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한국 사회는 아직 이런 현실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헌재 재판관 구성이 바뀌고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면서 어느 때보다 낙태죄에 관한 '전향적인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졌다지만, 그 '이후'에 관한 논의는 부족한 실정이다.
"흔히들 한국 사회가 압축 성장했으며, 빠르게 민주화됐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성의 권리와 관련해 그 압축 성장을 못할 건 뭔가."
지난 2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지윤 녹색당 정책팀장은 "낙태죄 폐지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헌재가 현행 낙태죄에 대해 위헌 판단을 내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국가가 임신중지를 여성의 권리로 인정하는 대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임신중지 약물 도입, 성교육과 피임 접근성 개선뿐만 아니라 성과 재생산에 대한 인식 변화도 함께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윤 정책팀장은 지난 3월 30일 서울 중구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촉구 집회의 주최 단체인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아래 모낙페)에 녹색당 소속으로 참여하고 있다. 또 낙태죄 위헌을 촉구하는 헌재 앞 1인 시위에 참여하는 등 낙태죄 전면 폐지의 필요성을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목소리 높이고 있다.
낙태죄 폐지는 시작에 불과하다
▲ 김지윤 녹색당 정책팀장 | |
ⓒ 녹색당 제공 |
"전 세계적으로 임신중지 권리는 계속 확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각 국이 차이는 있지만, 이렇게 전면적으로 임신중지를 범죄화하고, 여성을 마치 죄인 취급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여성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을 국가와 사회가 존중해야 한다. 임신을 계속 유지할 것인지, 중지할 것인지, 출산할 것인지를 여성이 결정하고 그에 관한 건강과 안전을 보장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기본권, 인권이다."
-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이들은 흔히 태아의 생명권이나, 종교적 신념 등을 내세운다.
"각자 개인의 윤리와 가치관이 있다. 어느 종교인이 그 종교 나름의 신념으로 임신중지를 반대할 수도 있다. 문제는 개인의 도덕률이나 특정 종교의 교리를 전 사회에 강제하고 한 나라의 형법으로 규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임신중지를 강간, 살인, 사기, 횡령과 같은 범죄로 규율하는 것이 옳은가? 이는 여성의 몸 자체를 범죄화하고 여성의 몸에 낙인을 찍는 것이다. 낙태죄가 존재하는 한 여성은 평등한 시민으로 존중받는 사회일 수 없다."
실제 한국은 임신중지에 극히 엄격한 태도를 보이는 나라다. 우생학적·유전학적 요인, 강간, 근친상간 등 모자보건법이 말하는 특정한 사유 안에서만 예외적으로 임신중지를 허용한다(모자보건법 제14조). OECD 36개국 낙태법을 비교해 보면 한국보다 임신중지가 어려운 국가는 단 한 곳, 칠레뿐이란 분석도 나온다(책 <배틀그라운드> 참조). 36개국 중 30개국은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거나, 본인이 원할 경우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
- 11일 헌재가 자기낙태죄(형법 제269조 1항, 임부 처벌 조항)와 동의낙태죄(형법 제270조 1항, 의료인 등 처벌 조항)의 위헌 여부에 대한 선고를 내릴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전망하나.
"특별히 전망하고 있지 않고, 다만 전향적이길 기대한다. 언론이야 예측을 내놓을 수 있고 저희도 어느 정도 가늠해 보는 건 있지만, 지금 무어라 말하긴 어렵다. 위헌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사유로 위헌인 것인지, 헌법불합치라면 어떤 부분이 불합치라는 것인지에 따라 판단이 다 달라진다. 결정문이 나올 텐데, 그 문구 하나하나를 뜯어봐야 한다."
지난 2012년 낙태죄 합헌 선고 때는 재판관 의견이 4대4로 나눠졌다. 그때와 달리 이번 선고에서 6명 이상의 재판관들이 위헌 의견을 내 정족수를 넘기더라도, 어떤 형태(단순 위헌, 한정 위헌, 헌법 불합치)와 논리를 택하는지에 따라 평가가 갈릴 수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헌재가 '임신 초기에까지 낙태죄를 적용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논리를 들면서 한정 위헌을 선고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 2012년 낙태죄를 두고 위헌 의견을 냈던 4명의 재판관들도 '초기에는 허용해줄 필요가 있다'는 내용으로 접근했을 뿐, 전면 폐지를 말하진 않았다. 이는 임신중지를 전면적으로 비범죄화할 것을 요구하는 여성계 입장과는 다소 온도차가 있다.
- 임신중지를 허용하더라도, 주수나 사회경제적 사유 등을 통해 제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네가 정말 많이 가난하고, 돈도 못 벌면 임신중지를 허락해줄게'라는 식의 관점으론 안 된다. 커리어도 좋고, 연봉도 높은 어느 여성이라도 지금 이 시기에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임신중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학생이고 벌이가 어려워도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은 여성이라면 편견과 제약 없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출산하고 양육할 수 있는 사회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주수나 사유는 '허락'의 요건이 아닌 국가와 사회가 보장해야 할 조건이다.
