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아베는 평화주의자 할아버지를 말하지 않는다

등록 :2018-09-29 09:24수정 :2018-09-29 09:44

 

 

아베 신조가 선택한 길
가운데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왼쪽이 그의 할아버지 아베 간, 오른쪽이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그래픽 이정윤 기자 bbool@hani.co.kr
가운데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왼쪽이 그의 할아버지 아베 간, 오른쪽이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그래픽 이정윤 기자 bbool@hani.co.kr
▶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20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3연임에 성공해, 2021년 9월까지 총리직을 맡을 수 있게 됐다. 아베는 전쟁 금지와 군대 보유 금지를 명확히 한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일본을 바꾸려 하고 있다. 개헌은 아베가 존경하는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가 이루지 못한 숙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친할아버지인 아베 간은 일본 군국주의에 맞선 평화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아버지 아베 신타로도 평화헌법을 옹호했다. 아베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바람에 어긋나는 길을 선택했다. 아베는 왜, 어떻게 우익의 길을 걸었을까.

 

64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지난 20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큰 선물을 받았다. “필생의 과업”(lifework)을 수행할 기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시게루(61) 전 자민당 간사장을 꺾고 3연임에 성공했다. 내각책임제인 일본은 다수당 총재가 총리를 맡는다. 아베는 2021년 9월까지 총리직을 맡을 수 있다. 1차 내각(2006년 9월~2007년 9월), 2·3차 내각(2012년 12월~현재)에 이어 앞으로의 임기(3년)까지 더하면 10년 동안 집권하는 일본 역대 최장기 총리가 된다.

 

아베는 당선 뒤 인사말에서 “드디어 여러분과 함께 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자민당의 개헌안을 가을 임시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말해왔다. 아베는 2013년 <엔에이치케이>(NHK)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헌법 개정은 내 라이프워크다. 국민투표법은 만들었지만 개헌까지는 이루지 못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정치가가 됐는지 생각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베는 2020년까지 개헌을 끝내고 싶어 한다.

 

헌법 개정을 놓고 일본 정치세력들의 투쟁이 조만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겪은 한국과 중국 등은 불안한 눈으로 이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아베는 지난해 5월 헌법 시행 70주년 연설에서 “헌법 9조 1항, 2항을 그대로 둔 채 자위대를 명문으로 써넣는 것에 대해선 국민적 토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9조 1항은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초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에 해당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그 행사를 국제분쟁의 해결수단으로 영원히 포기한다”, 2항은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과 그밖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전쟁과 군대 보유를 금지하는 내용이다. 이를 수정할 경우 거센 비판과 반발이 불어닥칠 것이 뻔하다. 아베는 ‘우회로’를 택했다.

 

자민당이 지난 3월 낸 시안은 ‘9조의 2’를 신설해, 9조의 2-1항을 “전조의 규정은 우리나라의 평화와 독립을 지켜 나라와 국민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자위의 조치를 갖는 것을 막지 않으며, 이를 위해 실력조직으로서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내각의 수장에 해당하는 내각총리대신을 최고 지휘감독자로 한 자위대를 보유한다”, 9조의 2-2항 “자위대의 행동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회의 승인, 그밖의 통제에 따른다”고 규정하자고 했다. ‘군대’나 ‘전력’이라는 말을 쓸 수 없으니 ‘실력조직’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자위대를 헌법에 명시해 군대를 보유하겠다는 얘기다.

 

 

아베가 가지 않은 길

 

아베는 2013년 9월 미국의 한 보수적인 싱크탱크에서 연설하며 “나를 ‘우익 군국주의자’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도 괜찮다”고 말했다. ‘우익 군국주의자’의 길이 아베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니었다. 오늘의 그를 있게 한 뿌리를 살펴보면 다른 길도 있었다.

 

아베는 할아버지·아버지로부터 선거구(시모노세키가 포함된 야마구치 4구)를 물려받은 3대 세습의원이다. 부모, 장인·장모(시아버지·시어머니), 조부모 또는 3촌 이내의 친척 가운데 국회의원이 있고, 이들의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된 이를 세습의원이라고 한다.

