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올해로 창간된 지 100년이 되었다.
100년의 조선일보 역사는 친일과 독재의 한 몸이었으며, 왜곡과 거짓 뉴스로 점철되어 있다.
조선일보의 친일·반민주 악행을 고발하는 기획기사를 자주시보와 주권연구소 공동으로 연재한다.
-----------------------------------------------------------------------------
조선일보하면 떠오르는 말이 ‘방 사장’이다.
‘방 사장’이라 하면 방응모를 시작으로 방일영, 방우영 형제 그리고 방상훈에 이르기까지 조선일보 사주들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조선일보하면 친일, 밤의 대통령 이라는 단어들도 떠오른다.
조선일보의 논조가 반민족. 반민주, 반통일을 띠게 된 데에는 사주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일보 사주들의 행각에 대해서 살펴보자
◆ 법원도 인정한 방응모의 친일 행위
2009년 6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방응모에 대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조광(1935년 10월, 방응모창간한 조선일보 자매지)’에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글을 게재한 점 ▲일제에 군수품을 납품한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감사를 지낸 점 ▲조선총독부 관변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 발기인·평의원으로 활동한 점 등 3가지를 친일행위로 결정했다.
이에 방 씨 일가가 2010년 1월, 결정을 취소하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방응모에 대해 잡지 발행과 주요 간부로서 적극 협력한 부분을 친일행위로 규정했고, 군수품 제조업체 운영을 통한 친일은 인정하지 않았다. 2심은 잡지 발행과 군수품 제조업체 설립을 친일로 판단했다.
2016년 11월 9일 대법원은 위 소송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그 취지는 방응모 조선일보 사주가 ‘조광’에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글을 쓴 것만 친일행위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대법원의 판결은 항소심과 달리, 일제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조선항공공업’ 군수회사에서 감사를 지낸 전력은 친일행위로 보지 않았다.
당시 대법원 판결에 대해 반민족규명법의 취지를 너무 좁게 해석한 판결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대법원 판결에 대해 “전범단체인 조선항공공업에서 발기인과 감사를 맡은 것은 그 자체로 전쟁에 대한 협력 행위다. 구체적으로 회사를 직접 운영하지 않았으니 일제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부역은 했는데 친일은 아니다’라는 식의 논리적 모순이다”라고 지적했다
결국 2017년 5월 12일 서울 고등법원에서 방응모가 펴낸 잡지 ‘조광’에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글을 실은 행위만 친일행위로 봐야 한다는 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왔다.
조선일보가 소송까지 하면서 지우고 싶은 방응모의 친일행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빙산의 일각만 판결 받은 방응모의 친일행위
조선일보는 조일동화주의(朝日同化主義)를 표방한 대정친목회 대표 예종석을 앞세워 조선총독부의 발행허가를 받은 신문으로 태생부터 친일신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방응모가 1933년 7월 조선일보의 사장이 된 뒤부터 ‘황태자 전하의 어탄생’(1933년 12월24일 자) 사설 등 일본 왕실 찬양 기사가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 직후인 1933년 일본군에 고사포를 기증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주장했다.
1933년 4월 15일 작성된 일본 육군성 정무차관실 문서에 따르면, 조선과 중국에 거주하던 은행장과 기업가, 현역 장성 등이 ‘3년식 기관총’ 21개와 고사포 등을 일제에 헌납한 사실이 있다. ‘국방헌납 병기 수령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의 문서에는 기관총과 고사포 등을 헌납한 20여 명의 명단 가운데 방응모가 포함돼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방응모가 수많은 친일단체에 적극 가입했다고 밝혔다.
방응모는 ▲1937년 5월 조선문예회 회원 ▲1937년 8월 애국금차회 발기인 ▲1938년 7월 7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44년 9월 조선항공공업회사 자본출자·중역 등으로 활동했다.
방응모는 단체 가입뿐만 아니라 강연과 글을 통해서 친일 행위를 벌였다.
방응모는 1937년 2월 원산 순회강연에서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해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정한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비국민적 행위라면 일제에 반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방응모는 1938년 2월 일본인 천황주의자 도쿠도미 소호에게 정중한 연하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편지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일본어 편지를 번역한 것임)
신년 인사
“천리나 떨어졌지만 같은 바람 속에 있습니다. 우선 집안 여러분들이 더욱 건승하시고, 나이를 더 잡수셨으니 더욱 몸을 보중할 수 있기를 빕니다. / 저도 이제 무사히 신년을 잘 보냈습니다. 그 사이에 뜻밖의 보살핌을 내려주셔서 위로가 됩니다. / 위의 보내주신 말씀 곁에 새해를 축하하는 글을 써 두었습니다. / 나머지는 후일을 기약하겠습니다. / 총총 이만 줄이고, 편지의 형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 2월 초에 방응모가 / 소호 선생께 / 삼가 경성부 조선일보사 방응모가 드림“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 당하자 방응모는 월간지 조광 발행인으로 취임해 친일 행위를 이어갔다.
