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이야기를 듣다 A Winter Night Story
2000, 61min, 황윤, 다큐멘터리


   이 작품은 99년 12월부터 2000년 3월까지 4개월 동안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의 제작에 참여했던 스텝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기존에도 감독에 대한 오마쥬 혹은 작품 제작과정에 대한 후일담 성격의 소위 "영화에 대한 영화"들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 속에서의 카메라의 초점은 감독 혹은 배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화창작과정의 지난함 그리고 그 속에서 창작자인 감독의 고뇌를 보여주는 기존의 영화적 시선과는 달리 <겨울밤 이야기를 듣다>는 영화를 사랑해서 영화에 뛰어든 스텝들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소외되어버리는, 그런 그들의 거칠고 막막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카메라에 담아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충무로의 감독 위주 영화제작 시스템 그리고 상식조차 통하지 않는 스텝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노동환경과 처우에 대해 그들의 이야기 듣기를 시도한다.

   <겨울밤 이야기를 듣다>는 다큐의 일반적인 내러티브를 따르지 않는다.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적 상황을 점층적으로 나열하고, 그 과정에서 등장 인물의 시련 그리고 그것의 극복 혹은 극복의 가능성이나 시련의 의미 혹은 문제적 상황에 대한 평가로 구성되는 기존 다큐의 내러티브가 아니다(이 점은 황윤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작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투덜거리면서 인터뷰에 응하는 스텝의 성의 없는 답변에서 시작되어 하나 둘 그들의 이야기가 무게를 더 할 즈음에 <오! 수정>의 촬영이 끝나면서, 다큐는 뒷풀이의 어색한 회식 장면에서 그냥 끝을 맺고 마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해결될 수 있는 희망이나 대안조차 제시하지 않는다. <오! 수정> 이후에도 그들은 잡히지 않는 꿈으로, 무뎌져버린 관성으로, 혹은 어쩔 수 없는 생계의 방편으로 영화판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충무로 영화제작시스템의 문제자체에 대한 드러내기가 이 작품의 제작 의도였을까. 그러기에는 논리가 아닌 감성을 쫓는 인터뷰 구성이 어색하다. 영화의 중간중간 삽입되는 음악들도 너무 작위적이다.

   이 다큐의 주인공은 스텝들이다. 엔딩 크레딧에 깨알같은 글씨로 그나마도 확인이 어려운 그들의 존재감이 이 영화의 내용이며 주제이다. 나는 그런 스텝들의 영화 촬영 중의 작은 목소리 그 자체가 이 영화의 소재이자 주제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연출자는 그들의 목소리를 그들의 감정에 따라 조용히 쫓기만 한다. 이런 문제적 상황이 있고, 그러니까 이 상황은 이렇고, 이래야한다는 식의 일체의 해석을 접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 영화는 "이야기를 듣다"이다. "말하기"가 효과적인 상황이 있고, "듣기"가 효과적인 상황이 있다. 주체가 선명할 때에는 "말하기"가 주제 전달에 효과적일 수 있겠지만, 말하는 주체 스스로가 혼란의 과정에 있을 때, 그래서 그들이 한 목소리의 집단으로서 중요하기보다 하나 하나의 개인으로서의 경험이 더 우선시 될 때의 연출자의 선택은, "듣기"가 아닐까싶다.


   이 영화는 현장에서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감독과 무력함과 자괴감을 되씹는 스텝의 관계를 갈등의 축으로 삼으면서 감독의 목소리는 배제한 채(이 다큐에서 홍상수는 하나의 등장인물이기 보다는 문제적 상황, 조건 그 자체이다), 촬영 현장에서의 각 스텝들의 다양한 경험과 감정들을 나열한다. 그래서 결국 의사소통이 차단된 아이러니한 영화 촬영 과정의 상황들을(의사소통의 매체인 영화가 제작 과정에서는 의사소통이 불능해지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관객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기는 것이다.
영화 현장의 스텝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말했다라는 것 그리고 또 다른 영화가 그것을 듣는다는 것, 현명한 것인지 게으른 것인지 감독은 더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그리고(아니 그래서!) 관객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찌뿌등하게 영화를 곱씹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구조가 썩 마음에 든다. 영화가 오래 오래 마음에 남고, 머리 속에서 굴러다닌다. <겨울밤 이야기를 듣다>의 가장 큰 미덕이자 장점은 바로 이 사려깊게 "듣고"자하는 마음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족)
1. 영화모임을 하며 "영화사랑은 노가다이다" 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스텝들을 보면 이 말조차도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스텝들 절라 고생한다.

2. 이 작품을 보고 나면 영화들의 엔딩 크레딧이 예사롭게 보이질 않는다. 이제는 '보는 이'의 권리로서만이 아니라, '만든 이'의 권리, 공동노동작업인 영화의 스텝의 권리라는 의미까지 생각해보게 된다. 엔딩 크레딧 사수!

3. 서울 광화문역에서 내려 5번 출구로 나가면 일민미술관이라는 건물이 있다. 그곳 4층에 다큐멘터리 아카이브가 있는데, 사실 아카이브라고 하기에는 자료나 상영시설이 부실하긴 하지만 그래도 국내 독립다큐들은 제법 구비되어 있는 편이다. 평일 오후 6시까지 개방되며 대출은 안 되고, 사용료는 없다.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들려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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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4 15:49 2005/08/0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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