 

기시 노부스케(앞줄 가운데) 전 일본 총리가 손자인 아베 신조를 무릎에 앉히고 가족사진을 찍었다. 앞줄 맨 오른쪽이 신조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 뒷줄 오른쪽에 서 있는 여성이 어머니 요코, 그리고 앞줄 맨 왼쪽이 형 히로노부다. 일본 총리관저 제공
기시 노부스케(앞줄 가운데) 전 일본 총리가 손자인 아베 신조를 무릎에 앉히고 가족사진을 찍었다. 앞줄 맨 오른쪽이 신조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 뒷줄 오른쪽에 서 있는 여성이 어머니 요코, 그리고 앞줄 맨 왼쪽이 형 히로노부다. 일본 총리관저 제공
아베는 할아버지 때부터 닦아놓은 지역구를 물려받고 있지만, 할아버지 아베 간(1894~1946)을 언급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간은 신조가 태어나기 전에 숨졌다. 그러나 신조는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고 있다. “내 친할아버지는 아베 간이라는 분이다. 익찬선거라는 것에 반대해 익찬회가 아닌 비익찬회로서 당선된 매우 드문 의원이었고, 반 도조 (히데키) 정권이라는 입장을 일관되게 지켜온 의원이기도 했다.”

 

‘익찬선거’는 1942년 4월 치러진 중의원 선거를 말한다. 일본은 19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며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시작했다. 도조 히데키(1884~1948, A급 전범으로 기소돼 교수형) 내각은 전쟁 수행을 위해 ‘익찬정치체제협의회’를 만들어 군부의 정책에 협력하는 이들만 중의원 후보에 추천했다. 앞서 1940년 모든 정당이 해산되고 관제 국민통제조직인 ‘대정익찬회’가 만들어졌다. 협의회는 ‘대동아공영권 확립’이라는 이념에 불타는 인물 등을 후보로 추천했다. 비추천 후보들은 경찰의 탄압을 받았다. 아베 간은 도조 내각과 전쟁에 반대한 평화주의자였다. 협의회 추천 후보 466명 가운데 381명이 당선했고, 비추천 후보는 613명이나 됐으나 당선자는 85명에 그쳤다. 간은 중의원에 재선됐다.

 

야마구치현 오쓰군 헤키초(현재 나가토시)에서 태어난 간의 집안은 대대로 간장 등을 만드는 양조업을 하고, 논밭과 산림을 많이 소유한 지주였다. 간은 도쿄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정치자금을 만들기 위해’ 도쿄에서 자전거를 만들어 파는 상회를 설립했다. 이웃마을 유력가문의 시즈코와 1921년 결혼했지만 1924년 이혼하고 갓 태어난 아들 아베 신타로(1924~1991)를 안고 귀향했다. 이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주민들이 찾아와 촌장을 맡아달라고 간청했을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그는 1937년 4월 무소속으로 중의원에 처음 당선됐다.

 

 

할아버지의 반전·평화·친노동

 

이때 간의 선거 공보물에는 “이번 총선거는 시대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각오를 묻는 중대한 총선거” “국제 정세가 극도로 긴박해 2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잉태하고 있는 상태” “해가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져… 아무리 일을 해도 생활의 안정을 얻을 수 없는 노동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등의 문구가 담겨 있다. 또 “국민의 이익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재벌 특권계급의 앞잡이가 되고 있다”고 기존 정당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신흥정당”을 만들고 싶다며 군부와 선을 그었다.

 

1961년 11월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가운데)가 총리관저 만찬회에서 기시 노부스케(왼쪽) 등을 만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61년 11월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가운데)가 총리관저 만찬회에서 기시 노부스케(왼쪽) 등을 만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간은 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 전 건강이 악화해 고향으로 돌아가 병상에 누웠다. 뜻을 채 펴보지도 못하고 1946년 1월 숨졌다. 아들 신타로는 당시 나이가 되지 않아 피선거권이 없었다. 1946년 4월 선거를 앞두고 ‘원 포인트’ 후계자가 필요했다. 친척인 의사 기무라 요시오가 낙점됐다. 기무라는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 중의원에 만들어진 제국헌법개정안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해 평화헌법 제정에 기여했다. 간의 후계자로서 그의 뜻을 이어받은 것이다.

 

간이 병상에 있던 1945년 봄, 아들 신타로가 찾아왔다. 신타로는 도쿄대 법학부 진학이 결정됐으나, 학교에는 가지 못하고 1944년 10월 해군 시가항공대에 징병됐다. 그리고 자살공격을 뜻하는 ‘특공’에 지원했다. 군대에서는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오라고 했다. 간은 아들에게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다. 쓸데없이 죽거나 하진 말거라”라고 당부했다. 신타로는 7월 특공훈련을 받고 출격을 기다리다 종전을 맞았다. 그는 나중에 “조금만 늦었어도 나는 특공대로 출격해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평화는 소중한 것이기에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신타로가 정치인이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다. 그는 “아버지는 대정당(익찬회)을 적으로 돌리고 금권부패를 규탄했으며, 평생 일관되게 전쟁에 반대하는 자세를 이어갔다. 아버지에게 정치가로서의 신념과 청렴결백함을 배웠다”고 했다.