'이만큼 가난해야만 임신중지가 가능하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뒤집어 생각하면 결국 '이 정도로 가난하면 낳지 말라'는 얘기나 다를 바 없다. 예를 들어 현행 모자보건법은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임신중지를 '허락'한다. 이는 장애인이 출산을 하려고 하면 병원에서 '정말 낳으실 거냐?'는 질문을 받는다든지, 시설에서 불임시술을 강제 당한다든지 하는 현실로 나타난다. '허락'을 뒤집으면 '하지 말라'는 강요가 나온다."
권리로서의 임신중지 "여성들은 처벌도 허락도 거부한다"
- 국가가 임신중지를 허락하는 구조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인가.
"근본적으로 관점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 임신중지는 국가가 처벌할 일도 아니지만, 더 나아가 허락할 일도 아니다. '처벌 안 한다, 다만 허락한 사유 안에서 임신중지를 하라'는 건 임신중지를 여전히 귄리가 아닌 시혜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여성들은 처벌도 허락도 거부한다.
성과 재생산의 권리로서 임신중지의 유일한 기준은 임부의 요청이며, 임부의 건강과 안전만이 제한 조건이 돼야 한다. 낙태죄를 폐지하고, 임신중지는 여성의 기본권이며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여성의 판단으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원칙을 명확하게 세워야 한다. 단순하고 지당한 명제이지만 이 기조를 명확히 세워야 구체적인 입법을 할 수 있다.
국가는 낙태죄가 전면 폐지되면 여성들이 위험한 선택을 하거나, 문란한 성생활을 할 거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피임 접근성을 높이고, 적절한 피임과 임신중지에 관한 사회적 의료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임신중지는 초기에 하는 것이 좋지만, 이를 '초기에만 허락해 주겠다'는 것과 '어떻게 하면 여성이 초기에 안전하게 중지 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할지' 국가가 고민하는 것은 다르다."
▲ 헌재 앞에서 낙태죄 위헌 촉구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김지윤 정책팀장. | |
ⓒ 녹색당 제공 |
"소수자들이나 여성의 인권을 말하면 '나중에'라거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 '때'는 언제일까. 한국에서는 성과 재생산 권리에 관한 진지한 사회적 논의가 늦어도 너무 늦었다. 1953년 형법 제정 이래 낙태죄가 개정도 없이 존치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야 말로 여성 시민의 존엄에 심각하게 문제적이다.
다른 나라는 재생산권을 꾸준히 확장해온 역사가 있다. 반면 한국은 피임, 임신, 임신중지, 임신유지, 출산, 양육 등의 전 과정이 건강하고 안전하며 자유롭도록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다. 흔히들 한국 사회가 압축 성장했으며, 빠르게 민주화됐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성의 권리와 관련해 그 압축 성장을 못할 건 뭔가."
이어 그는 "다른 나라들의 선례를 봤을 때 너무나 자명한 건 임신중지를 어렵게 하면 오히려 모성사망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산부인과 의사 윤정원씨도 책 <배틀그라운드>에서 "미국에서는 임신중지가 합법화되면서 1970~1976년 사이 임신중지로 인한 모성사망이 1백만 명 출생 당 40명에서 8명으로 줄었다"고 설명했다. "합법적인 임신중지와 안전한 임신중지 사이에는 유효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임신중지 비범죄화 뿐만 아니라 성교육·의료서비스 등 개선해야
김 팀장은 "임신중지를 비범죄화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청소년기부터 양질의 성교육을 보장하고 피임 정보 확대와 정확한 피임법의 접근성을 높여 원치 않는 임신 자체를 줄이는 것, 그리고 임신중지를 하려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방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성평등 정책과 성교육을 강화하고, 피임 접근성을 높이고, 의사들에게 임신중지 의료에 대한 적정한 수가를 보장하고, 이를 건강보험 안으로 포섭해내야 한다. 현재 의사들은 수련의 때 임신중지 시술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다. 임신중지가 원칙적으로 불법이기 때문이다. 의료인 교육 시스템 개선, 보완 교육 등 함께 보완돼야 할 것이 많다."
그는 이어 낙태죄가 폐지 되어도 임신중지하는 여성을 비난하는 문화가 잔존하고, 시술하는 의료인을 낙인찍는 분위기가 된다면 여성들이 현실에서 체감하는 변화는 크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낙태죄 폐지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낙태죄는 제정 때부터 50년 이상 국가가 맘대로 휘두를 수 있는 도구였다. 국가가 원할 땐 임신 중지가 강요되다시피 했지만, 그렇지 않을 땐 비난하고 낙인찍었다. 여성에 대한 치욕의 역사를 담고 있는 법이다. 낙태죄가 폐지는 한국 사회의 여성 인권 향상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될 것이다."
"차별금지법 제정, 다양한 가족구성권 보장, 낙태죄 폐지가 같이 가야 한다.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등이 사회서비스 등에 있어 차별받지 않는 것,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 것, 여성의 재생산권이 보장되는 건 전부 맞물리는 문제다.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다."
여성들은 낙태죄 폐지 이후 새로운 사회에 대한 거대한 질문을 던졌다. 11일 헌재는 어떤 답을 내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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