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글이 쓰인 당시 말고, 시간이 좀 지난 뒤 다시 보면 심각하게 웃긴 글들이 있다. 예를 들면 6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발표한 선대위 출범 연설문 같은 게 그런 거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그의 연설문 중 일부를 발췌한다.
“공정이 상식이 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 공정은 현란한 말솜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살아온 묵직한 삶의 궤적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부터 시작하는 윤석열표 공정으로 나라의 기본을 탄탄하게 하겠습니다. ··· 일한 만큼 보상을 받고, 기여한 만큼 대우를 받는 공정한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힘든 삶의 여정을 묵묵히 감내하며 내일의 희망을 꿈꾸는 국민들을 위해 기회가 풍부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지금 읽어보면 진짜 웃기지 않나? “일한 만큼 보상을 받고, 기여한 만큼 대우를 받는” 게 윤석열표 공정이라는데, 정작 그의 배우자는 일을 한 적도 없는 경력을 지원서에 적어놓고, 기여한 바도 없는 수상 경력을 자기 것으로 둔갑 시킨다. 그런데도 그는 무려 영부인의 대우를 받으려 한다.
“공정은 현란한 말솜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살아온 묵직한 삶의 궤적이 말해주는 것입니다”라는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뒤집어졌다. 아, 삶의 궤적이 참 묵직도 하시다. 얼마나 묵직하신지 쏟아지는 지원서 허위 기재 의혹이 열 손가락으로도 다 세어지지 않는다. 이게 안 웃긴가?
윤석열표 공정? 애초에 그런 건 없었다
아무튼 한바탕 웃긴 개그, 잘 봤다. 나는 윤석열 후보가 ‘윤석열표 공정’이라는 것을 들고 나왔을 때부터 그게 진심으로 웃기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민주화가 이뤄진 이후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자기만의 가치 없이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게 옳건 그르건 말이다.
그리고 자기만의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는 그 가치를 지지하는 새로운 세력이 있었다는 뜻이다. 즉 1997년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 이후 모든 대통령들은 자기만의 가치, 자기만의 세력을 창조하며 대권을 거머쥐었다.
비록 최악의 대통령이긴 했어도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이명박과, 박정희식 복고의 가치를 내세운 박근혜조차 자신만의 가치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윤석열 후보에게는 그런 게 아예 없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반(反) 문재인의 깃발뿐인데, 이건 자기만의 가치가 결코 될 수 없다. 당연히 그를 지지하는 세력도 그가 창조한 새로운 세력이 아니다. 윤석열 후보 자리에 꿔다 놓은 빗자루를 갖다 놓아보라. 그만큼 지지율이 안 나오나. 이건 윤석열 후보가 하나도 새로울 것 없는, 그냥 옛 보수의 총합체 같은 인물이라는 뜻이다.
가진 게 없다보니 내세울만한 철학이 없다. 그러다보니 겨우 하나 찾아낸 것이 윤석열표 공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조차 무슨 철학적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나는 반(反) 문재인이다”를 좀 있어보이게 표현한 것인데, 아무리 검토해 봐도 윤석열 후보와 그의 가족들은 자신의 기준으로도 공정한 삶을 산 자들이 아니다. 즉 윤석열표 공정은 애초부터 자신의 ‘철학 없음’을 숨기는 허상이었다는 이야기다.
무엇이 공정한가?
지금부터는 윤석열표 공정을 조금 심도 깊게 분석을 해보자. 이게 ‘심도’씩이나 필요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가 그 허황된 윤석열표 공정 하나로 유력 대선후보가 되었으니 이걸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윤석열표 공정은 크게 ①힘든 삶의 여정을 묵묵히 감내하는 국민들에게 풍부한 기회가 부여되는 세상과 ②일한 만큼 보상을 받고, 기여한 만큼 대우를 받는 세상 이 두 가지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이 두 문장은 서로 심각한 충돌을 나타낸다. ①힘든 삶을 묵묵히 감내하면 기회가 주어지고 ②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게 공정이라는데, 현실은 ①힘든 삶을 아무리 묵묵히 감내해도 ②보상은커녕 제대로 일을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다’는 말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가면 큰 보상을 받는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건 절대 힘든 삶의 여정을 묵묵히 감내한다고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 아무리 힘든 삶의 여정을 묵묵히 감내해도 저 보상은 대부분 있는 집 자식들과 사회적 기득권들이 차지하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우기지 말라. 한국장학재단의 국가장학금 통계에 따르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이른바 SKY로 불리는 명문대 신입생 중 고소득층(월 소득 949만 원 이상) 자녀 비율은 2020년 절반이 넘는 55.1%였다. 이 중 서울대의 고소득 가정 출신 신입생 비율은 무려 62.9%였다.