 

 

“나는 기시의 데릴사위가 아니다”

 

신타로는 대학 졸업 뒤 “살아있는 정치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해 기자가 되기로 하고 1949년 <마이니치신문>에 입사했다. 2년 뒤 선배의 소개로 기시 노부스케(1896~1987)의 큰딸 요코(99)와 결혼한다. 신타로는 “내가 (전범 용의자의 딸과) 결혼을 해준 것”이라고 주위에 말했다고 한다. 1956년 기시가 외무상이 되자 신타로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기시의 비서관이 됐다. 1958년 5월 아버지의 지역구에 출마해 중의원에 당선됐다. 기시 가문의 후광을 입고 신타로는 출세의 길을 달렸다. 관방장관, 외무상, 자민당 간사장 등을 역임하고 총리 물망에 올랐다. 그래도 그는 입버릇처럼 “나는 기시 노부스케의 데릴사위가 아니다. 아베 간의 아들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1991년 췌장암으로 숨지면서 총리의 꿈도 스러졌다.

 

신타로가 숨진 뒤 <마이니치신문>은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라는 자민당의 매파 계보를 이어 보수의 본령을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평화헌법 옹호론자로서 야당과의 관계에서도 유연한 노선을 걸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보수 정치인이었지만 평화주의를 추구했다. 1985년 12월 외무상이었던 신타로는 중의원 외교위원회에서 “세계대전은 일본을 망국의 위기에 빠뜨린 매우 잘못된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국제적으로도 이 전쟁은 침략전쟁이었다는 엄혹한 비판이 있다. 정부도 그런 비판을 충분히 인식하며 대응해가야 한다”며 전향적인 역사인식을 내보였다. 그는 아들에게도 “신조야, 나는 기시의 데릴사위가 아니다. 나는 아베 간의 아들이다. 난 반전평화니까”라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조가 택한 길은 ‘아베 간의 길’이 아닌 ‘기시 노부스케의 길’이었다.

 

신조는 1996년 공저로 낸 <보수혁명선언>에서 “아버지는 전쟁이라고 하는 지극히 비극적인 경험을 했던 당사자로서 그 체험이 사상 형성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 것입니다… 할아버지(기시)의 경우는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어떤 의미로 일본이 대단히 비약적인 전진을 달성했던 영광의 시절이 청춘이었으며 젊은 날의 인생 그 자체였습니다”라고 썼다. 아버지의 전쟁 체험을 ‘사상 형성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것’으로 평가한 반면, 외할아버지의 청춘 시절 일본이 러일전쟁, 한반도 식민지배, 만주 침략 등으로 나아간 때를 ‘영광의 길’이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기시 노부스케의 길

 

‘쇼와의 요괴’로 불린 기시는 1896년 11월 야마구치현 구마게군 다부세초에서 태어났다. 기시의 동생은 ‘비핵 3원칙’(핵무기는 만들지도 않고, 갖지도 않으며, 반입을 허용하지 않는다)을 선언해 197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토 에이사쿠(1901~1975) 전 총리다.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관료가 된 기시는 1936년 10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총무사장이 됐고, 국가 주도형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이는 이후 한국에서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모델이 되었다. 1941년 만주군 출신의 도조 히데키가 총리가 되자 상공대신에 임명됐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뒤 전시물자를 통제하는 군수차관을 맡았다. 그러나 1944년 사이판이 함락되자 조기 종전을 주장하며 도조와 대립했고, 이 대립이 도조 내각의 붕괴를 불렀다. 일본의 각의(한국의 국무회의)는 만장일치제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일이 그가 전후 전범으로 기소되는 것을 면한 이유 중 하나가 된다.

 

이 무렵 기시는 아베 간을 문병했다. 사상적으로 정반대였던 간을 찾아간 이유는 분명치 않다. 기시의 직계 중의원 의원으로 자치상 등을 지낸 후키다 아키라(1927~2017)는 “기시 선생은 아베 간 선생이 훌륭한 분이었다며 평생 존경했다. 정치가로서보다 인간으로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는 “(기시는) 아베 간의 아들이라면 괜찮다, 똑바른 사람일 것이라고 했다”며 신타로와 요코의 결혼 배경을 설명한다.

