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콩님의 [볼때마다....] 에 관련된 글.

 

신기하다. 나도 파레트 해체하는 작업 하면서 옛날 우리집 생각 났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사를 했다. 우리 가족들에게는 그냥 이사가 아니어서

이사 전과 이사한 바로 그 날의 장면 장면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전에는 서울 길동이라는 동네에 살았다. 아빠가 하시던 장사가 잘 돼서 제법 잘 살았었는데

장사가 망했다. 다들 그렇겠지만 망한다는 게 교통사고처럼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1~2년에 거쳐 차근차근 기울고, 그 기울기를 어떻게든 끌어올리려고 혹은 버텨내려고 무리수를

두면서 더 기울어져 가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처럼 변해가는 엄마 아빠,  눈총이 느껴지는 친척들

그리고 삭막해지는 이웃들의 태도와 시선... 에 위축되고 불안했던 몇 년이었다.

결국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는 상황까지 되자 말 그대로 야반도주.

학교에서 수업 중이었는데 선생님이 부르셔서 교무실로 갔더니 엄마가 와 계셨고,

엄마 따라서그 날로 대전 외갓집으로 갔다.  살던 집에 내가 아끼던 유럽풍의 간이책상이 있었는데

그걸 챙기지 못하고 그냥 가야 하는 게 이상하고, 아쉬웠고... 그랬던 게 기억난다.

 

그렇게 외갓집에 갔다. 외갓집 살림도 좋지 않아서 단칸방에 엄마와 나, 동생

그리고 외할머니와 고등학교에 다니던 외삼촌이 함께 지냈다.

TV에 전에 보던 뉴스와는 다른 촌스러운 느낌의 지방 방송이 나와서 이상했던 기억,

전에는 재밌고 멋있었던 외삼촌이었는데 자꾸 화를 내고 짜증을 내서 미웠던 기억,

집 밖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이 너무 무서웠던 기억,

학교를 가지 않아 너무 너무 심심해서 동생이랑 둘이 매일 근처에 있던 초등학교에 가서

엄마에게 받은 50원으로 쥐포 사서 나눠 먹으며 학교 담벼락 근처에 쭈그리고 앉아서

등교하는 아이들 구경하던 기억, 이 난다.

 

그리고 몇 달 후, 엄마가 나를 옥천에 있는 이모 집에 맡긴다고 하셔서 이모집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갔었고 거기 선생님한테 인사도 했었던 거 같다. 이제 학교에 다닐 수 있으니 심심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랑 갑자기 나에게 잘 해주시는 엄마가 이상하면서도 되게 불쌍하다고 생각했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다시 대전으로 와서 몇 달 후(옥천에 갔을 때는 춥지 않았는데 그 날은 겨울이었다)

외갓집에 있는데 엄마가 나가자고 해서 동생과 짐을 챙겨 나왔고, 대전역으로 갔더니 아빠가 계셨다.

대전역사에 있던 크리스마스 트리가 생각난다. 그날이 12월 25일이었다.

이제 같이 산다고 방도 구했다고 거기로 가는 거라고 해서 밤 기차를 타고 수원역으로 갔다.

다시 버스를 타고 시골 동네에 내리더니 한 참을 걷는 거라. 걸으면서 계속 기도했다.

제발 지금 살 집에는 화장실이 집 안에 있기를, 재래식 화장실이 아니기를. 생생히 기억이 난다.

 

비포장 길을 한 참 걷다가 도착한 집에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어렸을 때는 냄새에 민감했었는지 깜깜해서 뭐가 있는지 안 보였지만 냄새 때문에 토할 거 같았던

토하면 혼날 거 같아서 꾹 참았던 기억이 나고, 다음 날 거기에 외양간이 있던 거에 그리고

외양간에 있는 소를 보고 엄청 놀랐던 기억이 난다. 살아있는 소를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 집은 화장실이 없었다. 우리가 살 곳은 방. 정말 딱 방만 있었다.

화장실은 여러 집이 함께 쓰는 공동화장실, 재래식이었다. 화장실이 너무 무서워서

특히 밤에는 더 무서워서 그 집에서 이사 나가기 전까지 6시 이후에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엄마가 그런 나를 보고 독한 년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부엌도 없고, 수도도 없고 그런 집이어서 그 옆, 주인집에서 쓴 물이 집 밖으로 배수되는 ...

그런 걸 시궁창이라고 하나? 무튼 수도관은 아니고 물이 흐르는 공간에 아빠가 벽돌을 놓고  

그 위에 우리가 공사하면서 주워오고 해체했던 파레트를 얹고 처마에 나무를 대고 비닐을 씌워

비를 막을 수 있게 했고, 그 공간을 부엌처럼 썼었다. 수도도 없고 냉장고도 없고

가스렌지와 그릇과 음식을 보관하는 찬장만 있었던 부엌.

주인집 수도에서 물을 받아서 거기서 밥도 지어 먹고, 세수도 하고 그랬었던 기억이 난다.

평평하지 않았던 곳에 파레트를 얹어서인지 밟으면 삐걱 소리가 나며 약간 기우뚱해지던

그 소리랑 발 아래 느낌이 신기하게도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 집에도 금방 적응이 되고, 그렇게 부엌을 사용하던 게 못 견딜 정도로 불편하진 않았던 거 같다.

안산에 대규모 매립 공사가 진행되면서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 가족들이 모여 살던

동네여서 살림들도 비슷비슷했고,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게 부끄럽거나 이상하지도 않았다.

물론 살림을 하는 엄마는 달랐을 거다. 손 빨래를 해 본 적 없던 엄마가 빨래를 하셨고,

손목이 아프다고 힘들어 하시던 그래서 큰 빨래들은 아빠가 챙겨서 일하시던 공사 현장으로 가져가

그곳에 있던 세탁기로 해 오셨다. 냄새에도 민감하고 비위도 약했던 나도 어느새 무던해져서

아빠가 일하시던 공사현장에 있던 공동식당에서 가끔 먹다 남은 음식들을 챙겨오시면

선물을 받은 거처럼 좋아라하면서 비닐봉지를 받아 부엌으로 가서 냄비에 데펴 먹고 그랬었다.

그 때 제일 좋아했던 메뉴는 돼지고기가 들어간 김치찌개. 오~ 신기하게 그런 것도 기억이 난다.

 

공룡 공사를 하면서, 파레트를 다듬으면서 옛날 집 생각이 났다.

여름에 냄새 나고, 겨울에 추운 그래서 여름 겨울이면 싫었던 부엌, 

그래서 바닥도 벽도 천정도 평평하고 반듯한 곳에서 살고 싶었는데.

지금은 이런 번듯한 공간에서 그 때의 그 파레트를 가지고 일터를 만들면서 재밌게 공사를 하다니~

좋다.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옛날 집 생각 나는 것도 신기하고,

그리고 엄청 커 버린 아니 늙어 버린;;; 나도 신기하고,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 보면 더 신기하고 ㅎㅎㅎ

마치 지금 이 순간이 꿈이고, 후드득 잠이 깨면 옛날 그 집에서의 11살의 내가

'어머... 되게 이상한 꿈도 다 있네..."하면서 툭툭 일어날 것만 같은 그런 기분...

잠시지만 공사 끝나고 봉명동 사무실에 들려, 거기서 집까지 걸어가다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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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1 14:14 2010/04/01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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