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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타마 야키토리가게 이야기>, 조선학교 지킨 이들에게 바치는 오마주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8/02/15 12:26
  • 수정일
    2018/02/15 12:2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재일동포사 최초 동포가극 제작
  • 이철주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18.02.14 14:47
  • 댓글 1
▲ 지난달 28일 사이타마예술극장에서 재일 동포가극 <사이타마 야키토리가게 이야기>가 성황리에 무대에 올랐다.[사진제공 : 김도형]

지난달 28일 사이타마예술극장에서는 북측의 가극 양식을 바탕으로 제작된 동포가극 <사이타마 야키토리가게 이야기>가 초연되었다. 북측의 혁명가극을 전습 받은 이래 민족가극을 제작한 경험이 있지만 벌써 십수 년 전 얘기고, 더욱이 중앙도 아닌 지역의 동포사회에서 자체로 창작하고 발표한 최초의 사례여서 의의가 대단히 큰 작품이었다.

제작 전부터 화제였던 작품인 만큼 동포사회의 관심은 뜨거웠다. 800여 좌석은 사전 예약이 끝난 상태였고, 입석까지 메운 1000여 명이 관람을 했다. 본 공연 외에도 지역의 요구가 강해서 관통(리허설)은 조선학교 학생들과 조청 일꾼 등의 단체관람으로 사전 공연해야 할 정도. 눈물과 박수가 이어지며 공연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사이타마조선초중급학교 응원을 겸해 진행된 이번 공연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듯 총련중앙 배익주 부의장, 김성훈 선전문화국장, 송근학 교육국장, 서충언 국제통일국장, 총련사이타마현본부 신민호 위원장, 총련도꾜도본부 조일연 위원장, 조선신보사 박구호 사장, 문예동중앙 김정수 위원장과 문예동 각 지부 위원장들, 조청중앙 김용주 위원장 등 지도급 인사들도 대거 관람을 했다.

▲ <사이타마 야키토리가게 이야기> 공연을 보기 위해 줄 서있는 관람객들.[사진제공 : 김도형]

이번 공연은 제작 과정부터 본받을 만했다. 대본부터 작사, 작곡, 연출, 지휘, 안무, 무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동포들의 순수한 창작열과 조선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강한 열망이 모여 이뤄졌다. 3년간의 준비를 거쳐 무대에 오른 가극의 출연자수는 애호가부터 전문가를 망라해 10살부터 71살까지 130여 명에 달했다. 사이타마조선초중급학교 예술소조 출신을 주축으로, 특히 출연과 연주 등에 재학생이 포함돼 의의를 더 높였다.

“사이타마에서는 2006년 문화예술 애호가의 모임인 <얼싸>를 조직해 2년에 한 번씩 공연을 개최했는데, 이번 동포가극은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실재하는 야키토리가게의 이야기를 소재로 해서 동포의 이야기를 담은 가극을 만들자는 기획이 쉽지는 않았지만, 어려운 현실 속에 있는 동포사회에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모두가 한마음으로 성사시킬 수 있었습니다.” 주홍문(63) 공연실행위원장이 밝힌 심경이다.

작품의 무대는 1990년대 후반의 사이타마현 히가시마쯔야마시(東松山市). 단골손님들로 흥성거리는 야키토리가게 ‘옹헤야’에는 사이타마초중 1학년생이 된 영희가 있다. 여주인인 봉순은 일찍 남편을 여의고 시아버지와 함께 가게를 경영하면서 어린 영희를 키우고 있다. 영희가 학교까지 통학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2시간. 어느 날 함께 등교하던 중학생 언니가 통학길에 치마저고리를 찢기는 사건이 발생하자 겁먹은 영희는 통학길이 무서워서 학교에 가기 싫다고 눈물을 흘린다. 그러자 동포 언니와 오빠들이 서로 영희의 통학길을 지켜주겠다고 나서고 동포사회의 관심과 애정 속에서 영희도 다시금 학교생활에 적응해 결국 무사히 졸업을 마치고 평소의 목표였던 민족학교의 교원이 된다는 줄거리다.