 

기시는 1945년 9월 에이(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돼 3년여 동안 형무소에 수감됐으나 기소를 면하고 1948년 12월24일 석방된다. 도조 등은 하루 전 처형됐다. 기시는 1953년 3월 야마구치현에서 출마해 중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총리는 요시다 시게루(1878~1967)로,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일본은 경제부흥에 집중한다’는 이른바 ‘요시다 독트린’을 내놓았다. 요시다는 “새 헌법(평화헌법)은 일본이 세계에 자랑스러워해야 할 참으로 훌륭한 헌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시는 평화헌법을 ‘점령국이 강요한 헌법’으로 봤다. 그는 “현재의 헌법은 (미국이) 점령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의 목표는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기시는 보수대연합을 주도하며 1955년 자민당을 탄생시키고, 초대 간사장을 맡았다. 1957년 총리가 된 기시는 1960년 5월 미-일 안보조약 개정안을 의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켜 거센 반발을 불렀다.(아베 신조도 2015년 9월 안보법제를 날치기 통과시켰다.) 시민들은 일본 내 미군기지가 아시아에서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사용될 수 있는 것에 반대했다. 기시는 “나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살해당한다면 바라는 바다”라고 말하며 버텼다. 결국 두달 뒤인 7월 총리에서 물러났다. 헌법 개정의 꿈도 물거품이 됐다.

 

 

다정했던 외할아버지, 차가웠던 아버지

 

기시는 ‘요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신조한테는 자상한 할아버지였다. 신조는 1954년 도쿄에서 신타로와 요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기시는 손자들을 자주 불러서 함께 놀았다. 요코는 “아버지는 손자들을 귀여워해 시간이 되면 언제든 함께했다”고 말했다. 기시는 손자들을 등에 올려 말을 태워주곤 했다. 신조는 “외할아버지는 에이급 전범 용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야’라고 어린 마음에 생각했고, 그러한 분위기에 반발심이 생겼다”고 말한다.

 

<교도통신> 정치부 기자 출신의 노가미 다다오키는 “신조의 기시에 대한 사상적 편향을 이해하기 위해 놓쳐서는 안 되는 게 아버지와의 관계”라고 말한다.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기시한테 쏠린 게 아니냐는 얘기다. 신조는 소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부유한 집의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 세이케이학원에서 다녔다. 자동적으로 상급학교로 진학해, 입시를 치른 적이 없다. 신조는 이른바 명문대로 불리는 도쿄대나 게이오대, 와세다대를 갈 성적이 못 됐다. 할아버지·외할아버지·아버지는 모두 도쿄대를 나왔다. 신타로가 “도쿄대에 가라”고 신조를 닦달하고, “대학은 도쿄대밖에 없다고 생각하라”면서 두꺼운 사전으로 신조의 머리를 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다.

 

지난 20일 치러진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박수를 치는 동료 의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도쿄/AP 연합뉴스
지난 20일 치러진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박수를 치는 동료 의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도쿄/AP 연합뉴스

 

자민당 총재 3연임에 성공한 아베 
“드디어 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싶다” 
‘실력조직’이란 말 만들어 자위대를 
명시하는 개헌안 임시국회 제출 뜻

 

 

아베 “나를 군국주의자라 불러도 돼” 
할아버지는 ‘평화주의’ 길 걸으며 
‘전범’ 도조 히데키 내각·전쟁에 반대 
참전한 아들에게도 “쓸데없이 죽지 마라”

 

 

기시 노부스케 딸과 결혼한 아버지 
“나는 기시의 데릴사위가 아니다” 
평화헌법 옹호하며 반전·평화 노선 
아베는 정반대 ‘기시의 길’ 선택

 

 

“일본의 영광의 시절이 외조부 청춘” 
도쿄대에 가라는 아버지와의 갈등도 
기시에게 편향되게 했다는 분석도 
평범했던 아베, 정계에서 우익 노선

 

 

일본인 납치문제 계기 총리직 올라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다고 
헌법 해석 바꾸고, 안보법제 날치기 
반대여론 커 개헌 이뤄질지 불투명

 

 

신조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세이케이대 법학부를 다닌 동창생들은 “아무리 기억해보려고 해도 인상이나 기억에 남는 게 없다”고 할 정도다. 신조는 대학 졸업 뒤 미국으로 어학연수 겸 유학을 갔다 2년 만에 귀국해 고베제강소에 ‘정략 취직’했다. 1982년 외무상이 된 신타로는 신조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비서관이 되라고 했다. 아베는 잠시 저항했다. 아버지에 대한 반발과 회사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회사가 퇴직 설득에 나섰고, 신조는 정계에 발을 디뎠다. 1993년 아버지의 지역구에서 중의원에 당선됐다. 이 선거에서 자민당은 1955년 이후 처음으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추락했다.

