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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의 기록, 철책보다 더 무서운 게 먹고 사는 일이었다

[프레시안 books] 김녕만의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
2018.09.28 21:45:39
 

 

 

 

"처음엔 판문점과 비무장지대만 분단의 현장이라고 생각했다. 늘 철책 너머 그 안쪽으로만 골몰했던 시선을 돌리자 접경지역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철책 바로 아래까지 농작물을 심고 하루종일 멈추지 않는 대북 대남방송의 웅성거림 속에서 삶을 영위해가는 사람들을 접했을 때 아찔한 전율이 왔다. "이것이 삶이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계속되는 것이로구나." 지뢰 팻말이 매달린 철책 옆에서 고추모종을 하는 농민, 풍년을 꿈꾸며 모내기를 하고 있는 농민, 논을 갈아엎는 이양기 뒤를 따라가며 뒤집어진 땅 속에서 기어 나온 벌레를 잡아먹는 백로와 왜가리, 저어새...
 
철책보다 더 무서운 것이 먹고 사는 일이었다." 
 
(김녕만 사진집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 中) 
 

▲김녕만 사진집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SF 영화에 나오는 판타지로 생각할 것 같다" 6월 12일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 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 말이다. 김 위원장 스스로 자신이 처한 현실을 '판타지'로 느꼈다.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판문점 도보다리 산책을 하고 배석자도, 통역도 없는 회담을 진행했을 때 많은 이들이 "초현실적 광경"이라고 평했다. 보고도 믿지 못할 풍경들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초현실적 판타지. 전쟁과 분단, 단단하게 구축된 비정한 현실의 논리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인식에 던져진 파장은 컸다. 한반도에 정말 평화가 오는 것일까.  
 
우리 땅에는 초현실적인 곳이 많다. DMZ(비무장지대)와 판문점이 대표적인 곳이다. 5000년을 오갔던 땅이지만 65년간 방치된 곳이다. 지금은 따로 없지만, 예전엔 '판문점 출입기자'가 있었다. 그렇다고 판문점에 상주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남북정상회담이 생중계되고 수많은 미디어가 실시간으로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시대가 아니던 때에는 제한된 미디어만 그 긴장의 집을 드나들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1983년~85년, 1988년~94년 판문점 출입기자를 지낸 사진 작가 김녕만의 사진집 <분단의 현장 판문점과 DMZ>(도서출판 윤진, 2018년 7월)은 판문점과 DMZ, NLL(북방한계선) 등 분단 현장의 기록이다. 김녕만은 1980년 광주를 기록했고, 냉전 말기 베트남을 찾아 전쟁의 상흔을 기록했으며, 한반도 분단의 현장에 천착해 왔다. 사진기자로서, 사진 작가로서 아시아 냉전의 시대와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해온 셈이다. 
 
4.27판문점 선언 이후 판문점이 평화의 상징으로  탈바꿈한 것은 대사건이다. 공간이 주는 진정한 힘은, 그 공간 자체가 아니라, 그 공간이 우리에게 어떠한 기억으로 남을 때다. 김녕만은 판문점을 "80년대와 90년대에도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남북 스포츠 교류, 북한의 수해물자 전달 등 대화의 기조가 이어지다가도, 금세 상황이 급변하면 긴장이 감도는 분위기로 반전되는 일이 수없이 반복"되던 곳으로 기억한다. 도끼날이 오가기도, 평화의 사절이 오가기도 하던 곳이 그곳이었다.  
 
두려움과 슬픔, 희망이 뒤섞인 그 공간에서 저널리스트들은 고군분투했다. 1992년 2월 평양에서 열리는 제 6차 남북 고위급 회담을 위해 판문점에서 북측 지역으로 가던 남북의 장교가 전날 눈이 내려 미끄러운 내리막길에서 빙판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반사적으로 손을 잡은 짧은 순간을 포착해낸 사진은 깊은 울림을 갖는다. 긴장감을 그대로 전해야 할 의무 속에서도 '한국'의 저널리스트들은 그렇게 애태우며 작은 희망을 기록해 왔다.   
 

▲도서출판 윤진 제공 ⓒ김녕만

김녕만의 분단 기록은 2000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983년부터 2000년 이전까지는 사진기자의 신분으로 판문점과 비무장지대의 '안'을 취재했고, 2000년 이후부터는 신문사를 퇴직하고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의 작업으로 비무장지대와 접경지역의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철원에는 분단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생창리 용양보는 참으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DMZ 철책선이 북진하는 바람에 지금은 제한적으로 민간인도 들어갈 수 있게 된 용양보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이 마치 태고적 풍경처럼 정갈하고 신비롭다. 왕버드나무가 군락을 이룬 물가로 각종 새들이 날고 부서진 출렁다리 목책에는 가마우지가 나란히 줄지어 앉아 사람들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그 뒤로 멀리 높은 산봉우리에 북한군  초소가 작은 점으로 보인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그곳에 고요히 서면 분단의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미래의 우리 후손들이 분단의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고 기억할 것인지 아득해진다."  
 
"강화도에서 더 서쪽 교동도에는 엄마 손을 잡고 바다 건너 황해도 연백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고향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엄마를 따라온 한 소년은 어른이 되어 시장골목에 이발소를 차렸고 백발이 되도록 그 자리에서 그대로 이발사로 늙어가고 있다." 
 
김녕만의 '분단의 현장'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다. DMZ은 철책, 경계선 그 자체만이 아니다. 지뢰 표지판을 등지고 땅을 가는 농부의 삶이고, 정갈한 늪 속에서 헤험치는 노루의 삶이며, 남측을 노려보는 이름 모를 북한 병사의 삶이기도 하다. 사진 속에는 '선'이 없다. '선'이 있을 것이라 상상한 곳에 세워진 철책만 있다. 분단선 근처의 풍경 사진을 보다 보면 경계선이란 건 마음속에 있어서 단단한 것이지, 물리적 철책 자체로 단단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 마음 속 분단을 허무는 작업들이 지금 한반도 주변에서 진행중이다. 김녕만의 사진들이 판타지같으면서 판타지같지 않은 이유다.  
 

▲도서출판 윤진 제공 ⓒ김녕만

▲도서출판 윤진 제공 ⓒ김녕만

▲도서출판 윤진 제공 ⓒ김녕만

▲도서출판 윤진 제공 ⓒ김녕만

 

박세열 기자 ilys123@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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