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하는 마음에 내가 미친 짓을 한 거 아냐?'
'그래도, 여자라서 이장을 할 수 없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
'아니야, 굳이 내가 이장을 할 이유는 없지, 부산댁 언니도 있고, 할 사람도 많은데.'
남편은 물 만난 고기처럼 지느러미를 바쁘게 움직였다. 마을 회의가 끝나자마자 남편은 반장과 소평댁, 그리고 부산에서 귀촌한 부산댁을 선거사무실로 변한 우리 집으로 불러들였다. 박 영감에게 배신을 당해 의기소침해진 반장을 향해 남편이 진지한 표정으로 뻐끔뻐끔 입을 열었다.
"반장님은 이번에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서 박 영감 아저씨한테 복수를 한번 하시구요."
"선거대책본부장? 그게 뭐 하는 물건인데, 그 형님한테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거야?"
"소평댁 아주머니는 조직국장을 하시면 되고, 부산댁 아주머니는 비서실장, 그리고 저는 선거사무장을 맡는 걸로···."
"이봐, 위원장! 이게 무슨 자다가 남의 다리 긁고 안 시원하다고 화내는 소리야?"
"반장님, 아니 본부장님! 우리 후보자님을 이장으로 만들려면 선거조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급하게 조직을 만들었구요."
"거참, 나랑 소평댁, 부산댁이 승낙을 해야 조직이든 뭐든 만들어지는 거지. 뭐 자네 혼자서 지껄인다고 조직이 만들어지는 건가? 자네가 선거에 대해 뭘 안다고···."
"선거라면 제가 또 왕년에··· 어쨌거나 용장 밑에 약졸 없다고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약졸? 그러면 내가 자네 밑에 졸개라는 말인가?"
후보자님? 남편에게 들어본 말 중에 가장 극존칭이었다. 아무튼 나는 이 인간의 종잡을 수 없는 정신세계에 아직도 적응하기가 힘들다. 연애 시절 남편의 단순하고 예측 가능했던 그 캐릭터는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남편이 선거와 관련해서 반장에게 한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남편이 몇 년 전 선거 공부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지방 선거 때 선거사무장 자리를 제안 받고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더니 아프다고 방에 드러눕고 말았다.
어쨌든 마을에서 이장을 선출하는 선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우리 마을의 이장 임기는 2년인데, 통상적으로 한 번 이장을 맡으면 4년에서 6년 정도 연임을 했다. 그리곤 현재 이장이 다음 이장을 추천하면서 인물이 바뀌는 방식이었다.
삼고초려
일주일 뒤에 투표가 예고되어 있었지만 마을은 잠잠하고 조용했다. 세기가 바뀌고 처음 있는 이장 선거라서 다들 투표의 중요성에 대해 까먹었거나, 21세기와 이장 선거가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그놈이 그놈이다' 같은 냉소주의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을에 깔린 고요함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이봐, 선거사무장!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고! 저쪽에서는 어젯밤에 벌써 술자리가 한판 거하게 벌어졌다잖아. 박 이장이 노인네들을 모아놓아 삼겹살에 족발에···. 우리도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니냐고!"
새벽에 눈길을 뚫고 집에 들이닥친 반장은 땡감이라도 씹은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남편에게 쏘아붙였다. 남편은 떡진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잠깐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잠이 덜 깨서 상황이 정리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저께 반장님이 선거대책본부장 맡는 거에 대해 부정적이시길래···."
"제대로 된 인재를 얻으려면··· 암튼 자네는 삼국지도 안 읽어봤냐고?"
"네? 읽어본 지가 하도 오래돼서···."
"허허, '삼고초려'라는 말도 몰라? 자네도 이미 눈치 채고 있겠지만, 내가 쉽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고. 어제 낮잠을 자며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더니만 나타나지도 않고 말이야."
그제야 남편은 대강 감을 잡은 듯했다. 반장이라는 이름의 감은 단단한 단감이 아니라 세게 움켜쥐면 터져버리는 몰캉몰캉 홍시였다. 반장은 선거대책본부장의 추대 방식이나 남편이 사용한 약졸 같은 단어 때문에 껍질이 터져서 흐물흐물한 다홍빛 과육을 쏟아 냈다. 남편이 너무 꽉 움켜잡은 것이다.
그날 오전에 반장과 소평댁, 부산댁이 다시 우리 집에 모였다. 새벽에 남편의 거듭된 사과를 통해 자존심을 되찾은 반장은 의욕이 충만했으나, 소평댁과 부산댁은 왜 이걸 해야 하는지 의문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나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아서 떨떠름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일전에 제멋대로 지껄인 점에 대해서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제가 임명을 한 게 아니라 추대를 한 건데, 표현이 좀 더러웠습니다. 죄송합니다."
