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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투쟁, ‘국정원 개혁’ 이라는 함정

대포로 파리 쏠텐가,승복과 불복 논할 때 아냐
 
정주식 | 2013-08-04 20:48:0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인쇄하기메일보내기
 
 


 

<서울광장으로 나온 민주당 출처:오마이뉴스>

민주당이 거리로 나왔다. 원내투쟁과 장외투쟁 사이에서 고민하던 민주당이 결국 31일 서울광장에 '민주주의 회복과 국정원 개혁 국민운동본부'를 설치하고 첫 '천막 의원총회'를 가졌다. 뜻밖이다. 김한길 대표 체제 아래서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거리정치에 나설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광장에 천막본부까지 설치한 것을 보면 꽤나 수위가 높다. 줄곧 국정조사 무용론을 제기해 온 필자와 같은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장외투쟁에 임하는 민주당의 태도가 그리 강경한 것은 아니다. 어제 국민운동본부 민병두 본부장은 "시민사회단체의 장외 촛불집회의 요구사항은 남재준 국정원장 해임,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 국정원 개혁으로 압축된다"면서 그들의 뜻과 함께하는 것이 장외투쟁의 취지라고 설명했다. 김한길 대표 역시 "민주당은 민주주의 회복과 국정원 개혁을 위해 국민과 함께 나설 것"이라며 이번 투쟁의 목적을 밝혔다.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뜬구름 잡는 구호를 들어내고나면 민주당의 천막투쟁 목적은 국정원개혁만 남는다. 여러 언론에서는 벌써 '국정원개혁 운동본부'라고 줄여쓰고 있다. 거대야당이 거리로 나선 목표가 고작 국정원 개혁이라면 너무 초라하다. 대포로 파리를 쏘는 격이다.

물론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구호는 해석에 따라 많은 의미를 담아낼 수 있다. 그안에는 국정원 개혁이나 국정원장 해임, 대통령의 사과와 같은 여러 가지 의미가 혼재돼 있다. 당내 강경파과 온건파의 입장을 적절하게 뭉뚱그려 놓은 정치적 구호로 보인다.아쉽다. 이왕 '대군'을 이끌고 거리에 나섰다면 민주당은 그 명분을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국정원사건 진상규명'이라는 명료한 구호를 놔두고 굳이 저런 애매모호한 말로 초점을 흐려야 했는지 모르겠다.

대포로 파리 쏠텐가

'국정원 개혁'이라는 구호가 전면에 나서는 것 역시 좋은 일이 아니다. 국정원 개혁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자 당위이지만, 지금 시점에서 이것이 이슈의 중심에 놓이는 것은 몇 가지 측면에서 위험하다.

첫째, 순서의 문제다. 국정원 개혁은 사태의 본질을 비껴간 '재발방지대책'이다.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진상규명과 처벌보다 앞설 문제는 아니다. 정보기관의 조직적인 대선개입이라는, 이미 발생한 중대한 문제를 제껴둔 채 부차적인 재발방지대책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순서가 틀렸다.

장장 6개월간 이루어진 검경의 수사과정에서는 온갖 외압과 은폐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추진했던 국정조사는 새누리당의 발목잡기로 좌초됐다. 원세훈 원장에 대한 구속수사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던 말도 안되는 수사가 끝났을 뿐이다.

국정원과 전정권, 현정권의 책임범위가 서로 어디까지인지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발방지대책부터 논의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태도다. 국정원이 이번 사건의 몸통이었는지, 수족이었는지 아무것도 밝혀진바가 없다. 이런 상태에서 국정원 개혁을 말하는 것은 공허하고 이상하다. 국정원 개혁이나 대통령의 사과 같은 문제들(국정원장 해임의 문제는 조금 다르다)은 사건의 전말이 명확히 드러난 뒤 그 결과에 따라 적절하게 논의되어야 할 '후순위'의 문제들이다.

