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민주항쟁 35주년을 맞는 10일 오전 서울시 중구 정동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선 6월항쟁과 민주주의를 기념하는 전혀 다른 성격의 행사가 따로 열렸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처음으로 '제35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을 오전 10시부터 성당안에서 개최했고, 성당 밖에선 1시간 앞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회원들이 '민주유공자법 제정없는 기념식'에 항의하는 삭발식을 진행했다.
민주유공자법은 과거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800여명의 열사, 희생자, 부상자들을 '민주유공자'로 지정해 보훈대상에 포함시키자는 법안.
현행 국가보훈기본법 체계에서 민주유공자는 4.19혁명 희생자와 5.18민중항쟁 희생자로만 제한되어 있는데, 유가족들의 요구는 6월항쟁 이후 민주유공자도 보훈대상자로 예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보수언론에서 악의적으로 특혜 운운하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유가협의 뜻을 대변해서 전체 대상자 중 사망·상해자만 민주화유공자로 하자는 우원식 의원의 법안에는 당사자가 아닌 부모·처자에게만 혜택이 가도록 되어 있다.
열사들 중 10%정도가 기혼자이고 그 자녀들도 이미 40~50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사실상 명예회복 외에 별다른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자식과 형제, 남편을 잃은 유가협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지난해 6월부터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위한 기자회견, 항의시위를 벌이고 국회 앞 1인시위를 일년째 이어가고 있으나 국회는 감감무소식이다.
지난해 10월 7일부터 시작한 국회앞 천막농성도 8개월째 접어들었으나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고 외면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식과 남편, 형제를 가슴에 품고 살아 온 유가족들이 더 이상은 안된다며, 6월항쟁 35주년을 기념하는 식장에서 삭발을 결심한 이유이다.
어머니, 아버지들의 흰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동안 모두 말을 잃었다. 여기 저기에서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민주유공자법을 대표발의한 우원식 민주당 의원은 "열사들의 부모님들이 이 법을 통과시키지 못해서 머리를 깎는다고 하니 눈물이 난다. 정말 죄송하다"는 말만 몇번을 되뇌였다.
삭발식이 진행되는 동안 참가자들은 '민주유공자법 제정하라'는 구호를 수차례 외쳤고, 삭발식을 마친 어머니, 아버지들의 손을 잡아 말없이 가슴에 안았다.
이날 삭발식에는 △김석진(김학수 열사 부친) △정정원(김윤기 열사 모친) △강선순(권희정 열사 모친) △장남수(장현구 열사 부친) △박종부(박종철 열사 형) △조인식(박종만 열사 부인) △강종학(강상철 열사 부친) 선생이 나섰다.
장남수 유가협 회장은 "열사들이 지금까지 불순분자로 되어 있다. 가족 친지들마저도 수근대고 했다. 민주유공자가 되어 그 멍에를 벗고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올바로 계승하고 후대에 본보기가 되게 하여 명예회복을 하겠다는 것"이라며,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바라는 유가족들의 심정을 밝혔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삭발식 기자회견문 (전문)
우리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는 6월 항쟁 기념일을 맞아 삭발식을 진행하였습니다.
오늘처럼 기뻐해야 할 날에 우리가 나서서 삭발한 것은 이 땅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역사에 올바로 기록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오는 6월 10일은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긴 6월 항생 35주년을 기리는 날입니다. 하지만 우리 유가협 회원들은 남들처럼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유가협 회원들은 우리의 가족을 이 땅의 민주 제단에 바져야 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먼저 가신 이들의 완전한 명예 회복을 위해 한평생을 투쟁으로 살아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나 그 노력도 헛되이 아직도 제대로 된 명예 회복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1998년 12월 122일간의 어의도 국회 앞 천막농성을 통해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키고도 23년이 지나도록 '민주화운동관련자'라는 명칭에서 한 치 앞도 나가지 못한 채, 유기속들이 원하는 '국가유공사'라는 정상적인 호칭으로 불리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작년 5월 국가보훈처가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국민들이 생각하는 보훈에 대한 개념을 묻는 조사에서 75.8%가 민주화운동을 보훈의 대상이라고 답할 정도로 국민들의 인
식 또한 민주열사들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하는 데 찬성하고 있습니다.
이에 유가협 회원들은 지난해 6월 항쟁 34주년을 맞아 '민주유공자법 제정 없는 6월항쟁 기념식은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항의 시위를 시작하여, 이세 국회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인지도 일 년이 다 되었으며, 지난 10월부터 시작한 여의도 국회 앞 천막농성은 8개월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가협 회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국가를 운영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나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은 아무런 대책을 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6월항쟁 국가 기념식'을 아무리 번듯하게 치룬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도 한두 해도 아니고 '10주년이다.', '20주년이다.', '30주년이다.' 해가며 수십억 원씩 돈을 써가며 기념식을 치른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해 가신 민주열사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럴듯하게 형형색색으로 생색만 내는 행사를 100년을 치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기념식장 앞에 뿌려진 우리 유가협 부모님들의 잘려 나간 머리카락은 가족을 잃은 슬픔에 더해 이 나라의 민주제단에 뿌려진 피에 대해 무심한 국가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표현입니다. '이렇게 민주화의 영령들을 홀대한다면 누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겠느냐?'는 우리 사회를 향한 교훈을 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가족을 잃은 설움도 큰데 그 아픔에 더해 삭발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 너무도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나 알아서 나서야 할 국가는 이리저리 핑계만 대고, 법을 만들어야 할 국회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외려 우리 유가족들을 설득하려 들고 있으니, 더 이상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지난 5월 말부터는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위한 1만인 선언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등 사회 각계각층의 참여가 이뤄지고, 이어 사회 저명인사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의 대표자들이 연서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서명 과정에서 '아직도 민주열사들이 국가유공자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는지 몰랐다.'라며, 부끄럽다며 서명에 참여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이제는 정말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국회가 나서야 합니다. 삭발식까지 감행한 유가족들의 참담한 심정을 안다면, 철면피가 아닌 이상 더 이상 외면하고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민주항쟁의 달! 6월이 가기 전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위해 나서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2022년 6월 10일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위한 유가협 삭발식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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