 

신조의 형 히로노부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가가 되기 싫었다”고 하면서, 큰아들인 자신이 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신조가 정계에 입문한 뒤)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는 사이에 기시의 사고방식에 강한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고베제강소에서 신조의 상사였던 야노 신지는 “그(신조)가 확고한 신념을 가진 우파라는 것은 전혀 느낀 적이 없다. 정치권에 들어간 다음에 몸에 익힌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강아지가 늑대 새끼 무리에 들어간 것처럼, 이후 그렇게 돼버렸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2015년 9월19일 안보법제 제정·개정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국회 앞에서 “위헌” “폐안”이라고 쓴 손팻말을 들고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도쿄/AFP 연합뉴스
2015년 9월19일 안보법제 제정·개정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국회 앞에서 “위헌” “폐안”이라고 쓴 손팻말을 들고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도쿄/AFP 연합뉴스
도련님에서 매파의 기수로

 

1993년 8월 비자민당 연합세력으로 집권한 호소카와 모리히로(80)는 총리 취임 기자회견에서 “(지난 전쟁은) 침략전쟁,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인식한다”고 말했다. 이에 반발한 자민당의 우파 의원들은 ‘역사·검토위원회’를 만들어 1995년 ‘대동아전쟁의 총괄’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일본이 수행한 대동아전쟁은 자존·자위의 아시아 해방전쟁으로 침략전쟁이 아니고, 난징대학살이나 위안부는 날조로 사실이 아니며, 가해·전쟁범죄는 없다”고 했다. 이 위원회에 초선이던 아베도 참여했다. 아베는 이후 우익활동에 적극 나서면서 ‘부잣집 도련님’에서 ‘매파의 귀공자’로 변해갔다.

 

아베가 스타가 된 결정적 계기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였다. 2002년 9일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76) 총리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했다. 북-일 국교정상화를 위해서였다. 이날 오전 북한은 일본이 납치 피해자라며 조사를 요청한 이들에 대해 ‘5명 생존, 8명 사망’이라고 통보했다. 8명 사망 소식에 고이즈미 등은 망연자실했다. 관방부장관으로 회담에 참가했던 아베는 “(사망자에 대한) 설명과 사죄가 없다면 공동선언에 서명하지 않는 게 좋다. 그때는 자리를 박차고 돌아가자”고 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유감스러운 일이 있었음을 솔직히 사죄하고 싶다”고 했고, 고이즈미는 평양선언에 서명했다. 두 나라는 국교정상화 회담도 재개하기로 했다.

 

일본 사회는 8명 사망 소식에 충격에 빠졌다. 아베는 최대 수혜자였다. 평양에서 강경론을 주도한 게 알려지면서 ‘믿을 수 있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납치 피해자 5명이 일본에 일시 귀국한 뒤 이들을 북한에 돌려보내는 것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 정부는 피해자들한테 맡기자는 태도였다. 아베는 “국가가 책임을 방기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결국 정부는 돌려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북한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때 아베한테는 ‘납치의 아베’라는 별명이 붙었다. 스타가 된 아베는 2003년 자민당 간사장에 발탁됐고, 2005년에 관방장관에 임명돼 사실상 고이즈미의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다.

 

2006년 9월 총리에 취임한 아베는 전쟁을 겪지 않은 첫 총리였다. 아베는 ‘아름다운 나라 만들기’와 ‘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을 내세웠다. 전후체제에서 벗어나겠다는 건 연합군총사령부(GHQ)가 ‘강요한’ 평화헌법 등을 해체하겠다는 뜻이다. 교육기본법을 개정하고 방위청을 방위성으로 승격시키고, 국민투표법을 제정하며 한걸음씩 나아갔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도 무력화하려 했으나, 미국 하원이 2007년 7월 일본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면서 좌절됐다. 각료들의 정치자금 스캔들 등으로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하고 궤양성 대장염으로 건강이 악화된 아베는 9월 총리에서 물러났다. 아베는 “어떤 칼럼니스트가 학교에서 ‘아베한다’는 말이 유행하는 현상에 대한 글을 썼다. ‘아베한다’는 도중에 일을 내던지는 뜻이라고 했다”고, 당시의 참담한 심경을 말한다.