둘째, 의도의 문제다. 올해초 국정원사건의 전모가 서서히 드러나자 지상파와 종편, 보수언론들은 약속이나 한듯 역대 정보기관장들의 흑역사에 대해 특집보도를 내보냈다. 김형욱, 이후락 같은 인물들의 비화가 이번 사건과 대체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청와대와 여당, 보수언론들이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의 초점을 국정원 개혁에 맞추는 것은 사건의 특수성을 은폐하고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이번 사건을 오래전부터 상존했던 정보기관의 문제의 연장선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국정원사건의 본질은 개혁되지 못한 정보기관의 문제로 귀결된다. 대단히 위험한 접근이다.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에 개혁되지 못한 정보기관의 '구습'이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이 대단히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진 민주주의 파괴행위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가 최고정보기관이 대선 등 각종 선거에 개입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전담조직을 설치하고 조직적으로 여론몰이에 나섰다.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초유의 일이다. 한국의 TV는 이런 사건을 늘 있었던 일처럼 담담하게 보도한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정보기관이 권력에 유착해온 것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나, 이번처럼 노골적으로 민주주의의 목에 칼을 들이댔던 사건은 없었다. 이것이 ‘늘 있어왔던 문제’쯤으로 일반화된다면 사건의 본질은 희석되고 문제해결은 방향을 잃게 된다.

이시점에서의 '국정원 개혁' 구호가 위험한 세번째 이유는 이것이 새누리당의 출구전략이기 때문이다. 국정원사건과 관련해 여야와 청와대의 입장이 대체로 일치하는 부분은 국정원 개혁이 유일하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새누리당이 크게 반대하지 않는 유일한 사안이다. 장기적으로 볼때 국정원 개혁은 국정원정국에 대한 새누리당의 출구전략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진상규명 이전에 문제해결의 초점을 국정원 개혁에 맞추면 국정원을 이번 사건의 몸통으로 예단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들 입장에서는 정권의 정통성문제를 건드리지 않고도 민심을 수습할 수 있는 '적정수준'의 해결책인 것이다. 국정원개혁이라는 부차적인 문제를 사태해결의 본질로 이해하는 순간 새누리당의 출구전략을 돕는 꼴이 된다.

이런 이유들로 국정원 개혁의 목소리가 전면에 나오는 것은 우려스럽다. 이런 우려는 민주당 뿐 아니라 장외투쟁에 나선 모든 정당과 시민사회에도 공히 해당된다. 국정원을 개혁하든 해체하든 그런건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끝난 뒤 이루어질 일이다.

<'국정원 개혁'은 잠시 뒤로 미루자>

승복과 불복 논할 때 아냐

야 3당이 모두 거리에 나서자 새누리당은 이를 '대선불복'이라며 비난하고 나섰다. 허나 이것은 대선불복 or 승복의 문제라기보다는 선거부정을 인정하는가 or 인정하지 않는가의 문제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민주주의는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구현된다. 과정의 문제를 규명하려는 노력을 '대선불복'같은 반민주적인 표현으로 매도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이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검∙경의 수사는 지난 대선과정에서 벌어진 국정원사태의 의문을 전혀 풀지 못했다. 이것을 해결하고자 추진했던 국정조사는 여당의 방해로 실패했다. 과정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지 못한 상태에서 승복∙불복을 논하는 것은 순서가 틀렸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사태수습이 아닌,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다. 그 수단이 국정조사든, 특검이든, 전면 거리투쟁이든 목표는 다르지 않아야 한다.

 

어떤 야권지지자들은 새누리당의 일사불란한 조직문화를 부러워한다. 물론 민주정당에게 일사불란함은 좋은 덕목이라 할 수 없지만, 이것은 장외정치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민주당같은 거대정당에게 장외정치란 둘도 없는 비상상황이다. 국회에서 우왕좌왕하며 새누리당에게 휘둘려왔던 민주당이 거리에서마저 좌고우면 한다면 정말 심각한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 지도부는 분명한 입장정리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민생이니 국정원 개혁이니 하는 어설픈 구호로 장외투쟁의 갈피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모처럼 야성을 드러낸 민주당이 작은 함정에 빠져 일을 그르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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