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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드는 택배, 쏟아지는 욕설에 "죄송합니다"만 반복했다

[노동수기]  나는 인생을 실어 나르고 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주최한 제 3회 '난생처음 노동문화제'가 지난해 12월 열렸다. 나와 내 주변의 노동 이야기를 응원하고 노동존중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 마련된 공모전이다. 이번 '난생처음 노동문화제'에선 동영상(6)·웹툰(5)·독후감(7)·노동수기(7) 부문에서 24개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프레시안>에서는 이중 '노동수기' 부문에서 당선된 작품 세 편을 싣는다.

 

*영상 부문 수상작은 한국노총 유튜브(바로가기 : 클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웹툰, 독후감, 노동수기 부문 수상작은 한국노총 뉴스페이지(바로가기 : 노동과 희망)에 순차적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고등학교 3학년이 끝나가고 수시 결과가 하나하나 나오는 시기에 나도 대학교에 합격하였다. 합격하여 생긴 기쁨도 잠시, 나는 앞으로의 대학 등록금을 어떻게 충당해야 할지 고민에 휩싸였다. 인구 4만 명밖에 되지 않는 매주 조그만 강원도 시골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는 매우 쉽지 않았다. 대부분이 지인을 통하거나 내정자가 정해져있었다. 3개월도 안 남은 겨울방학 기간 동안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으며, 고민의 결과는 합격한 대학교 지역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대학교 합격 지역에 근처에 있는 고시원에 입주하여 생활을 하니 본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도시 지역이라 그런지 좋은 인프라와 환경을 체감하니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었지만, 설렘도 잠시, 나는 곧바로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통해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디 돈 많이 주는 곳 없나?"

 

 

나의 우선순위는 돈이었다. 주변 지인들은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 돈의 중점을 두지 않고 노동 강도가 약한 곳, 복지, 집과의 거리 등을 고려하여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노동의 강도가 힘들어도 돈만 많이 주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이 없었다. 나의 첫 아르바이트 경험이 될 C회사의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지원했다. 흔히 택배 상하차라 함은 택배 터미널 등의 물류센터에 도착하는 상품들을 트럭에 싣고 내리는 일이다. 상하차 알바는 주위 사람들 소문이나 인터넷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듯 '지옥의 아르바이트', '북한에 아오지 탄광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택배 상하차가 있다' 등 여러 소문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시대에, 사람들이 하는 곳인데, 힘들어봐야 얼마나 힘들다고"라는 생각을 가지고 다음 날 대구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통근버스를 탑승하러 갔다.


 

통근버스를 타러가니, 버스가 거의 만석이었다. 대구에서 대전까지 통근버스를 타고 2시간 30분이 소요되었고 대전에 도착하니 시계는 1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버스에서 하차한 사람들은 본인이 아르바이트를 지원할 때 해당하는 각 반장님들에게 집합을 하였고, 처음 온 사람들은 출석체크 앱 다운, 안면인식 등록, 몸 상태 점검, 안전 교육을 받고 일터에 투입된다. 나는 이 당시 첫 출근이라 지시사항을 모두 따르고, 안전 교육을 받고, 18시 30분쯤에 상차 역할을 배정받았다.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오는 택배들을 남자 두 명이서 화물트럭에 차곡차곡 싣는 일이었다. 처음이라 정신 바짝 차리고 엄청 쏟아지는 택배들을 빠르게 화물트럭에 싣고 있었다. 그러자 뒤에서 소리를 지른다. 관리자였다.

 

"그딴 식으로 일해서 집 가겠어요?!"


 

처음에는 나한테 하는 소리인 줄 몰랐다. 관리자가 나한테 직접 오더니 "그렇게 일 할 거면 집이나 가라", "누가 일을 그렇게 하냐", "일도 참 못하게 생겼다" 등 나의 일처리 능력 부분에 대한 지적과 인격을 모독하는 욕설을 1분가량 들었다. 나는 "죄송합니다" 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일을 하러 돌아갔고, 나는 옆에 같이 일하던 사람에게 요령을 배우면서 일을 했다. 컨베이어 벨트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고 산처럼 쏟아지는 택배들 속에서 트럭의 절반을 택배로 채워넣었다. 땀이 비가 오듯 쏟아지며, 옷을 전부 적시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가지고 온 물을 전부 마셔 물이 없었기에 목이 타들어가는 듯 했다. 웬만하면 또 욕먹기 싫어서 참고 일하려고 했지만, 탈수로 쓰러질 것 같아서 나는 관리자한테 갔다. 나는 매우 간절하게 말했다.


 

"잠깐 물 좀 빠르게 마시고 와도 될까요?"


 

이에 대한 관리자의 답은 “일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트럭 한 대 다 채우고 물을 마시러 가세요.”였다. 이 곳에서 휴식 시간 같은 건 애초에 마련되어 있지 않다. 컨베이어 벨트가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이기 때문이다. 휴식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쉰다. 상차의 경우 트럭 한 대에 택배를 다 싣거나, 하차의 경우 트럭 한 대의 택배를 다 내리고 다른 트럭이 올 때까지 5~10분 동안만이 휴식 시간이었다. 그 전까지는 절대 쉴 수 없었으며, 일하는 동안에 나가는 방법은 쓰러지는 것 밖에 없었다.


 

그렇게 트럭 한 대를 다 채우고 트럭이 빠져나가고 다른 트럭이 새로 들어오는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물을 마시러 갈 수가 있었다. 물을 마시고 여분의 물을 챙겨오면서 잠깐 주위를 둘러보는데, 여러 곳에서 관리자들이 노동자들한테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하는 것이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정도의 관리자들이 40~50대 일용직 노동자들한테 욕설을 하는 것은 부지기수였다. 시기가 겨울이라 사람들은 찬 공기를 맞으면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위이잉-' 계속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소리를 음악으로 삼아 택배를 실었다.