방응모는 1940년 11월 ‘조광’ 머리말에서 “국민된 자로서 누구나 실로 최후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태평양전쟁 개전 소식을 들은 뒤 감상을 적은 1942년 2월호 글에서 영국과 미국을 “동양의 원구자, 동양 전체의 죄인”으로 칭하며 “대동아전쟁은 그들에게 동양을 이탈해 세계 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1942년 조광 2월호를 통해 ‘타도 도양의 원구자’ 논문을 발표했다.
1943년 11월 ‘출전학도 격려대회’를 주최해 일본 전쟁터에 끌려 나가는 학도병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방응모가 이처럼 친일행위를 벌였기에 조선일보의 논조도 자연스럽게 친일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
◆ 독재자에게 훈장 받은 방일영, 방우영 형제
방응모는 아들이 없자 형의 아들인 방재윤을 입양한다. 방일영과 방우영은 그 방재윤의 아들들이다.
방일영은 1954년에 조선일보 대표이사로 취임해 경영권을 잡았다. 방일영이 1964년 회장에 취임하면서 동생인 방우영을 대표이사로 임명했다.
방일영과 방우영이 조선일보에서 대표로 있던 시기는 박정희, 전두환 등 군부독재 시절이었다.
조선일보가 이른바 ‘밤의 황제’, ‘밤의 대통령’이라 일컬어지기 시작한 것은 방일영, 방우영 형제 때문이다.
방일영과 박정희는 술자리를 함께할 정도로 매우 가까웠던 사이라고 한다.
박정희와 방일영 이 두 사람이 언제, 어떤 인연으로 친해졌는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방일영의 자서전 『격랑 60년-방일영과 조선일보(방일영문화재단, 1999)』에 따르면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신문사 사주들과 몇 차례 술자리를 가졌고 여기에 방일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방일영과 박정희가 가까워졌으리라고 판단된다.
이런 과정에서 박정희는 자신을 “대통령 형님”이라 부르는 방일영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팔자가 좋은 사람”이라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낮에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밤에는 임자가 대통령이구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방일영, 방우영 형제와 박정희 정권의 유착은 이미 60년대부터 나타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코리아나 호텔 건립을 둘러싼 일본 차관 특혜 제공이다.
“1968년 5월인가 조선일보하고 권력 사이에 아주 굉장히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조선일보가 코리아나 호텔을 짓는데 일본으로부터 400만 달러에 달하는 상업차관을 들여온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400만 달러라면 굉장히 큰돈이었어요. 그때 시중 은행의 금리가 연 26%였는데, 조선일보가 부담한 금리는 7% 정도에 지나지 않았어요. 박정희 정권이 조선일보에 굉장한 특혜를 준 겁니다. 그것이 저는 조선일보와 권력 간의 유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라고 보고 있거든요.”(신홍범 전 조선일보 기자/전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
방일영, 방우영 형제는 1970년, 박정희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방일영은 8월 15일 광복절에 ‘국가와 사회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이유로 방우영은 이에 앞서 5월 13일 “언론의 창달과 언론계 육성, 언론인의 자질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는 이유로 상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박정희 3선의 길을 연 1971년 4.27대선 결과에 대한 조선일보의 4월29일 보도를 보면 “아낌없는 축하를 보낸다. 4년간의 집정 공약을 다짐한 끝에 안겨진 승리의 영광이란데서 더욱 보람있는 순간의 감격은 값있는 것”이라고 축하했다.
박정희와 아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방일영, 방우영 형제는 언론 통제에 적극 가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5년 조선일보 기자들이 대량 해직된 사건이 발생한다.
기자들이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제작거부와 편집국 점거농성에 들어가자 32명을 무더기 해고한 것이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은 “박정희 군대가 산업혁명에 성공했다면 우리는 언론 혁명을 성공시킨 방우영의 혁명군”이라고 말했다.
방 씨 형제의 독재자 사랑은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에도 이어졌다.
1980년 5월 31일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를 출범시킨다.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던 방우영은 국보위 입법위원으로 참여한다. 전국지 규모의 언론사 사주로선 유일했다
이에 대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언론사 사주가 국보위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조선일보가 신군부와 밀착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사주의 신군부 지원은 신문 논조에도 영향을 미쳐 5·18 광주민중항쟁 때 광주 시민들을 ‘난동자’로 보도하고, 전두환을 ‘새 역사 창조의 주역’으로 두둔했다. 또 방우영의 국보위 참여로 조선일보는 신군부가 주도한 언론 통폐합에 포함되지 않아 조선일보가 최대 발행 부수 신문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일본 편에 붙어 민족을 배신하고 군부 독재 시절에는 권력에 야합해 민중을 배신한 것이 조선일보 역사의 100년이다.
[조선일보의 친일·반민주 악행] 일본이 좋아하는 조선일보 일본어판-> http://www.jajusibo.com/50771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