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자 색출도 철저하지 못했다. 전쟁 상대국은 물론 아시아 지역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잔악한 범죄를 저지른 숱한 전범에게 형사 책임마저 묻지 않았다. 대표적 사례가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관동군 방역급수부본부) 책임자 이시이 시로가 밀실 교섭을 통해 관련 자료를 미국에 넘기는 대신 재판 직전에 석방된 것이다.
만주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기시 노부스케도 전범 혐의로 체포됐으나 기소되지 않고 공직 추방 조치만 받았다. 일본이 점령지에서 약탈한 보물과 국가기밀 정보를 넘기는 조건으로 풀려났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조부로 자민당 초대 간사장을 거쳐 외무성 장관과 총리 등을 역임했다.
연합국은 한반도에서 전범 재판을 열지 않았다. 만일 서울에서도 국제군사재판이 열려 일제 군국주의 주범들과 협력자들을 단죄했다면 한국에서 친일파가 득세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국은 도쿄재판에도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중국도 국공내전을 치르느라 경황이 없어 전범 색출과 단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중국 측 검사와 증인들은 증거재판주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전범들이 꼼짝하지 못할 증거를 들이대기보다는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다”며 울분을 터뜨리는 것으로 일관했다.
교수형 당한 전범 7명 유골 빼돌린 뒤 무덤 조성
재판 후속 조치도 미흡했다. 독일은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열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정신을 잇고자 특별법을 제정해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처단 의지를 분명히 했다. 형법 86조와 130조에도 각각 나치 상징물이나 표지 유포, 나치 찬양과 홀로코스트 부정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규정을 담았다.
반면 일본은 헌법 9조에 전쟁 포기 선언을 담은 것 말고는 이렇다 할 후속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전범 용의자 대부분이 정계, 관계, 재계 등에 복귀해 전후 일본 재건의 주역으로 나섰다. 심지어 처형된 전범들을 추앙하는 분위기까지 생겨났다.
미국은 교수형에 처해진 7명이 숭배의 대상이 되면 군국주의 부활의 불씨가 될지 모른다고 우려해 시신을 화장한 뒤 비행기로 뼛가루를 태평양에 뿌렸다. 그러나 그 뼛가루는 처형자들의 유골이 아니었고 실제 유해는 재판에 참여한 한 변호사가 수거해 시즈오카현 절간의 불상 밑에 보관했다는 사실이 1958년 밝혀졌다. 그는 미군이 수거해가고 남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화장장 직원을 매수해 빼돌렸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우익들은 이를 1960년 8월 아이치현 니시오시 산가네산에 묻었다. 묘비 ‘순국칠사묘(殉国七士墓)’와 사당 이름 ‘순국칠사묘(殉国七士廟)’ 글씨는 총리 재임 시절의 기시 노부스케가 썼다. 1869년 전몰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도쿄의 야스쿠니신사는 1978년 10월 17일 이들 7명과 함께 옥사한 전범 7명을 더해 14명의 위패를 모셨다. 이때부터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거나 공물을 보내는 것은 전범 추모 행위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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