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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19
    진보네 복귀(2)
    저음
  2. 2007/06/27
    자기 극복(2)
    저음
  3. 2007/05/14
    생일 축하 메시지(5)
    저음
  4. 2007/05/12
    노동법 문제풀이(4)
    저음
  5. 2007/05/09
    연대항쟁? 연대사태?
    저음
  6. 2007/05/08
    오만가지 생각(2)
    저음
  7. 2007/05/02
    오랜만에 간 430 행사(2)
    저음
  8. 2007/04/26
    소위 '테러리즘'과 인권 중에서(2)
    저음
  9. 2007/04/13
    종합시험 합격(7)
    저음
  10. 2007/04/13
    노동자를 죽이는 사회
    저음

진보네 복귀

2차 시험을 끝내고

다시 진보네로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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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극복

지금부터 무엇이든

잘 풀릴 것이고

모든 상황은 좋아질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

뭍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사람은

신대륙을 발견하지 못한다.

-앙드레 지드-

 

8월 중순이후에 다시 나타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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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축하 메시지

1. 지난주 토요일이 생일이었다. 매번 맞이하는 생일이라 정작 본인은 무덤덤하게 지나가고 싶었는데 주변에서 챙겨주는 고마운 이들이 있어서 생일파티라는 것도 하게 되고 생일선물이라는 것도 받게 되었다.

 

2. 그런데 생일 당일날 제일 먼저 나에게 통지를 해주며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이들은 다름 아닌 기업체들이나 미용실들이었다. 별로 받고 싶지 않은 문자들을 받으면서 최소한 헤어샵 개인정보는 이제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 생일을 축하드리며 오늘 통화료(국내)는 할인하여 드립니다. 즐거운 하루 되십시요. KTF

- 전명훈님, 생일축하해요! 좋은 하루 되시고...당일방문시50%할인혜택드려요~^^남녀공학헤어

- 어머~!생일이시네요^^당신의생일,머리부터달라지세요.20%쿠폰드려요~!시오장총신대점

- [롯데홈쇼핑] 전명훈님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3. 그러나 머리 깍을 때가 되었는지라 할인을 해준다하여 시오장으로 가서 머리를 깍았다. 커트비용이 다른 데보다 비싼 일만삼천원이었으나 20%할인을 믿으면서 이번에는 머리를 제대로 깍아보자 하였다.(지난번에는 블루클럽에서 머리를 깍았더니 엉망이 되어버렸기 때문에..ㅠㅠ) 그러나 계산을 하려고 하니 커트는 할인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종업원 말! 이런 사기꾼들, 그러면 문자에 정확히 알려주거나 문자를 보내지나 말던지...ㅜㅜ 울며겨자먹기로 돈을 다 주고 나왔다.

 

4. 그래도 이후에 여자친구, 여친선배 및 후배커플과 함께 족발과 보쌈을 시켜 설중매와 복분자주를 마시며 파티를 즐겁게 하였다. 요새 혼자 공부하느라 사람들을 못 만나 생일을 핑계로 술한잔 하려고 했던 것인데, 감사하게도 선물로 상품권, 지갑, 여름 남방 등을 받았다. 빈약한 요새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후배 커플이 선물하여준 여름남방, Thanks to 예삐&방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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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법 문제풀이

 

요새 제일 재미있는 시간은,

1주일 이틀동안 할당된 노동법 객관식 문제풀이 시간이다.

노동법 문제 풀때는 왜 이리 좋은지,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까지 지어진다..훗~

경제학을 노동법처럼 좋아했으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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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항쟁? 연대사태?

 

96년 연대사태에 관한 사진을 좀 찾아보려고 서핑을 하던 중 어느 분의 블로그에 올라와있던 96년 영상 편집본을 발견하였다.

 

영상을 보면서 11년전 생각이 떠올랐다. 그 해 6월, 군대에서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인생의 다른 길을 모색해보려고 재수학원에 다니던 중,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지나치지 못하여, 8월 투쟁에 합류하게 되었다. 군대 제대하고 처음나간 집회가 96년 연대사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에는 학원을 착실하게 다니는 척을 해야하기에, 숙박을 못하고 출퇴근 투쟁을 하였다. 그리하여 초반에 연대안에 들어갈 기회가 되었으나 들어가지 않고 일단 집으로 갔었는데, 그 때 연대에 들어갔다면 나도 종합관에 갇혀서 군대 제대하자마자 구속되는 X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연대안에 갇힌 5천에 가까운 학우들을 구출한다고 한 만명 가까운 한총련 대오가 신촌사거리 사방에서 진격투쟁을 하던 끔직한 기억은 10년이 지났는데도 기억의 조각으로 남아있다. 전쟁터로 변한 신촌로터리에서, 최류탄 가스에 목 매며 눈물 흘리던 기억이란...