의대도 마찬가지다. 전국 40개 의대 신입생의 52.4%가 고소득층 집안 출신이고, SKY 의대 신입생 중 고소득층 자녀 비중은 무려 74.1%에 이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나? 한국 사회가 공정을 ‘누구나 동일선상에 서게 한 뒤 달리기 시합을 시켜 이긴 자에게 상을 잔뜩 주는 일’ 정도로 잘못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런 공정은 결국 기득권층의 권력을 강화시킬 뿐이다. 헤비급과 플라이급을 한 링에 올려놓고 “공정하게 복싱 룰로 싸워! 이긴 자에게 상을 잔뜩 줄 거야”라고 말하는 게 어떻게 공정한가?
그들의 공정은 공정이 아니다
그래서 윤석열 후보의 고민 없는 공정은 기득권 권력의 끊임없는 강화를 낳는다. 이 때문에 그들 부부는 이력서에 허위를 기재하고도 “돋보이려고 한 일인데 그게 무슨 잘못이냐?”라고 큰소리를 친다. 왜냐하면 그들의 공정은 결국 기득권을 강화하는 것인데, 자기들이 한 짓 또한 기득권을 강화한 것이니 매우 공정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윤석열표 공정이 현실화되면 벌어질 일을 상상해보자. 검사들은 공정하게(!) 사법고시를 합격해 권력을 잡았으니 그 권력은 더욱 비대해 질 것이다. SKY 출신 고위 관료들 또한 공정하게(!) 행정고시를 통해 권력을 잡았으니 그 보상이 하늘을 찌를 것이다.
윤석열표 공정이 극대화된 사회가 바로 속칭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아이비리그에 진출해 월스트리트에 채용되면 그들은 일약 사회 0.1%가 돼 평생을 떵떵거리고 산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게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다”라고 떠든다.
하지만 정작 그 사회에서 살아보면 아메리칸 드림이 얼마나 개풀 뜯어먹는 소리인지 누구나 실감할 것이다. 열심히 공부를 하면 아이비리그에 입학할 수 있나? 태어나보니 공부는커녕 하루하루 살아갈 길이 막막한 경우가 태반인데?
사람들은 ‘나도 열심히 하면 저렇게 될 수 있어!’라고 착각할지 모르나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그건 미국이 지향하는 공정이 아니고, 윤석열 후보가 지향하는 공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링 위에 올려놓고 “싸워서 이기면 상을 줄게”라고 이야기하려면 최소한 모든 사람들이 링 위에 올라가 상대와 싸울 수 있는 동일한 체급부터 갖춰야 한다. 그게 진짜 공정이다. 즉 공정이라는 가치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이 땅에 태어난 그 누구도 보편적으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기본적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표 공정에는 이 중요한 전제가 빠져 있다. 그러니 기득권이 기득권짓 하는 게 공정으로 둔갑되고, 가족의 허위 지원서 기재에 대해 대통령 후보가 “뭐가 문제냐?”며 성질을 내는 사태가 벌어진다.
윤석열표 공정은 지금 당장 쓰레기통에 내다 버려야 한다. 그가 이미지를 조작한 이 엉터리 공정을 빼고 나면 윤석열 후보의 실체가 보일 것이다. 그게 뭐냐고? 반 문재인 빼면 아무런 가치조차 없는, 그냥 보수 기득권 세력의 꼭두각시가 되어 이 땅의 공동체성을 마구 짓밟을, 절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최악의 정치인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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