깝게 <헷갈리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이유는 여기서 사용되는 세미콜론은 본문이 앞의 내용과 물론 관련이 있다고 보여주고 있지만, 그보다 뒤에 나오는 내용과 더욱 밀착되어 있고, 이것과 비교해 볼 때 앞의 내용과는 거의 단절되는 있는 상태에 가까운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앞의 내용을 따르면 <두개>란 의미가 강하겠지만 뒤에 오는 내용을 따르면 의식의 진리와 의식을 관조하는 우리의 진리가 엇갈린다는 것이 핵심내용이 아닌가 한다.

[12] 원문 <zunächst>. 여기서 줄곧 담론의 대상이 되는 것은 회의주의이기 때문에 이렇게 옮겨 보았다.

[13] 원문 . §13 에 관한 역자주 참조.

[14] 원문

[15] 의식에게

[16] 원문 ört auf [,] das Ansich zu sein, und wird ihm zu einem solchen, der nur für es das Ansich ist; somit aber ist dann dies: das Für-es-sein dieses Ansich, das Wahre, das heißt aber, dies ist das Wesen, oder sein Gegenstand.>(강조는 역자). 우선 문장체(Textkörper)에 주목하자. 이 문장은 §13에 등장하는 문장 Ansich war, nicht an sich ist, oder dass es nur fuer es an sich war.> [의식을 관조하는] 학문의 입장에서 반복한 것이다. §13의 문장은 물론 의식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다. 문장체에 나타나는 차이는 라는 과거형이 라는 현재형으로 대치된 점이다. <정신현상학>의 문제는 이 차이를 설명하는데, 이 차이를 납득이 가게 전개하는데 있다고 본다. 독어에서 현재형(Präsens)과 과거형(Präteritum)은 현재/과거완료형이나 미래형과는 달리 과거를 상기하거나 미래를 내다보는 그런 시간의식(Tempus-Perspektive)이 없는 시제다. 이런 면에서 양자간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는 자기가 속한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현재는 접하고 있는 세계를 논의하는 면이 있다는 점이다 (Harald Weinrich, 213, 219쪽 참조). 그래서 구체적인 대화나 담론상황을 보면 과거는 이렇게 [주관적으로] 경험한 것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이 화자에게 그에 대한 증명을 요구하지 않거나 최소한 그에 대한 연기(Aufschub)를 허용하는 반면, 현재는 화자와 피화자가 처해있는 세계를 논하기 때문에 화자건 피화자건 논의된 내용에 자기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렇게 의식이 이야기하는 세계와 학문이 논의하는 세계간 아무런 연관이 없거나 서로 평행하게 존속하는데 헤겔은 양문장에서 란 시간의식을 표현하는 동사를 사용해서 두 세계를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 역자가 지적하고 물고 늘어지는 점은 이것이 억지라는 것이다. 최소한, 그것이 서론에서 명쾌하게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헤겔은 의식이 사용하는 과거형을 고대그리스어의 적인 시제로 이해하는 것 같다. 아오리스트라는 시제는 어떤 사태가 존속하거나 발전하는 최종점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하면 <나는 과거 왕이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는 더 이상 왕이 아니다>라는 현재완료적인 의미를 갖고 자기반성과 함께 자지실체와 실재가 눈에 들어오는 그런 상황이 전개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의식은 자기이해에서 반복의 의미를 갖는 <과거형>을 사용하는 것 같다. 이런 과거형을 적용해서 하면 <나는 [이런 저런 시도를 했으나 다른 것이 되지 못하고] 매번 왕으로 머물렀다.>라는 의미가 있다.

[17]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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