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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15

(§15) 경험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관한 이와 같은 서술의 표면에는 언뜻 보기에 경험에 관한 통례적인 이해와 부합하지 않는 요소가[1] 스며있다. 이 요소는 첫번째 대상과 그에 대한 지에서 두 번째 대상으로 넘어가고 과도에[2] 있다. 사람들은 보통 두 번째 대상을 놓고 경험을 논하는데, 위에서 서술한 바에 따르면 과도란 첫번째 대상에 관한 지, 달리 표현하면 첫번째 Ansich가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양식이 필히 두 번째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3]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두 번째 대상에 대하여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은 위에서 서술된 경험과는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4].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한 첫 개념의 비진리성을 경험하게 되는 상황은 우리가 첫번째 대상과 아무런 내적 연관성이 없이 우연히 접하는 전혀 다른, 뜻밖의 대상을 접하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 같이 보인다. 그 결과 이런 식의 경험에서 우리 몫으로 떨어지는 것이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대상의 운동에 직시하는 것과 반대로] 뭔가 아예 처음부터 불변의 완결무결한 상태로 있는 것을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을 갖추면 되는 것처럼[5] 보인다. 이와 달리 앞에서 서술된 견해에 따르면 새로운 대상은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의식이 전복[6]됨으로써 생성된 과거를 갖는 것으로서 필연적인 [7] 것이다. 사태를 이렇게 살펴보아야만 비로소 의식이 하는 일련의 경험이 학문적인 발걸음으로 추대될 수 있는데, 사태를 이렇게 고찰하는 것은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가 첨부하는[8] 것이지 우리가 관조하는 의식이 하거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9] 이런 상황은[10] 사실 위에서 의식에 대한 [학문의] 이 서술과 회의주의와의 관계를 다루면서 언급한 상황과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11] 그때 한말을 상기하자면 참답지 않는 지에서 매번 얻어지는 결과가 모두 공허한 무가 되어서 흔적이 없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무엇의 결과로서의 무로서 그 무엇의 무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를 이렇게 결과로 파악하면 그 결과에는 이전에 행해졌던 지에 스며있는 참다운 것이 보존된다. 의식의 운동에 대한 이런 사연이 여기에 와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즉, 처음엔 대상으로 나타나던 것이 대상에 관한 의식의 지로 침강하고, 불변하는 그 무엇이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이 되고[12] 바로 이것이 새로운 대상이 된다는 것이며 이와 함께 또한 새로운 의식 형태가 등장하고 이렇게 새로 등장한 의식에게는 이전 의식에게 본질이 되었던 것과는 다른 것이 본질이 된다는 것이다. 의식의 운동을 둘러싼 이런 궤도(軌道)가[13]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의식형태를 빠짐없이, 그리고 각자가 갖는 필연성에 따라서 이끌고 나아가는 것이다[14]. 여기에 회의주의를 서술하면서 이야기 한 것과 다름 점이 딱 하나 있는데[15], 그것은 이와 같은 필연성이[16], 달리 표현하면 새로운 대상이 발생하는 것이 의식에게는 전혀 인지되지 않고 그저 숙명적인 우연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필연성은 마치 의식의 등뒤에서만[17] 벌어지는 사건인양 의식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만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만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의 운동에는 자신의 운동을 전혀 꿰뚫어보지 못하고 그 운동을 숙명적으로 이행하는, 아니면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만[18] 알고 있는 면이[19] 스며들어 있다. 달리 표현하면 의식의 운동에는 경험의 와중에 있는 의식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우리만 꿰뚫어 보고 우리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숙명적인[20] 면이 스며들어 있다. 더 정확하게 지적하자면[21]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생성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는 것의 내용은 의식에 대해서 있는 것이며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가 파악하는 것은 단지 그 생성운동의 양식, 달리 표현하면 순수한 생성일 뿐이다. 생성된 것이 의식에 대해서는 단지 [그때 그때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지만, 우리에 대해서는 동시에 운동과 깨쳐나감으로 [22] 존재하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Übergang>

[3] 원문

[4] 원문

[5] 원문 ür sich ist>

[6] 원문 . 표현이 좀 불분명하다. 이 의식의 인지 아니면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가 도장을 찍듯이 의식에게 둘러 씌우는 것인지 좀 불분명하다.

[7] 원문 . 발생한 것으로 다시 거꾸로 어쩔 수가 없는 것. 와 유사한 것 같다.

[8] 원문

[9] 그러면 의식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데

[10] 원문 . 가 의식과 의식작용만 포함하는지 아니면 서술하는 학문도 포함하는지 이것이 문제다.

[11] 필자가 보기엔 이것은 단지 헤겔의 주장인 같다. 앞 문단에서 살펴보았듯이 다른 것이 없다는 주장이 최소한 명쾌하지 않다고 반박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12] §13에서는 war>, §14에서는 ist>에서 이 문단에서는 wird>로 변한 것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시간성과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존재양식은 회의주의에 단계에 빠져있는 의식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학문(헤겔) 스스로 기술하고 있다. 이 미래형을 쓰게 하려고 헤겔은 다방면으로 노력하는데 회의주의가 스스로 수긍할 만은 것이 되는지 모르겠다. 회의주의가 이 미래형을 쓰지 않는 한, 변증법적 운동이 자력으로 전개된다는 주장에 문제제기를 할 수가 있겠다.

[13] 원문 . 이 문단의 논점은 고대 그리스 비극을, 그리고 르네상스 비극과 그 이후 비극의 발전형태에 관한 토론과 유사하다. 관련 내용은 Peter Szondi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래서 를 어쩔 수 없이 딛고 나아가야 하는 의미가 있는 <궤도>로 옮겨 보았다. 

[14] 문제는 누가 이끌고 가느냐라는 것이다. 의식이 자력으로 아니면 학문이, 아니면 학문과 의식이 합심하여?

[15] 원문

[16] 원문 . 여기서 필연성이란 그리스 비극의 ananke와 유사한 것 같다. 오이디푸스의 전말을 아는 관람자와 합창단만 그가 숙명적으로 거쳐가야 하는 과정을 꿰뚫어 보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알고 피해가려고 해도 숙명이 제시한 길에서 이탈할 수 없다.

[17] §8 상응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불교적인 아니면 관념적인 <피안> 아니라 의식을 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의식을 온전히 알아보려면 그것을 <뒤집어 까야> 한다는 것이다.

[18] 원문 ürunsseins>. 역자는 여기서 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 맞춰 <숙명적인 것>으로 번역하였다. ürunssein>이란 자기의 본성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자라나가기만 하는 식물에 있어서 씨앗에서 열매까지의 과정을 꿰뚫어 보는 우리만 그 숙명적인 본성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19] 원문

[20] 원문 ürunssein>

[21] 원문

[22] 원문 . 괴테의 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여기서 은 조동사의 동명사가 아니라 완전동사의 동명사다. 그래서 <무엇이 되어라>라는 의미보다는 방해하는 뭔가를 깨부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죽음으로 모든 것을 깨부수고 앞으로 나가라>로 번역될 수가 있겠다. 생명력의 움직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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