 

 

참담한 실패와 재기

 

아베는 산에 오르며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신약으로 궤양성 대장염도 치료됐다. 재기에 나선 아베는 2009년 8월 중의원 선거에 당선했다.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으로 지진해일(쓰나미)이 발생해 후쿠시마 제1원전을 덮쳤다. 주위에선 경제를 파고들어야 재집권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때부터 아베는 ‘아베노믹스’의 핵심이라 할 양적완화(대규모 유동성 공급)를 주장했다. 2012년 9월 예정된 자민당 총재 선거에 아베가 도전할 것이라는 예상은 적었다.

 

아베의 마음을 돌린 것은 기시 노부스케의 선거구를 물려받은 후키다 아키라로 알려졌다. 그는 아베에게 “기시 선생은 정치가는 일단 정치가가 됐으면 완전 연소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네. 기시 선생은 ‘다시 한번 총리가 돼 헌법을 개정하고 싶다’고 자주 말씀하셨다네. 당신에게도 미련이 있을 것이네. 승패는 신경쓰지 말고 나서게”라고 했다. 아베는 올해도 맞붙은 이시바한테 1차 투표에서는 뒤졌으나 국회의원만 투표권을 갖는 2차 투표에서 이겨 당선됐다.

 

재집권에 성공한 아베는 2013년 4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침략’의 정의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도 국제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문제제기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침략’ 전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995년 8월15일 사회당 출신의 무라야마 도미이치(94) 총리는 종전 50년을 맞아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와 같은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라고 밝혔었다. 아베는 2013년 12월 야스쿠니신사도 방문했다.

 

 

최종 목표, 개헌

 

역대 일본 정부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외국이 무력 공격을 받으면 이를 무력으로 저지하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헌법상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러나 아베는 2014년 각의 결정으로 이를 뒤집으며,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허용된다고 헌법 해석을 바꿨다. 이어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을 개정하고 2015년 자위대법, 중요영향사태법 등 이른바 ‘안보법제’를 개정·제정했다. 9월18일 한밤중에 참의원 본회의에서 날치기 통과시켰다. 자위대는 미군이 가는 곳이면 세계 어느 곳이든 따라가 미군을 지원할 수 있게 됐다.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다.

 

2015년 9월23일 일본 도쿄에서 2만5000여명의 시민이 아베 신조 정권의 안보법제 제정·개정 강행처리와 원전 재가동 정책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도쿄/AFP 연합뉴스
2015년 9월23일 일본 도쿄에서 2만5000여명의 시민이 아베 신조 정권의 안보법제 제정·개정 강행처리와 원전 재가동 정책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도쿄/AFP 연합뉴스
이제 아베는 헌법 자체를 바꿔 외할아버지의 염원을 실현시키려 한다. 그러나 실제 개헌에 이르는 길은 평탄하지 않다. 개헌 찬성 세력이 중의원과 참의원의 3분의 2 이상이지만, 국민투표를 통과할지는 알 수 없다. <교도통신>이 지난 20~21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아베가 가을 임시국회에 개헌안을 제출하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응답자의 51%가 “반대한다”고 답했고, “찬성한다”는 35.7%였다. 상당수 일본인들이 개헌에 동의하지 않는 셈이다.

 

스즈키 게이스케(41) 자민당 청년국장(중의원 의원)은 미국 경제신문 <월스트리트 저널>이 개헌 찬성이 어느 정도 될 것으로 예상하느냐고 묻자 “높게 나오면 60%가 나올 수 있지만, 투표 당일 북한이 미사일을 쏴주면 80%는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시험과 핵실험,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 등을 빌미로 힘을 키워온 일본 우익의 셈법이다. 한반도의 긴장완화가 개헌을 추진하는 그들에겐 탐탁지 않다. 섣불리 국민투표를 밀어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투표에서 부결되기라도 하면 다시 개헌을 추진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아베가 국민들의 반대와 주변국들의 반발 등을 무릅쓰며 사활을 걸고 개헌을 강행할지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참고자료

 

<아베 삼대>(아오키 오사무 지음)

 

<아베 신조, 침묵의 가면>(노가미 다다오키 지음)

 

<아베는 누구인가>(길윤형 지음)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863747.html?_fr=mt1#csidx391df401b70d33db677c7d01be22b4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