 

ⓒ연합뉴스
 

너무 힘들어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일만 하던 와중 24시가 되자, 식사시간이니 식사를 하고 오라는 관리자들의 목소리가 일터 전체에 퍼졌으며, 그와 동시에 컨베이어 벨트와 많은 택배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식사 제한 시간은 50분이었으며, 3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서 먹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사내에서 운영하는 식당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첫 번째는 단순 빵 하나와 우유를 받는 방법이었다. 세 번째는 컵라면 하나와 밥 한 공기를 먹는 방법이었다. 만약 빵 하나와 우유를 지급받았으면, 컵라면과 밥은 지급받을 수 없다.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나는 사내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차갑고 딱딱한 생선가스와 충분하지 않은 밥의 양, 너무 힘들어서 밥이 잘 들어가지도 않았다. 여기서 어떤 방법으로 끼니를 채우던 나의 일급에서 7000원이 제외된다. 그런데 3가지 방법 중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고 밥을 안 먹어도 7000원이 제외된다고 한다.


 

밥을 다 먹고 일터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거리에는 흡연 부스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탈진하여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사람들, 서로 나이 대가 다르고 오늘 만났지만,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 등 이 사람들은 사회가 어떤 것을 요구하길래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면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날 밤, 밤하늘의 별들이 그때만큼은 유독 높게 떠있었다. 그건 나의 성공과 노력의 거리였을까.


 

"노력하면 언젠간 성공에 다다르겠지."


 

그렇게 식사 시간이 지나고 다시 컨베이어 벨트 가동소리에 맞추어서 택배들이 쏟아진다. 첫날이고, 몇 시간 밖에 일을 하지 않았지만, 옆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도움을 줘서 이제는 제법 요령이 붙었다. 요일마다 다르지만, 보통 하루에 상차는 10대 내외의 트럭을 다 채우면 일이 거의 끝난다고 하였다. 일을 하다 보니, 갑자기 뉴스에 물류센터에서 과로사로 일용직 노동자가 사망하거나 사고가 발생하고 택배 배달 기사님들이 과로사로 사망하였다는 기사들이 그때 내 뇌리를 스쳤다. 살인적인 업무량을 직접 체감하고서야 왜 택배 업계 종사자들이 과로사로 숨지는지에 대해 십분 이해했다. 나는 이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예전에 이런 뉴스나 기사를 접해도 뭔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였지만, 이런 감정은 아니었다. 이제는 함께 분노하고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조합에 연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07시 30분이 되어서야 모든 컨베이어 벨트가 멈추었고, 오늘 할당량이 끝났다는 관리자의 말을 듣는 동시에 나의 첫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는 끝이 났다. 일을 끝나고 난 후에 나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허리는 박살난 느낌이었고, 거의 탈진하여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집합하고 출석체크를 한 뒤에 통근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관리자 중 한 분이 오늘 일급은 오늘 오후 중으로 지급된다고 말씀하였다. 통근버스가 도착하여 다시 대전에서 대구로 향하였다. 출근했을 때에 통근버스는 만석이었지만, 퇴근할 때에 통근버스는 절반가량이 빈 자리였다. 나는 앉자마자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대구에 도착하니 오전 09시 10분쯤 되었다. 나는 고시원에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 일어나려 하니 허리를 거의 움직일 수 없었고, 근육통으로 내 몸을 지배했다. 일급을 확인하니 세금과 식비가 제외된 11만8267원이 들어와 있었다. 18시 30분부터 다음날 07시 30분까지 새벽에 일을 하였지만, 야간 수당이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 아르바이트에 지원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부당해도 돈만 봤을 때는 이 일이 돈이 많이 주기 때문에 나는 이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다음 날에도 출근하겠다는 의사를 반장님한테 보낸다.  

 

그렇게 평균 12만 원~13만 원의 일급을 받으면서, 나는 매일 같이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러간다. 그렇게 방학동안 상하차 알바를 통해 돈을 모아 대학교 등록금을 보탰다. 코로나19로 인해 학교들이 거의 2년 동안 비대면 수업을 실시하고 많은 알바자리가 사라진 요즘, 나는 지금까지 2년 동안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꾸준히 하였으며, 현재도 꾸준히 하고 있다. 나는 택배를 싣고 나르는 것이 아닌, 인생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상하차 알바를 2년 동안 해도 상하차 아르바이트의 첫 날에 기억과 다짐했던 생각들은 잊을 수가 없으며, 2년이라는 기간 동안 웬만한 상황을 겪어보니 이 사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동력으로 움직이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이유로는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내가 상하차 아르바이트에 지원하고 일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내 인생이 비참하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 이유는 나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서 택배 종사자 분들을 낮잡아 보는 마음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첫 날에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택배 종사자분들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일용직 노동자들의, 아니 모든 노동자들의 노고들과 헌신을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 사회에서의 영웅이었다. 모든 노동자들 덕분에 우리는 모두 편리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제는 항상 감사와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노동자들을 대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정규직의 갑질, 장기 알바의 텃세, 일용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 등 아직 시대가 변했어도 변해야 할 부분들은 많다. 이는 노동자만 노력한다고 바뀌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에 대해 목소리를 내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동조합’의 활동들에 대해서 일반 시민들은 무관심하거나, 좋지 않게 보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에 대한 인식부터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노동자들은 혁명과 여러 노력을 통해 스스로 권리 신장이라는 쾌거를 이루어내었고, 이에 따른 모든 경험들이 이후에 노동자들이 '자율과 선택의 주체', '소비하는 주체'의 모습으로 변모해왔지만, 시대가 변했어도 여전히 사회 속 노동자들의 삶은 피폐하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2011216532725200#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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