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수사관들은 피고인 대기실까지 찾아가 "검사 앞에서 조서 내용 그대로 자백해야 하며, 착오가 없어야 한다"고 협박했다. 또 교도소까지 찾아가 김기삼을 안기부 광주분실로 끌고간 뒤 "검찰 조사를 잘 받으라"며 구타했다.
만약 안기부의 위세만으로 검찰을 압박해 유죄 구형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면, 안기부 수사관들이 굳이 "검찰 수사 잘 받으라"며 계속 협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김기삼을 간첩으로 만들려면 검찰의 협조도 필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처럼 안기부 수사에 제동을 걸 여지가 있었는데도, 검찰은 김기삼의 혐의 부인을 무시하고 간첩으로 조작하는 데 일조했다.
민청학련 사건과 검찰
▲ 1974년 4월 25일자 <매일경제신문>에 보도된 민청학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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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한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유신 시절인 1974년 발생한 민청학련 사건(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제2차 인혁당 사건) 때도 검찰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인혁당의 조종을 받은 이 단체가 국가전복을 꾀한 것으로 발표된 이 사건에서도 검찰은 중앙정보부(안기부의 전신)와 협조체제를 유지했다.
이 사건의 수사 과정은 고문과 허위자백으로 점철됐다. 정상적인 수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소개한 이유정 인하대 교수의 논문 '과거사 진상 보고서를 통해 본 검찰의 인권침해 실태'에 아래와 같은 대목들이 있다.
"이 사건에서 검찰은 주도적으로 고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문 수사관들의 입회 하에 형식적으로 조사를 진행하면서 피의자들이 범죄 혐의를 부인하면 중정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협박하는 등 허위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불법수사를 하였다."
"피고인들이 제출한 항소·상고이유서에도 검찰 수사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검사(의) 조서 작성 시 4월 20일~25일까지 철야 조사를 받고 4~5일에 걸쳐 고문당함(도예종 항소이유서) ······"
"검찰서기였던 이○○도 의문사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피의자들 모두가 풀이 죽어 있었고 문 검사가 질문을 하면 부인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으며, 아마 고문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진술하여 검찰에서도 피의자들에 대한 고문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있다."
-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이 2009년 발행한 <내일을 여는 역사> 제36호.
검찰은 이미 벌어진 고문수사를 묵인했을 뿐 아니라 검찰 조사 중에 벌어지는 고문도 방조했다. 또 피의자가 말을 듣지 않으면 '중앙정보부로 돌려보내겠다'고 협박했다. 중앙정보부에서 벌어질 고문수사를 은근히 예고하는 방법으로 검사가 피고인을 협박한 것이다. 중앙정보부뿐 아니라 검찰도 간첩 조작의 공범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312조 1항과 2항이 다른 이유
▲ “검찰아 칼잡이는 우리야“ 지난 12일 서울 서초역 부근에서 검찰개혁사법개혁적폐청산 범국민연대 주최로 "제9차 사법적폐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사전집회에 참가한 한 시민이 ”검찰아 칼잡이는 검찰 썩은 환부 도려내는 우리야“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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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12조 제3항은 법원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권을 검사에게만 인정한다. 형사소송법 제200조의 2는 경찰이 영장을 신청할 때는 반드시 검사를 거치도록 규정한다. 형사소송법 제196조는 검사에게 경찰 수사에 대한 지휘권을 인정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검찰이 경찰을 견제하고 국민 인권을 보호해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형사소송법 제312조가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와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를 차별하는 것도 경찰보다 검찰의 인권보호를 좀 더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제312조는 검찰(제1항)과 경찰(제3항)이 각각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의 법적 효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차별적으로 규정한다.
제1항: 검사가 피고인이 된 피의자의 진술을 기재한 조서는, 적법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서 피고인이 진술한 내용과 동일하게 기재되어 있음이 공판 준비 또는 공판기일에서의 피고인의 진술에 의하여 인정되고, 그 조서에 기재된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 하에서 행하여졌음이 증명된 때에 한하여 증거로 할 수 있다.
제3항: 검사 이외의 수사기관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는 적법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서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 그 피의자였던 피고인 또는 변호인이 그 내용을 인정할 때에 한하여 증거로 할 수 있다.
제1항에 따르면,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가 법정에서 증거로 쓰이려면, 피의자가 판사 앞에서 '그렇게 진술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진술해야 한다. 제2항에 따르면, 경찰이 작성한 조서가 증거로 쓰이려면, 피의자나 변호인이 판사 앞에서 '그렇게 진술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진술해야 할 뿐 아니라 거기에 더해 '진술한 내용이 사실입니다'라고 인정해야 한다. 경찰이 작성한 조서보다 검찰이 작성한 조서가 훨씬 수월하게 법적 효력을 인정받는 것이다.
이는 경찰이 작성한 조서는 객관적 진실과 다를 가능성이 있고, 검찰이 작성한 조서는 객관적 진실과 다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전제되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 법률 체계가 경찰보다 검찰을 더 신뢰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자료 중 하나다.
이렇게 상당한 신뢰를 받는데도 검찰은 국민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저버린 사례들도 적지 않다. 정보기관과 협조해 국민들을 간첩으로 내몬 경우도 한둘이 아니다.
제7차~제9차 검찰개혁 촛불문화제 때 엄청난 숫자의 촛불이 서초역 일대에 등장한 것은 그간 검찰이 쌓아온 자업자득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이 검찰개혁을 요구하시게 된 직접적 이유는 검찰의 제도와 조직보다 행동과 문화에 있습니다"라는 쓴소리를 들을 만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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