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연장전' 성격으로 치러진 지방선거가 국민의힘의 압승으로 마무리됐다. 대선이 0.73%포인트 차이로 끝난 여파로 '반윤(反尹) 정서'가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대치 정국도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지방선거 압승으로 전국적으로 지지기반을 다진 윤석열 대통령은 2024년 총선까지 정국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했다.
尹대통령, 보수‧중도 '투트랙' 광폭 행보
새 정부 안정론에 표심이 몰린 이번 지방선거의 최대 수혜자는 윤 대통령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윤 대통령은 지난 달 10일 취임 이후 전통적 보수층과 중도층 표심을 아우르는 광폭 행보로 국민의힘을 뒷받침했다.
취임식에서 윤 대통령은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다"며 강성 야당에 각을 세우는 한편, 통합·협치·소통보다 "자유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며 보수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매머드급 외교 이벤트인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와 차별화된 노선으로 전통적 보수층에 눈도장을 찍었다. 윤 대통령은 한미동맹 강화, 확장억제력 강화, 상호주의 중심의 외교‧안보 정책을 내세웠다.
경제 노선에서도 보수층에 소구할 만한 행보가 이어졌다. 취임 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5대 기업 총수들과 세 차례나 만나 친기업 면모를 드러냈으며, 재계의 숙원인 규제 철폐에는 "어렵고 복잡한 규제는 제가 직접 나서겠다"고 팔을 걷기도 했다.
지방선거를 이틀 앞두고 정부는 '긴급 민생안정 10대 프로젝트'를 통해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 등 보유세 세액을 2년 전 수준으로 낮추는 '부자 감세'로 문재인 정부 정책과 분명한 선을 그었다.
중도층에 초점을 맞춘 외연확장 행보도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조치로 읽혔다. 내각과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참석을 직접 독려한 윤 대통령은 "오월 정신은 국민통합의 주춧돌"이라며 5.18 민주화운동에 불편함을 내비쳤던 과거 국민의힘 계열 정부와 다른 태도를 보였다.
닷새 뒤인 23일 봉하마을에서 열린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에도 한덕수 국무총리와 김대기 비서실장을 비롯해 국민의힘 지도부가 참석해 국민통합과 진영 갈등 극복 메시지를 극대화했다.
지난 대선에서 부메랑이 됐던 성차별 등 젠더 이슈에도 윤 대통령은 다소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내각에 여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커지자 윤 대통령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가 정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시야가 좁았다"고 자세를 낮췄다. 또한 윤 대통령은 앞선 후보자들의 낙마로 공석이 된 교육부와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를 모두 여성에 할애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31일 부산 중구 자갈치 시장을 방문,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당 참패가 尹대통령에게 '꽃길'을 보장할까?
이처럼 윤 대통령이 사실상 이끈 지방선거가 국민의힘의 압승으로 귀결된 만큼, 윤 대통령은 향후 국정운영을 공세적으로 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17곳에서 치러진 광역단체장 선거 결과는 '0.73% 대선' 이후 석달만에 힘의 균형추를 여권으로 확연하게 기울였다. 국민의힘은 12곳에서 승리를 확정지었다.
민심의 바로미터인 수도권(서울‧경기‧인천) 선거에서 반전을 거둔 대목이 윤 대통령에게 고무적이다. 국민의힘은 윤 대통령이 대선에서 패했던 인천을 탈환하고 경기도지사 선거도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에게 뒤졌던 득표율 격차를 거의 따라잡아 피말리는 접전을 벌이는 등 기염을 토했다.
반면 대선 맞수였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은 자신이 출마한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서 승리를 거뒀으나, 정치적 본거지인 경기도에서 악전고투하고 인천을 국민의힘에 내주는 치명상을 입었다. 윤 대통령으로서는 야권 지지층 일각에 잠복된 대선 불복 정서에 쐐기를 박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는 "이번 지방선거 결과는 국민의힘의 승리라기보다 '0.73% 늪'에 빠졌던 민주당의 참패"라며 "윤 대통령은 대선에서 패했던 인천 선거에서 승리하고 경기도에서 선전해 국정운영의 동력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지방선거 관문을 승리로 돌파한 윤 대통령의 앞길에는 2024년 총선까지 2년 간 전국단위 선거가 없는 유리한 정치 시간표가 예정돼 있다.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연거푸 패배해 후유증이 불가피한 민주당이 전열을 정비하기까지 정국 주도권은 한동안 윤 대통령이 행사할 전망이다.
다만 지방권력 탈환에도 불구하고 국정과제를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시기인 임기 전반기가 압도적인 여소야대 국회 현실을 피해가지 못하는 점은 윤 대통령에게 여전한 부담이다. 협치냐 독주냐의 갈림길에 선 윤 대통령이 대야관계와 정치노선을 어떻게 정립할지가 일차적인 관건이다.
최 교수는 "여소야대는 그대로이지만, 여야 관계의 주도권은 윤 대통령이 쥐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 교수는 또 "윤 대통령은 그동안 경제와 안보에서 보수 정체성을 견지하면서도 중도‧실용적인 모습도 드러냈다"며 "강경한 보수 노선으로만 치닫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최 교수는 그러나 "의혹이 많은 장관 후보자를 밀어붙이면 인사 문제에서 추가 논란이 벌어질 수 있다"며 "지방선거 압승의 영향으로 드러날 수 있는 오만한 태도를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야 관계의 향배는 국회 다수파인 민주당의 변화 방향과 맞물려 있다. 대선 패배 이후에도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한 박탈)' 입법 등 강경론이 우세했던 민주당이 기존 노선을 고수할 경우, 여야의 강대강 대치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법제사법위원장 등 상임위원장 자리를 놓고 갈등이 표면화된 후반기 국회 원구성 문제부터 순조로운 타협을 기대하기가 난망한 상태다. 여야 관계의 향배는 민주당 내 권력지형이 윤곽을 드러내는 8월 전당대회를 거쳐야 갈피를 잡을 것으로 전망된다.
민주당이 지방선거 패배에 따른 내홍을 겪는 사이, 여권 내부의 혼선이 윤 대통령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특별감찰관제 폐지론에 대해 '윤핵관'으로 손꼽히는 장제원 의원이 대통령실 참모진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이에 대통령실이 즉각 고개를 숙인 장면이 상징적이다. 국무조정실장으로 사실상 내정됐던 윤종원 기업은행장이 낙마하는 과정에서도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앞장서, 대통령실을 능가하는 '윤핵관'의 실권을 가늠케 했다.
이에 대해 최 교수는 "당이 특별감찰관제 같은 혼선을 정리한 제동장치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고, 국민의힘 지도부 일원인 권 원내대표를 윤핵관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면서도 "대통령실이 정제된 메시지를 내고 당과 대통령실의 관계가 재정립될 필요는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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