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인구의 약 5분의 1에 달하는 숫자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닭은 1억7274만3479마리, 오리는 645만9836마리가 사육되고 있다. 소도 한우와 육우, 젖소를 합쳐 318만7921마리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 가축은 다 어디에 있을까. 통계에 따르면 서울의 경우, 가축용 돼지를 기르는 가구는 단 한 곳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돼지를 가장 많이 기르는 곳은 충남으로 857가구에서 212만209마리가 사육되고 있다.
■ 1000만마리 돼지, 다 어디에 살까
지난 1월 21일, 농림축산식품부와 환경부, 국토부, 행안부와 총리실 5개 부처 장관 합동 명의의 협조문이 나왔다.
‘무허가 축사 적법화 추진’ 협조문이다. 각 지자체별로 부지자체장이 ‘무허가 축사 적법화 TF 팀장’을 맡아 지역 축협과 협조체계를 구축해 ‘가축분뇨와 악취의 적정관리, 지역사회와 상생하는 지속가능한 축산업 육성’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 달라고 주문한 것이다. 정부가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축산시설 현대화 및 등록작업의 일환이다.
한국에서 가축사육업을 하려면 축산법상 기준에 따라 허가를 받고 등록해야 한다. 돼지의 경우, 축산법과 시행령에 표시돼 있는 시설기준을 보면 종돈 사육시설과 함께 차단 및 방역시설도 갖춰야 한다. 울타리 또는 담장을 치고 입구에는 출입통제를 알리는 안내문도 세워야 한다. 출입구나 정문에는 소독조 시설을 설치해 사람, 가축, 기계에 대한 소독을 실시해야 한다.
이런 까다로운 기준을 따르다 보면 ‘공장식 밀집사육’은 피할 수 없다. 축산법에 규정된 ‘축산인력’을 제외한 일반인이 사육되는 돼지를 접해서도 안 된다. 돈사(豚舍)는 시골마을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다. 악취와 분뇨 때문이다. 반대하는 주민들의 플래카드가 걸린다. 점점 더 인적이 닿지 않는 외진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
황 감독은 <잡식가족의 딜레마>에서 돼지 두 마리의 운명을 필름에 담으려고 했다. 축산공장에서 나고 자란 돼지에는 돈오(頓悟), 자연친화적인 동물농장에서 태어난 돼지에는 돈수(頓修)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들의 일생을 추적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난관에 부닥쳤다. 돈오의 섭외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신 영화에는 농장에서 자란 돈수와 돈수를 낳은 엄마돼지 십순이의 삶을 영화에 담았다. 농장에서 사육된 돼지지만 운명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년의 세월이 지난 뒤 돈수는 돈수의 형제와 함께 도축장으로 갔다. 자연순환농을 지향하는 양심적인 농장주도 일반 축산농과 마찬가지다. 돼지를 키우는 것은 결국 고기를 소비하기 위한 것이니까. 영화 말미에 감독에게 농장 주인은 돈수는 아니지만 자신이 키워낸 친환경 돼지의 삼겹살을 건넨다. 딜레마다.
영화는 공장식 축산의 실태를 고발한다. <주간경향>은 영화 개봉에 맞춰 감독을 인터뷰했고, ‘공장식 축산 잔혹사’라는 주제로 기사를 썼다. 기사에서는 공장식 축산을 강제할 수밖에 없는 축산법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는 동물권 운동가와 시민들의 위헌소송도 다뤘다. 2015년의 일이다.
■ 축산법 시행령 개정 후 달라진 것
그로부터 4년이 지났지만 ‘잔혹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 사이에 달라진 게, 글쎄요. 닭을 키우는 배터리케이지 크기가 0.05㎡에서 0.075㎡로 늘어났으니 0.025㎡ 늘어난 셈이네요. 종전 배터리케이지 크기를 A4 3분의 2 크기 정도라고 했으니 이제는 A4 사이즈쯤 된 거라고 할까요?”
4년 전 기사를 쓸 당시 취재를 도왔던 동물보호단체 카라의 김현지 정책팀장의 말이다.
닭(산란계 및 종계) 사육면적이 바뀐 것은 지난해 9월 축산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부터다. 2년 전 벌어진 살충제 계란 사건, 최근까지 해마다 되풀이된 AI의 한 원인으로 밀집사육이 지목되면서다. 김 팀장은 덧붙인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살충제를 안 쓰는 것도 아니고….”
0.025㎡가 늘어난다고 논란이 된 닭 진드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얘기다. 시행령은 새로 개설되는 양계장에 적용된다. 기존의 배터리케이지를 사용하는 업자들에게는 7년간, 그러니까 2025년까지 도입이 유예된다.
김 팀장은 “유럽의 경우 2012년부터 배터리케이지의 사용이 전면 금지됐고, 스웨덴 등에서는 돼지를 가둬 키우는 스톨도 2013년부터 금지됐다”며 “사실 정부가 속도를 내줘야 하는 문제지만, 정부 쪽 사람들을 만나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정부에서도 일반 축산농가에 적용될 수 있는 동물복지형 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다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사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유럽처럼 배터리케이지를 철폐하는 것”이라고 했다.
4년 전 기사에 담은 동물보호단체와 녹색당, 법률인들의 축산법 22조 위헌소송의 결론은 그해 9월 내려졌다. 기각이다.
