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지서에는 본서에서 파견한 사찰 경찰이 지서 주임과 소속 순경 등과 함께 부역자를 분류해 처벌했다. 부역 혐의자 체포는 주민들의 증언이나 밀고로 이뤄졌고 조사과정에서 구타, 전기고문 등은 예삿일이었다.
체포된 사람 중에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많았다. 희생 규모도 경찰서장이나 해당 지서 주임의 재량에 따라 달라졌다. 처형이 집행될 때는 경찰의 인솔로 치안대원들이 부역 혐의자들을 처형장소로 끌고 가 총살했다.
마을주민‧일가족 몰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
▲ 이 자리에서 부녀자들이 착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비녀만 89점이 나왔다. 감식결과 어린이 유해만 58구로 확인됐다. 208구 유해 중 성인남성의 것은 19명에 불과했다. | |
ⓒ 한국전쟁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 |
▲ 이 자리에서 부녀자들이 착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비녀만 89점이 나왔다. 감식결과 어린이 유해만 58구로 확인됐다. 208구 유해 중 성인남성의 것은 19구에 불과했다. | |
ⓒ 한국전쟁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 |
공동조사단의 조사와 생존 목격자들의 증언을 기록을 보면 한국전쟁 중 부역자 외에도 이웃이 이웃을 밀고하고,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죽고 죽이는 억울한 죽음이 수없이 저질러졌다.
1950년 12월 초 배방면 북수리 4구에 살던 김석남씨는 온양경찰서에 수용됐다가 살해당했다. 앞서 김씨는 북수리 이장 곽세영씨의 공출 착복 사실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갈등이 생겼다. 전쟁이 나자 청년방위대 소대장인 곽씨의 사위 정아무개씨가 김석남과 그 가족을 '빨갱이'로 몰아 김씨를 비롯해 일가족 5명을 살해했다.
의용군으로 징집 나간 방씨 가족 5명, 의용군으로 징집된 부친을 둔 성낙구씨 가족 5명, 엄진섭씨와 그 처가 살해당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1951년 1월 초 배방면 장재리에서는 양대운씨와 처 이만순, 딸 양춘자와 양영순, 아들 양구창과 양춘호, 임신 중이던 양대운씨의동생 양대록의 처 윤순희, 그의 자녀인 유아 2명 등 일가족 10명이 모두 참변을 당했다.
1951년 1월 5일 배방면 세교리 1구에서는 전달석과 모친 유아무개씨, 형 전윤옥과 전준옥, 형수 박아무개씨와 심아무개씨, 조카 전해달·전해광·전해자·전해종, 미작명 영아 1명 등 가족 11명도 경찰의 지시로 배방면사무소 창고에 감금됐다가 살해당했다. 이들은 전윤옥과 전준옥의 인민위원회 활동 혐의로 몰살당했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세교리 주민 30여 명도 연행돼 총살됐다.
당시 전달석의 동생 전유는 전해천, 김병학 등 세교리 주민과 서울에서 피난 왔던 이광수와 함께 처형장소로 가던 중 도망쳐 생존했다.
배방면 창고는 1·4후퇴(1951년 중공군의 공세에 따라 정부가 수도 서울에서 철수한 사건)시기에 배방면 주민들을 감금했던 곳이다. 부역 혐의자 가족들은 별도로 관리하고, 도민증 발급을 이유로 야간에 연행했다. 감금 기간은 보통 2~3일 정도였다. 1950년 12월 창고 보초를 섰던 임아무개씨는 주민들이 밤에 연행됐고 맞거나 발가벗겨지는 것을 목격했다. 임씨에 따르면 보초를 섰던 당시 40~50명의 주민이 갇혀 있었고 부녀자, 노인, 유아는 물론 갓난아기까지 포함돼 있었다.
임씨는 당시 시체 썩는 냄새가 지독해 일하지 못했고, 결국 땅을 팔아버렸다고 한다.
생존자들은 1951년 1월 초 치안대원들이 주민 60~70명을 연행해 감금했다고 증언했다. "사람들이 '장날 소떼 엮이듯' 새끼줄로 묶인 채 끌려가 배방면 성재산 방공호에서 총살당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생존자는 "1951년 1월 7~8일 배방면 향토방위대가 면내 10여 개 마을주민 남녀노소 300여 명을 곡물창고에 집합시킨 후 저녁에 새끼줄로 묶어 성재산으로 끌고 가 총살했다"고 증언했다.
탕정면 용두리, 염치읍 대동리 유해발굴 계속
▲ 한국전쟁 당시 아산시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현장 | |
ⓒ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 |
▲ 2018년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에서 208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 |
ⓒ 한국전쟁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 |
아산시는 올해 탕정면 용두리와 염치읍 대동리 새지기 일원에서 유해발굴을 이어갈 예정이다.
9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탕정면 용두리와 염치 대동리 새지기, 두 곳은 생존자 증언에 따라 일부 현장 조사를 마친 상태다. 주민들은 탕정지서와 면사무소 곡물창고 등으로 연행했다가 용두리와 대동리 야산에서 처형당했다.
아산시유족회 조사에 따르면 탕정면 희생자 유족은 70여 명이다. 희생자보다 유족이 적은 이유는 노인부터 갓난아기까지 부역 혐의자의 가족 전원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유족이 있더라도 '빨갱이'로 몰릴까 두려워 고향을 떠나야 했다. 생존한 유족들은 그동안 시신 수습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먼발치에서 술 한 잔 올리고 돌아서는 것조차 숨어서 해야 했다.
탕정면과 염치읍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다수의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살해 도구로 총칼뿐만 아니라 농기구와 죽창 등을 사용해 더욱더 끔찍한 상황이었다. 아산시는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 사건 유해발굴사업을 위해 2018년 지방보조금 예산 1억1400만 원을 의회로부터 승인받았다. 전국지방자치단체 중 유해발굴사업을 직접 지원한 사례는 아산시가 처음이다.
"생존자들은 잊히기만을 강요당해왔다"
▲ 홍남화 회장은 “지금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데, 지나간 역사를 끄집어내서 어쩌자는 것이냐며 불편해 하는 분들도 많다”며 “그러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매래는 없다’고 했던 신채호 선생님의 말처럼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아산시민의 동행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 |
ⓒ 충남시사 이정구 |
"생존자들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잊히기만을 강요당해 왔다."
홍남화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 회장이 탕정면과 염치읍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사업을 앞두고 한 말이다.
홍남화 회장은 "갈수록 매장지 위치를 찾기가 어렵고, 도시개발과 도로건설 등 각종 개발사업으로 유해발굴이 불가능한 곳도 많다"며 "한국전쟁 당시를 목격한 생존자의 증언을 듣기도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어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전수조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데 지나간 역사를 끄집어내서 어쩌자는 것이냐며 불편해하는 분들도 많다. 그러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던 신채호 선생님의 말씀처럼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아산시민의 동행을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는 일반 주부부터 회사원, 교사, 학생, 어르신까지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아산지역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일제 잔재 청산, 독립운동사 발굴, 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 한국전쟁 아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사업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충남시사>와 <교차로>에도 실렸습니다. <충남시사신문>은 아름다운사회건설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시민이나 단체를 찾아가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가치를 소개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 2년째 한국전쟁 아산시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사업을 추진중인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를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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