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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측은 왜 윤석열 정부가 짜놓은 판에 뛰어들기로 했나

“정부, 위험한 강 건너려고 해…피해자 권리 짓밟는 행태 국민에게 알려야”

2018년 대법원이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해 강제동원 배상 판결을 내린지 4년되는 날 2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미쓰비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94세) 할머니가 대법원 미쓰비시 상표권·특허권 매각 명령 신속한 판결을 촉구하며 발언을 하고 있다. 2022.11.29 ⓒ민중의소리
정부가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토론회를 연다. 일본 전범 기업의 사과와 배상에 대한 전제도 없이, 한국 기업으로부터 기부를 받아 배상한다는 게 정부 구상이다. 이번 토론회는 명분 쌓기를 위한 요식행위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우려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측은 토론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국민에게 일본에 굴복하는 정부 구상의 심각함을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내린 결정이다.

8일 외교부에 따르면, 외교부와 한일의원연맹은 오는 12일 오전 10시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강제징용 공개토론회를 연다.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이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한 그간 한일 외교당국 간 교섭 내용을 설명하고, 행정안전부 산하 공익법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재단의 심규선 이사장이 발제를 맡을 예정이다. 이어 참석자 토론이 진행된다.

강제징용 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의 이국언 대표와 피해자 측 법률대리인 임재성 변호사도 참석하기로 했다.

정부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재단이 한일 기업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우선 한국 기업이 먼저 기부금을 내면, 일본 측에서도 호응하는 조치가 있을 것으로 정부는 기대하고 있다. 이른바 ‘제3자 변제’ 방식이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 2018년 10~11월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전범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1인당 1억원씩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일본 측은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을 이유로 배상 판결에 따르지 않고 있다.

정부가 제3자 변제 방안을 추진하는 건 대법원 판결 취지를 무시하는 처사라는 비판이 나온다. 이국언 대표는 이날 <민중의소리>와의 통화에서 “대법원 판결은 가해자인 일본 피고 기업이 배상하라는 것이었다”며 “상관없는 한국 기업이 돈을 대신 지급하도록 하는 건, 윤석열 정부가 사법부 결정을 형해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구상 방안이 이행되면 일본은 배상 의무가 없다는 주장을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고 이 대표는 짚었다. 그는 “비상식적인 주장을 하는 일본에 굴복한다고 완전히 시인하는 결과가 돼버린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법원 판결이 난 사건은 일제 강제징용 가운데 일부”라며 “사실상 향후 더 이상 일본에 과거 청산 요구를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수용 여부를 떠나서 과거청산이라는 역사적인 문제 해결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야 하는데, 앞으로 이런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게 된다”고 우려했다.

정부가 명예 회복을 위한 피해자들의 싸움을 단순한 배상 문제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 대표는 “정부 구상 방안은 일본 전범 기업 명예와 위상은 회복해주고 피해자의 권리를 짓밟는 것”이라며 “피해자의 권리 요구를 얄팍한 돈 문제로 취급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이어 “그동안 피해자들이 누구를 상대로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그 의미를 무색게 하는 것”이라며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주는 행위”라고 말했다.

상처를 입는 건 피해자뿐만이 아니다.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반발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강행하자 한국에서 전국민적인 일본 불매운동이 일었다. 이 대표는 “정부가 일본에 굴복하게 되면 당시 불매운동의 의미가 퇴색된다”며 “국민적 자존감과 국격에도 심각한 문제가 된다”고 짚었다.

정부가 한미일 군사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에 자세를 낮추고 있다는 게 이 대표 시각이다. 그는 “강제징용에 대한 정부 태도에는 한미일 군사 전략적인 이해관계가 깊게 자리한 것으로 보인다”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잘못된 방향”이라며 “너무 조급하게 끌려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외교적인 환경이 악화될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 기업의 선 조치 이후 일본 측의 호응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 대표는 “일본 피고 기업의 출연과 사과도 전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이 일방적으로 뒤짚어쓰겠다는 것”이라면서 “국가 간 약속은 문자 하나, 표현 하나를 매우 중요하게 따져야 하는데, 정부가 지금 제시하는 이런 식의 외교 행위는 역사상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제사회 약속도 뒤집는 게 일본”이라며 “일본 호응은 정부의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기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앞서 일본은 2015년 군함도 등 23개 시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당시 조선인 강제 노동 역사를 제대로 알리겠다고 약속했지만, 현재까지 회피하고 있다. 일본은 제출한 보고서가 조선인 강제 노동 역사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유네스코의 지적을 받아 지난해 12월 재차 보고서를 냈는데, 이번에도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피해자 측은 정부가 주도하는 토론회 참석을 고심해왔다.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토론회에 참석해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이 대표는 “정부는 이미 판을 짜놓고 절차적인 명분을 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리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라면서 “우리가 토론회에 불참해도 정부는 계획을 포기하거나 수정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위험한 강을 건너려는 것 같다”며 “설령 짜여진 판이라고 해도, 국민들에게 정부 방향이 왜 문제인지 알려야 한다는 불가피한 판단이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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