 

그러나 이 영상처럼, 승리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대중간부들이라는 한총련 지도부들은 대중들을 책임지지 못하고 경찰병력의 진압전에 튀어버렸고, 유연한 투쟁전술을 구사할 수도 있었는데 끝까지 연대에서의 범민족대회를 고집하던 그 자세는, 꼭 남한과 북한의 적대적 상호의존관계를 보는 듯 하였다.

 

항쟁? 사태? 앞으로 살아갈 시간에는 저런 광기의 시간은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물론 지금 이 시간에도 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광기들이 지배를 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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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가지 생각

요새 생활은 하루 7-8시간을 집 근처의 어둠컴컴한 독서실에서 혼자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보니 말도 많이 못하는데 머리 속의 생각은 많아진다.

 

민변에서 최소한 2년은 일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대학원이나 시험이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했어야 하는데, 두 마리 토끼 다 잡으려다 3년의 시간만 낭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

시험안 되면 직업상담사 시험이나 한 번 봐 볼까 하는 생각,

다음 학기에 논문을 써야되나 말아야 하는 생각,

시험이 안 되면 취업을 해야 하나 아니면 단체 활동을 새로 알아봐야 하나라는 생각,

취업을 한다면 내가 취업을 할 수 있는 곳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라는 생각,

단체 활동을 하면 최소생계비는 받아야 할텐데 그런 곳에 자리가 있을까라는 생각,

나이 많은 나를 받아 줄 단체가 있을까라는 생각,

정부관련 위원회에 자리가 나면 다시 한 번 원서를 내 볼까하는 생각,

연애를 9년째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하는 생각,

결혼을 한다면 언제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

나라는 인간이 '결혼'이라는 대단한 일을 치를 능력과 여유가 될 것인지에 대한 생각,

시험끝나면 수입은 어디서 벌어야 하나라는 생각,

 

생각..생각..생각..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들..머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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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간 430 행사

 

1. 430을 처음 가본 것은 1998년도였다. 대학 1학년때인 1993년도에는 동아리에 들어간 것이 5월 이후였으니 430을 알 리가 없었을 것이고, 군대 제대도 1996년 6월에 했으니 1993-1996년 까지는 430과 메이데이는, 부끄럽지만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더욱이 이 당시는 민족해방계열 운동에 몸을 담고 있었던 시기라 누구도 나에게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2. 1997년 그 동안 해 오던 운동과 단절을 한 후, 정치적 ‘전향’을 한 후 처음으로 학교에서 메이데이 참가단을 꾸려서 장충단 공원에서의 노동절 행사에 참여를 하였다. 97년까지도 430행사는 아직 나에게 낯설었다.

 

 

<1997. 5. 1. 노동절 투쟁을 마치고, 장충단공원>

 

 

다음해 1998년도에는 좀 더 조직적으로 준비를 해서 메이데이 참가단을 꾸려서 430과 메이데이 행사에 참여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가 처음으로 참석한 430 행사였으며, 소위 ‘좌파’의 뜨거운 경험을 했던 기억이다.