"허허, 우리 사무장이 더럽게 열정적이라 그런 거니 다들 이해할 거고. 그래, 후보자님을 이장으로 만들려면 우리가 앞으로 뭘 해야 할까?"
반장은 남편을 대견스럽다는 듯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네, 본부장님은 전반적인 업무를 총괄하시면서, 동네 어르신들에게 고문이나 자문위원 같은 감투를 그냥 막 떠넘겨버리시구요."
"왜?"
"일단 많은 분에게 자리를 나눠드리고, 그중 얼마라도 표로 연결되면 고맙죠."
남편은 조직국장을 맡은 소평댁에게는 마을의 여론 조성과 상대편의 동향 파악을 부탁했고, 비서실장인 부산댁에게는 후보자의 일정 조율과 귀농·귀촌인들의 표 관리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기획실장과 상황실장을 겸하면서, 더럽고 냄새나는 일은 알아서 처리하고 자신의 손에만 피를 묻히겠다고 다짐했다.
남편이 마치 전문가처럼 비교적 상세하게 업무를 분담하고 설명하자, 선거조직에 가담한 사람들의 표정이 상당히 밝아졌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남편이 반복적으로 세뇌하듯 강조했기 때문에 다들 뭔가 그럴듯한 일을 한다는 기분에 사로잡힌 듯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때까지도 요동치고 있던 터라, 남편이 껍데기만 그럴싸한 '떴다방 선거기획사'의 사기꾼처럼 느껴졌다.
네거티브
오후에 우리 집으로 다시 조직의 모든 인원이 모였다. 오전과는 달리 소평댁과 부산댁도 상기된 얼굴로 약간 흥분된 모습이었다. 농한기인 겨울이라 심심하던 차에 재미난 소일거리라도 발견한 듯한 분위기였다.
다들 흥미진진한 놀이에 동참한 것 같아서 나 역시 기분이 한결 나아졌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남편은 너무 진지했다. 조직원들이 돌아올 때까지 남편이 혼자 끙끙거리며 노트에다 뭔가를 열심히 적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반장, 소평댁, 부산댁의 업무 보고가 이어졌다. 상대편의 다음 행보는 아직 파악할 수 없었고, 주민들 모두 누구를 지지할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반장은 우 이사만 자문위원 자리를 승낙했다며, 다들 엉큼한 능구렁이라며 투덜거렸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우리 쪽의 확실한 고정지지층은 여기 모인 다섯 명과 우 이사님 포함 총 6명으로 보면 될 것 같구요. 박 이장과 박 영감 그리고 무산댁 포함 총 8명을 저쪽의 고정지지층이라고 생각하면, 제 계산상으로는 총 45명이 부동층입니다. 이번 선거의 핵심 관건은 이 부동층을 설득해서 우리에게 표를 던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아, 내가 우리 사무장을 그동안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네. 아주 활명수야 활명수!"
반장의 한마디에 남편은 일희일비의 전문가답게 잇몸을 드러내고 낄낄거렸다. 남편이 대놓고 칭찬을 즐기자 다들 예의상 그냥 어색한 웃음만 표현하고 있었는데, 반장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래, 근데 뭘로 설득을 한다는 건가?"
"그건··· 우리 후보자님의 장점을 내세우는 포지티브 캠페인을 할지, 아니면 저쪽의 약점을 공략하는 네거티브 캠페인을 할지는 우선 조금 더 의논을 하고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대략 좋은 말이군, 흠···."
반장은 막힘없이 술술 흘러나오는 남편의 답변에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허세 가득한 잇몸이 보기 싫었던지 말끝을 흐려버렸다. 기고만장해진 남편의 눈에는 반장의 그런 태도가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남편은 나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객관적으로 거짓 없이 이야기해 달라고 한 뒤, 내게는 10분만 잠깐 밖에 나가 있으라고 말했다. 내가 앞에 있으면 솔직해질 수 없다는 게 이유였고, 나는 빗자루로 집 근처의 눈을 치우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자, 우리는 이번 선거에서 그동안 박 이장이 동네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점을 공략하는 네거티브 캠페인을 진행할 겁니다. 다들 찬성하시는 거죠?"
남편의 선언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나는 내세울 장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후보자가 돼버렸다. 그들은 내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밤에 다시 모이기로 약속한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 곁이 아니라 남편 곁을 떠났다. 나는 뭐랄까 이장 후보자가 아니라 바지사장이 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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