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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13

(§13) 의식을 가름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절제해야 하는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1] 개념과 대상, 척도와 잣대질의 대상이 모두 의식 내에 있다는 면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첨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다가 아니다. 우리가 더욱 유의해야 할 점은[2] 양자를 비교하는 본격적인[3] 조사 또한  우리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4] 아니라는 것이다. 의식이 자기자신을 스스로 가름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은 일이란 수수방관(袖手傍觀)하는[5] 것뿐이다. 왜냐하면, 의식이란 한편으로는 대상에 대한 의식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참다운 것에 대한 의식임과 동시에 이렇게 참다운 것을 알고 있다는 의식, 즉 이와 같은 [대상에 대한] 지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자가 다 의식의 행위이기[6] 때문에 의식이 하는 이런 행위 자체가 진리와 지를 비교하는 것이 되고 대상에 대한 지와 대상과의 일치여부 역시 의식의 행위 안에서 의식에게 벌어지는[7] 사건이 된다. 그런데 모두가 이렇게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하고 또 그런 사건만으로 제한한다면[8] 대상은[9] 의식에 대한 대상으로서 단지 의식이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 밖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추궁이 그럴 듯 하다[10]. 왜냐하면, 의식은 자기가 알고 있는 대상을 마치 꿰뚫어 보듯이 하여 그 뒷면에 의식행위와 무관하게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에는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식이 아는 대상에는 이렇게 아무런 구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의식은 무엇을 무엇에 갖다 대보는 식으로, 즉 [의식에 대한] 대상을 [즉자적인] 대상에[11] 갖다 대보는 식으로 조사를 진행하여 지의 진위여부를 가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지 않다. 의식이 대상을 안다고 하는 그 행위 자체를 통해서 의식에게는 [막연하지만] 뭔가가 [의식과 무관하게]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고, 다른 뭔가는 지, 즉 의식에 대한 대상의 존재라는 구별이 주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주어진 구별에 기반하여 비교조사가 진행된다. 이런 비교에서 양자가 일치하지 않으면 의식은 지를 변경하여 대상에 부합하도록 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의 변화는 사실 지에 머무르지 않고 대상의 변화까지 몰고 온다. 왜냐하면, 주어진 지는 본질적으로 대상에 관한 지이기 때문이다. 지가 변하면 동시에 대상도 다른 것이 된다. 왜냐하면, 대상은 본질적으로 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면 의식은 자기가 이전에 das Ansich라고 했던 것이 이제 와서 보니 사실 불변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단지 의식에 대해서 [한때] 불변하는 것으로 있었던 것이었다고 의식하는 새로운 의식이 된다.[12] 사태가 이렇게 되면, 즉 의식이 자기의 대상에 자기의 지를 가름해보고 지가 여기에 일치하지 않게 되면 대상 그 자체도 의식의 이런 운동에 견딜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조사의 잣대도, 그 잣대를 가지고 조사한 것이 그 조사에서 부족한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란 단지 지의 조사에 머무르지 않고 지를 조사하는 잣대의 조사가 되는 것이다.



[1] 원문 를 이렇게 장황하게 옮겼다. 여기서 는 <다되었다>라고 안심하는 마음에 더 유의해야 할 점을 지적하고 다짐하는 대화체 불편화사로 사용되고 있다. 아주 강조된 다.

[2] 역자주 107 참조. 강조된 가 갖는 의미를 <더욱>으로 옮겼다.

[3] 원문

[4] 원문 <überhoben>. (직무에서 물러나다>라는 의미로 옮겼다. <überheben> 의미는 여기서 같은 의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있다면 <überheben> <überheblich>, 즉 팔장 끼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교만>에 좀 있다.

[5] 원문

[6] 원문 ür dasselbe>. 왜 그냥 이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머리 아픈 표현을 계속 쓰는지. ür dasselbe>§8에서 §10 <für sich>와 연계하여 살펴본 적이 있다. 한번 더 엄밀하게 고찰해야 할 문제로 남아있지만 잠정적인 결과로 얻는 <의식의 행위>라는 의미를 그대로 사용해 본다. 

[7] 원문 ür dasselbe>. 여기서 에 주목하자. 미래형이다. 의식이 앞으로 나가고 있다. 정신현상학 서론을 읽고 나서 꼭 따져봐야 할 문제는 의식이 정말 자력으로 앞으로 나아가 정신까지 가느냐의 문제다. 달리 표현하면 정말 정신의 경지에 올라간 사람, 즉 정신의 도움이나 강제가 의식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전혀 필요하지 않는가라는 문제다. 이점과 관련해서 역자는 지금까지 좀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을 번역할 때마다 강제성이 부여된 <끌려나아감>을 사용하였다. 아니면 이런 것인가.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내 희망의 바탕이 되는 나의 주인이여, 나의 구원을 위해서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지옥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서  [내가 천국을 찾아갈/올 수 있게 여기저기] 당신의 흔적을 남겨둔 주인이여 (O donna in cui la mia speranza vige,/e che soffristi per la mia salute/in Inferno lasciar le tue vestige... 단테, 신곡, 천국편 31)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정신의 도움으로 정신의 경지에 다 올라간 뒤에 마지막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인가. 단테의 신곡에서 또 재미있는 것은 <당신의 흔적>이란 표현과 관련해서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흔적을 찾아내고 따라 갔다는 것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단테가 베아트리체가 웃는 모습을 단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은 애타는 마음이었고 이런 마음을 죽 간직하고 있었지만 죽어버린 베아트리체의 웃음을 다시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신곡>을 지어서 베아트리체의 웃음을 바라보는 장면을 상상하였다는 재미있는 견해를 내 논 적이 있다. 그리고 이런 사연이 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철학이 <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볼만한 대목이다.

[8] 원문 를 이렇게 장황하게 옮겼다.

[9] [우리가 학문의 입장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지의 대상과 진리로 구분되지 않고]

[10] 원문 . 은 따로 살펴봐야 할 개념이다. 우선 크게 <근거가 있는 schein>하고 <전혀 근거가 없는 schein>으로 구별하고 지나가겠다. 전자는 <그럴듯한> 근거가 있는 것이고, 후자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겉치레>(bloßer Schein)가 되겠다.

[11] 원문

[12] 원문 nur fuer es an sich war.> (강조는 역자). 회의주의(Skeptizismus), 또는 <불행한 의식>(unglückliches Bewusstsein)과 관련하여 중요한 대목이다. 지가 이와 같은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서 스스로, 외부로부터 첨가되는 것이 없이, 필연적으로 학문이 되는 과정에서 또는 의식이 정신이 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회의주의다. 이 문제를 <제한된 부정>을 통해서 해소했다. 학문이 수수방관하는 의식이 회의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인지 아니면 가 보여주듯이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역자는 이것을 따지기에 충분한 근거가 여기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의식이 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 오로지 für es an sich 였던(war)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an sich 가 für es an sich가 됨과 동시에 다시 an sich가 되어서 새로운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an sich이 아무것도 아닌 오로지 für es an sich밖에 아닌 것으로서 과거로 떨어지는, 즉 공허한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완전한 의식이 갖는 회의주의였고, 불행한 의식의 본질이 아닌가 한다. 이 것을 극복하는 것이 정신현상학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회의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면 변증법적인 운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의식이 되었다는 것을 담보해 주는 이란 동사의 사용의 실재를 역자는 보지 못한다. 아니면 아직 이해하지 못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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