3. 1999년 잠시 모 조직에 몸을 담았다가 어리버리 430준비위 중앙집행국에 파견을 가게 되었다. 99년 430은 다른 430보다 많이 힘들었다. 지하철노조가 그 해 4월, 7박 8일간 총파업을 벌이면서, 430준비위는 지하철투쟁을 엄호하기 위해 매일 이천대오 가까이가 집회에 참석하고, 200여명 가량의 사수대가 서울대에서 8일동안 밤을 지새웠다. 서울대에서 7박 8일간 숙식을 하며 지내던 기억을 여러모로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몇번의 공권력 침탈 위협에 시달렸던 것은 별개로 하더라도, 밤에는 사수대와 함께 규찰을 서고 아침이 되면 3-4시간 잠시 눈을 붙여다가 시내에 열리는 오후 집회대오를 위해 서울대를 나가 집회에 참석하고 다시 서울대로 들어오는 일을 반복하였다. 또한 서울대에는 내가 몸 담았던 조직이 없었다. 다른 조직의 스텝들은 본인들의 사무실로 가 잠을 자는데, 나는 잘 곳이 없어서 1000-2000여개의 화염병으로 가득차서 신나냄새가 빠지지 않았던 총학생회방에서 의자 서너개를 붙이고 새우잠을 자야만 했었다. 그 때는 소위 좌파에서 소수파였던 우리 조직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4. 어제 몇 년만에 430을 갔다. 예상을 했지만 학생인원은 얼마 안 되었다. 그래도 수년전부터 민주노총이 메이데이 전야제를 주최하면서 흐려놓았던 430의 자리를 다시 학생동지들이 복원하는 것 같아 남다른 느낌도 들었다. 학교 후배들도 이십여명 가량 나와서 많이 놀랐다. 이제 조직도 없는 학교에서 1-2명의 활동하는 후배들이 그래도 고생하면서 후배들을 데리고 나온 것 같았다. 대부분 06, 07학번들이라 문화제에서 나오는 소리들을 제대로 알아 들을까 걱정은 했지만, 비를 맞으면서도 율동하고 구호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나름 대견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새벽 2시, 문화제가 끝날 시각까지 후배들의 뒤에서 그들의 모습을 미소 지으며 보면서, 나도 이제 아저씨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첫 메이데이 투쟁에 나간 때부터 10년이 지났구나. 이렇게 세월이 위치를 바꾸어 놓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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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테러리즘'과 인권 중에서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이 법에 의한 지배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함이 필수적이다'라는 세계인권선언 전문의 내용은, 반란의 권리를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권이 반복적으로 거부될 때 반란이 불가피해진다고 진술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 미카엘 이그나티에프

 

오늘 세미나에서 토론으로 이야기하지는 못하였지만, 세미나 시간에 끄적였던 것을 잠깐 다시 들추어낸다면,

 

이그나티에프의 말은, 결국 반란의 권리는, 권리의 측면에서 소극적 권리이자 최후수단성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렇다면 '인권의 반복적 거부'라는 것에 대한 형식적, 실질적 판단의 기준이 필요할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기준에 대하여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의문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양보를 하여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이러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제3의 기구가, 예를 UN 등을 포함한 국제기구 등이 요구되거나 존재할 수 있는데, 제3의 기구에 대한 정당성을 누가, 어떻게 부여할 수 있는가라는 비판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반란의 권리' 혹은 '혁명의 권리'는 인권 그 자체에 내재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적극적인 권리로서 기능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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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시험 합격

法哲學 혹은

Philosophy of law 라고 불리우는 과목의

 

삼수끝의 합격!

 

이 대목에서 한 마디, 2년 동안 조교한 보람이 있었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종시도 통과하시고, 논문만 남으셨으니...

그러나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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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를 죽이는 사회

노동부에서 2006년도 산재현황을 발표했다. 총괄 현황을 살펴보면,

 

○ 재해자수는 89,911명, 재해율은 0.77%로 전년 대비 재해자수는 4,500명(5.3%)이 증가하였고, 재해율은 전년도와 같음 


○ 사망자수는 2,454명, 사망만인율은 2.10으로 전년 대비 사망자수는 △39명(△1.6%)이 감소하였고, 사망만인율도 △0.15P(△6.7%) 감소
    - 사고성 사망만인율은 1.14로 전년 1.26에 비해 △0.12P(△9.5%) 감소

 


총괄현황에서 볼 수 있듯이, 사망자수는 작년보다 1.6% 감소(이게 과연 감소라고 표현할 정도일까?)하였다고 하지만 전체 재해자수는 작년보다 증가하셨다. 각 사업장에서 보험처리를 회피하여 공상처리 등을 하는 것을 추정한다면 산업재해를 당하는 노동자들수는 가시적으로 추산되는 것이 10만명을 넘을 것이다.

 

게다가 우려스러운 것은 중소영세사업장의 노동자들의 산재비율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악화가 되어있음을 수치로나마도 확인할 수 있다.

 

○ 300인 미만 사업장의 재해자수는 80,833명으로 전체 재해자의 89.9%, 사망자수는 1,990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81.1% 차지 
- 50인 미만 사업장의 재해자수는 66,072명으로 전체 재해자의 73.5%, 사망자수는 1,401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57.1% 차지
- 50인 미만 사업장의 재해자수 비중은 전년(69.9%) 대비 3.6%P(5.2%) 증가

 

하종강 선생이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에 쓰셨듯이, 정말 '기업살인법'이라도 제정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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