▲ <사이타마 야키토리가게 이야기> 공연의 한 장면.[사진제공 : 김도형]
▲ <사이타마 야키토리가게 이야기> 공연의 한 장면.[사진제공 : 김도형]

너무나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모든 드라마가 그러하듯 그 주제와 메시지가 너무나 선명해 더 공감할 수 있었다. 이는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노래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말을 가르치고 민족혼을 지키자는 일념에 먼 통학길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을 소재로 한 ‘버스를 타고 전차를 타고’의 노래가 그러하고, ‘우리를 보시라’는 당당하게 조선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심정을 들려주고 있다.

“그 언제나 나를 보는 눈길들/ 내가 서는 자리마저 하나 없듯이/ 마음을 숨기고 발자취를 감추고/ 세상에는 저 혼자라 알아왔네/ 단 하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동무들이/ 나를 나를 이루어주고/ 두 팔 크게 벌려 여기 오라고/ 안아주는 나의 학교/ (후렴) 우리를 보시라/ 그 어디 부럼 있으려/ 마음껏 살아가는 이 행복 넘치네/ 아침 해빛이 아름답고 고은/ 그 모습만 그려 살리라.... 굽이굽이 돌아드는 이 길을 함께 가니/ 푸른 하늘이 열리여 있네/ 조선옷 입고서 얼굴 바로 들고서/ 날마다 학교가는 이 기쁨아/ 불리우는 이름을 몰랐었네/ 자란 곳이 다른 줄을 몰랐었네/ 더는 헤매지 말고 웃어보라고/ 안아주는 우리학교 ”

어려운 조건에서도 아이를 조선학교에 보내는 어른의 심정은, 학부모이기도 한 재일동포 강명숙 시인의 시에 곡을 붙여 널리 알려진 “조선의 꽃으로 너를 피우리”에서 고스란히 들려주고 있다.

“어린 딸아 언제면 네가 아는 지/ 멀리멀리 기숙사로 보내는 이 마음/ 아침마다 너의 머리 빗어주지 못해도/ 저녁마다 숙제공부 보아주지 못해도/ 내 작은 가슴에 민족의 넋을 심어/ 조선의 꽃으로 피우리 / 너를 피우리”

구성은 서장 서곡으로 시작해, 제1장 동포사회의 모임 장소인 야키토리가게와 구성원들을 소개하는 ‘오아시스’, 제2장 빨간 란도셀을 메고 등교하는 영희를 그린 ‘머나먼 통학길’, 제3장 백색테러 등이 횡횡하는 현실을 다룬 이역의 ‘칼바람’, 제4장 서로서로 통학길을 같이 하겠다며 동포애를 나눈 ‘온기’, 제5장은 조선학교 학예회를 배경으로 재일조선인 공동체를 보여준 ‘해살아래’, 그리고 영희가 성장한 20년 후를 다룬 ‘종장’으로 이뤄졌다.

“동포 어른들이 세우고 지켜준 우리학교를 지켜가겠다는 마음,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생활은 불편해도 여전히 ‘조선적’을 유지하며 통일된 한반도로 돌아가겠다는 마음, 바로 그 신념으로 캐릭터에 집중했습니다.” 주인공으로 열연한 가수 렴민화의 얘기처럼, 이 작품의 일관된 주장은 분명했다. 그것은 김정수 문예동위원장이 작시(作詩)하고 최성학이 곡을 붙인 ‘이어갈 한마음’에 그대로 녹아 있다.

“사이타마 동포동네 자랑도 많아/ 지부마다 분회마다 노래소리 울리네/ 애국일세 발자취가 곳곳마다 빛나니/ 그 마음 이어가며 한맘으로 살아가네/ 사랑하자 이어가자 다같은 마음으로/ 아 찌찌부 산발들도 감격하며 설레네.... 세월이 날과 달을 우리조국 우러러/ 손과 손을 굳게 잡아 시련을 이겨왔네/ 아이들의 밝은 미래 통일조국 앞당기리/ 그 마음 이어가며 한맘으로 살아가네/ 사랑하자 이어가자 다같은 마음으로/ 아 아라까와 강물도 감격하며 설레네”