녹색당 등은 가축 사육시설의 환경이 지나치게 열악할 경우, 그런 시설에서 사육되고 생산된 축산물을 섭취하는 인간의 건강도 악화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헌법적 권리인 국민의 생명·신체의 안전에 관한 기본권을 침해할 위험이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헌재의 결정문은 “심판 대상조항은 가축사육업의 허가나 등록을 할 때 갖춰야 하는 가축 사육시설의 기준으로, 이 조항만으로 곧바로 가축들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인간의 생명·신체의 안전이 침해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최근 카라와 녹색당, 동변(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변호사들) 등 단체는 ‘공장 대신 농장을!’이라는 주제로 배터리케이지와 스톨 추방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http://stopfactoryfarming.kr)을 다시 벌이고 있다. 1월 24일 현재 이 온라인 서명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3만4014명. 50만명을 돌파하면 국회 앞에서 궐기대회를 열고, 100만명이 참여하면 입법청원을 할 계획이다.
동물권 운동의 주제를 나눠본다면 크게 네 가지 범주로 나뉜다.
반려동물과 실험동물, 야생동물, 그리고 농장동물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동물권 운동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개나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과 관련된 것이다. 소나 닭, 돼지와 같은 농장동물 복지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초보적인 문제제기에 그치는 수준이다.
정부 대응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발표한 국정운영 100대 과제에서 농장동물의 동물복지에 대해 언급한 대목은 없다. 59번 ‘지속가능한 국토환경 조성과제’에서 언급한 ‘반려동물 지원센터 설치 등 유기동물 관리 및 보호’, 그리고 83번 ‘친환경 동물복지 농축산업 확산’ 과제의 일환으로 ‘2022년까지 깨끗한 축산농장 5000호 조성 추진’ 계획 등이 전부다.
■ 반려동물에 밀리는 농장동물의 ‘동물복지’
지난 1월 21일 저녁, 서울 중구에서 열린 녹색당 주최의 북 콘서트 행사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였다.
황윤 감독이 2018년 12월 낸 책 <사랑할까, 먹을까>를 주제로 마련된 자리다. 어느 잡식가족의 돼지 관찰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 이후 황 감독이 전국 순회상영회에서 주로 언급했던 ‘가족에서의 변화’를 주제로 펴낸 책이다.
농장동물 복지를 주제로 한 흔치 않은 자리다.
이날 행사에서 마이크를 잡은 황 감독은 “동물복지 농장을 무조건 옹호하려고 책까지 쓴 것은 아니다”라며 “현실적으로 인간 먹거리를 위해 동물을 더 착취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날 북 콘서트에서 나온 주된 질문은 동물을 먹는 것, 육식의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포털 등에 올라간 ‘공장식 축산 잔혹사’ 기사 댓글을 보면 ‘대안 부재 현실론’이 많다. 가뜩이나 좁은 국토면적에 모든 축산업 시설이 동물복지를 지향할 수 없는 노릇이며, 만약 공장식 축산을 포기한다면 고깃값이 비싸져 일반 국민은 사먹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논리다.
“댓글들을 읽어보면 지난 몇 년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동물복지나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종전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다고 생각한다.” 황 감독의 말이다.
그는 “사실 고깃값이 싼 것이 아니다. 2002년부터 2011년까지 살처분에 들어간 비용을 계산해보니 모두 4조원이었다. 그게 다 세금이다. 국민들이 우회해서 치르는 값이다. 어떻게 보면 싸게 먹었다고 보는 것은 착각인 셈”이라고 덧붙였다.
‘공장식 축산 잔혹사’ 기사가 나간 후 지난 4년을 돌이켜보면 제도나 정책에서도 ‘변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단적으로 지난해 6월 동물보호·복지업무 전담부서가 농림축산식품부에 설치됐다. 동물복지정책팀이다.
과거 기사를 쓸 당시만 하더라도 축산정책과 내 전담인력만 2~3명 있을 뿐이었다. 동물복지 관련 예산도 꾸준히 늘었다. 지난해 74억원에서 올해는 136억원의 예산이 책정돼 있다. 예산의 대부분은 동물보호 인프라 구축과 관련된 것이다.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 언급된 각 지자체에 유기 반려동물 보호센터와 장묘시설을 마련하는 것이다. 교육·홍보예산도 포함되어 있다.
김동현 농림축산부 동물복지정책팀장은 “물론 더 따지고 들어가면 근본적인 차이는 있지만, 동물복지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없다”고 말했다.
아쉬운 것은 기초연구다. 예를 들어 배터리케이지를 0.025㎡ 늘린다면 닭 진드기 전염 실태가 어느 정도 개선될지 데이터가 없다는 것이다. 김 본부장은 “기본적으로 검역본부나 농촌진흥청 축산과학원, 그 외에도 축산과 관련한 유수의 대학들이 있는데 알다시피 돈이 안 되는 연구는 잘 하지 않으려 한다. 동물복지 관련 주제가 딱 그렇다”고 덧붙였다.
‘돼지가 게으르다’는 통설은 왜 생겼을까. 가축은 사람의 관점에서 ‘일’을 하는 존재다. 고양이는 쥐를 잡고 개는 집을 지킨다. 말은 이동수단이었고, 소는 쟁기를 끄는 농사일을 한다. 돼지는? 북유럽에서는 뛰어난 후각을 이용해 버섯을 캐는 데 동원했다지만 동양권에서는 오로지 고기 생산용이었다.
‘하는 일이 없이 먹기만 하니 게으르다’는 시각은 인간중심적 평가다. 게다가 고기와 알, 우유를 주는 것 이외의 일은 현대사회에서 대부분 대체되었다. 그렇다고 돼지가 개나 고양이처럼 반려동물이 되기는 어렵다. 가축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시각이 재정립되어야 한다. 농장동물의 동물권 논의도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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