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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일협정 반대운동’(6·3항쟁) 58주년입니다

 
한일협정 반대운동(6·3항쟁)의 전개과정과 배경
 
김용택 | 2022-06-03 09:04:3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오래 걸린 외교. 우리나라 역사에 외국과의 회담에서 14년이 소요된 회담이 바로 이 한일회담이다. 1951년 10월 20일 예비회담에서 시작되어 7차례 본회의를 거쳐 1965년 6월 22일에 조인될 때까지 무려 14년이나 걸려 타결된 회담이다. 국정교과서 시절에는 ‘한일회담 반대운동’, 6·3항쟁 또는 6·3시위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외국과의 회담에 생뚱맞게 ‘항쟁’이란 이름이 덧붙었는지는 국정교과서가 검인정교과서시대로 바뀌면서부터 겨우 역사의 ‘한일협정 반대운동’이라는 이름을 되찾게 된다.

6월 3일 오늘은 한일협정반대운동((6·3항쟁)이 일어난 지 58년째 맞는 날이다. 6·3항쟁은 서울에서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최초로 벌어진 1964년 3월 24일부터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6월 3일부터 한일협정비준서가 조인된 1965년 12월까지를 지칭한 이름이다. ‘국가간에 국교를 맺는 회담에 무슨 비상계엄이 선포되는가’라고 의아해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혈서까지 써 지원서를 제출했던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實)’ 혹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박정희의 창씨개명)가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기 위해 한일회담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된다.
 
<한일협정 반대운동(6·3항쟁)의 전개과정>
 
“400만 어민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3억 달러의 채권 청산이라는 명목으로 흥정하려는 대일 굴욕 외교를 즉각 중지하라”, “김·오히라 메모를 공개하라”, “일본 상사의 경제 침투는 간접 침략이다” 한일협정 반대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구호다. 박정희정권이 ‘한일국교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려 하자 야당과 재야세력은 ‘대일저자세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서울대·고려대·연세대·대광고 등에서는 한일회담 즉각 중지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게 된다. 6월 3일 시위가 확산되자,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고려대학교는 시내 대부분 학교와 함께 무기한 휴교에 돌입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회담이 정식 조인된 후에도 회담 철회를 주장하며 반대 시위를 이어 갔지만, 무장군인이 학교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구타하거나 교내 강의실 및 실험실을 파손 등의 탄압이 계속되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한일협정 반대운동(6·3항쟁)의 배경>
 
‘한일국교정상화’는 비타협적인 태도로 회담이 진전이 이뤄지지 못했던 이승만 정권 시기와 달리,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를 지상목표로 했기에 부족한 자금을 한일회담 성사를 통한 대일청구권으로 조달하고자 했다. 전후 일본은 고도성장으로 축적된 자본을 해외에 수출해야 했고, 이를 위해 한국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은 전후 동아시아 지역통합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한일관계 정상화를 도모했다.

미국은 자본주의 경제의 부흥과 반소 반공블럭의 거점이 될 선진공업국을 중심에 두고, 원료 공급지와 상품시장, 대소봉쇄 기지를 확보하기 위한 지역통합전략을 추진했다.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 지역통합의 중심으로 삼고 한국, 타이완, 베트남, 필리핀을 배후로 삼아 지역통합을 현실화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5·16군사쿠데타 후 박정희정부는 자유당과 민주당 때 진행되다가 중단된 한일회담을 재개하였다.

한일협정반대운동은 6월 3일 절정에 달했는데(6·3항쟁), 학생들은 주로 “박정권 하야, 악덕재벌 처단, 학원사찰 중지, 여야 정객의 반성촉구, 부정부패 원흉 처단”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렇게 되자 박정희 정부는 미국 측의 동의하에 6월 3일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학원과 언론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1965년 2월 15일 한일 양국은 한일기본조약에 합의했다. 그리고 4월 3일 ‘어업’, ‘청구권’, ‘재일한인의 법적 지위’ 등 3개 현안을 일괄 타결하고 각각 협정에 조인했다.

<36년간 노예생활과 맞바꾼 ‘무상 3억 유상 2억 달러’>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은 도쿄에서 일본 외무 장관 오히라 마사요시와 회담 후 그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남긴다. 회담 전 김종필은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자립 원조금 명목 불가, 총액 6억 달러 관철’을 요구하라는 박정희의 지령을 받았다. 이들은 3시간 30분간의 긴 협상 끝에 그 결과를 간략하게 메모 형식으로 작성했는데 그 메모에는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외에 수출입은행 차관 1억 달러 도합 6억 달러로 합의하고 이를 양국 수뇌에게 건의한다’는 내용이다.

대한제국을 멸망시켜 차마 필설로 다하지 못한 일제의 잔악한 범죄를 사과 한마디도 없이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외에 수출입은행 차관 1억 달러 도합 6억 달러로 합의하고 이를 양국 수뇌에게 건의한다’는 굴욕적인 합의가 ‘한일협정이다. 6·3항쟁이란 정부의 대일 저자세 비판, 평화선 사수, 일본의 경제침략에 대한 경계, 미국의 한일회담 개입에 대한 비판이라는 6·3항쟁의 정신은 3선개헌 및 유신개헌 반대, 그리고 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 항쟁이라는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 불의에 저항한 운동이요, 민족의 자존을 지킨 애국적인 운동이 아닌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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