재일에서 가극은 남다른 인연이 있다. 1973년 당시 재일중앙예술단이 평양을 방문해 북측의 각별한 배려로 남포예술극장에서 혁명가극 ‘금강산의 노래’를 전습 받았다. 같은해 6월27일 평양대극장에서 절찬리에 공연을 마치고, 그 결과 중앙예술단은 현재의 북측 유일의 국립해외예술단인 금강산가극단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 <사이타마 야키토리가게 이야기> 공연의 한 장면.[사진제공 : 김도형]
▲ <사이타마 야키토리가게 이야기> 공연의 한 장면.[사진제공 : 김도형]

1973년 7월30일부터 9월17일까지 열린 만수대예술단의 일본 순회공연에서 친견한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에 대한 감동은, 금강산가극단의 1974년 9월 가극 “금강산의 노래”(동경 아사쿠사국제극장) 피로(개최)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후 1981년 “한길을 따라”와 서승 형제의 이야기를 다루어 크게 호평을 받은 “어머니의 소원” 제작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북측 예술을 계승 발전시켜온 재일사회는 민족학교의 정연한 체계 속에서 민족혼을 지키는 수단으로 민족예술소조 활동을 강화한 결과, 예술을 체계화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훌륭한 무대예술인들과 애호가들의 인력풀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전통과 역사가 남아 오늘의 동포가극이 가능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주연배우의 등장이었다. 재일 최고의 민요가수 중 한명인 렴민화의 열창은 탄탄한 성악적 기초와 진솔한 연기로 객석을 압도했고, 자신의 삶을 투영한 어머니의 캐릭터는 자연스럽게 관객과 교감을 이뤘다.

등장 그 자체로도 가슴 뭉클했던 것은 금강산가극단을 퇴단한 황기렬 공훈배우의 오랜만의 출연이었다. 1970년 학생경연대회 독창부문 1위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낸 황기렬 배우는 피바다가극단의 신원철 선생과 평양음악무용대학의 김영철, 장명숙 교수에게 사사를 받아 바리톤 성악가로 이름을 날렸을 뿐 아니라 1983년 가극 ‘어머니의 소원’에서 주인공을 맡아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노래와 연기 외에도 호남형의 잘생긴 외모로 북측의 예술영화에도 다수 출연해 인기가 높았다. 1995년 1월 가수생활 20주년을 기념한 황기열리사이틀 “조선가요의 저녁”을 개최하기도 했다.

한편 이 가극의 실재 모델이 된 야키토리가게의 배정희 여사도 공연장을 찾았다. “나는 초급부 2학년부터 사이타마조선초중급학교에 다녔고 조선대학교까지 졸업했다. 조선에서 건너온 아버지는 매대(屋台)부터 시작해서 야키토리가게 하나로 나를 키웠다. 아버지는 일찍 가셨지만 나도 아이도 손자들도 모두 야키토리가게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3대에 걸쳐 히가시마쯔야마에서 1시간 반 넘게 걸리는 우리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 <사이타마 야키토리가게 이야기> 공연 음악연주 장면.[사진제공 : 김도형]
▲ <사이타마 야키토리가게 이야기> 공연의 한 장면.[사진제공 : 김도형]

재일 1세들의 일본 생활은 차별과 혐한의 험지에서의 고전분투이자 생존의 처절한 기록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상징하는 게 바로 ‘호루몬’과 ‘야키토리’이다. 오사카에서 발달한 ‘호루몬’ 즉 곱창은 일본인이 버리던 내장이었고, 이 가극에 등장하는 야키도리는 사실 닭꼬치가 아니라 돼지머리 꼬치로 역시 일본인이 회피하던 부위였다. 그럼에도 동포들은 자존심을 굽히지 않아 ‘야키돈’이 아니라 ‘야키토리’라 굳이 명명하며 가게를 열렸고, 예의 그 강한 생명력으로 민족학교를 기반으로 재일조선인 대가족을 일궈 민족교육과 민족예술을 지켜온 것이다. 바로 그 7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이 가극에 담아, “나는 조선사람이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래서 사이타마동포들이 자발적으로 제작한 <야키토리가게 이야기>는 민족교육과 조선학교를 지켜온 모든 재일조선인들에게 바치는 ‘오마주’인 것이다.

이철주 편집기획위원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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