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기무사령부가 만든 이른바 계엄령 문건 두 개의 표지. 두 문건에는 모두 결재선이 없다. ⓒ 국회 국방위원회
2017년 2월 10일, 박근혜 퇴진 촛불이 한창일 무렵의 일이다. 당시 기무사령관이었던 조현천 중장이 기무사 3처장이었던 소강원 준장을 불렀다. 조 사령관은 계엄령 절차를 물었다.
소 처장은 다시 기무사 수사단장 기 아무 대령을 불러 '자필'로 계엄 절차 보고서를 써오라 지시했다. 기 대령의 지시를 받은 실무자는 5페이지 분량으로 계엄 발동 요건, 선포 절차, 과거 계엄 발동 사례, 합동수사본부 설치 기구도, 합동수사본부 내 각 부서의 임무와 기능, 경비계엄과 비상계엄의 차이 등에 대한 보고서를 손으로 써서 올렸다.
보고서는 2월 13일~14일경에 조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그런데 보고서를 본 조 사령관은 위수령에 대한 내용도 없고, 내용도 빈약하다며 화를 냈다. 조 사령관은 일반적인 계엄 절차가 궁금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틀 뒤인 2월 16일, 조 사령관은 소 처장을 다시 불러 '(한민구 국방부) 장관님께서 현 위중한 상황을 고려하여 위수령이나 계엄 관련 절차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며 보고서 작성을 명령했다.
소 처장은 다음 날인 2월 17일, 전국 각지의 기무부대에서 11명의 기무 요원을 차출하여 과천 기무사령부 수사단 208호실에 모았다. 이 방에는 군 인트라넷 망도, 기무 인트라넷 망도, 인터넷 망도 일절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군용 PC도 없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소 처장은 ▲ 비상계엄 선포 절차를 장관 건의부터 선포까지 상황별로 상세히 작성하고 국회가 반대 시 해산 건의 가부를 검토할 것 ▲ 계엄 선포 후 계엄사, 합수본부 수행 절차, 유관기관 조정, 통제 절차를 검토하며, 그 과정에서 계엄 선포 이후 20여 가지 상황을 상정하여 구체적으로 보도 통제, 포고령 구체화, 집회 시위 통제, 정치인 가택연금 등의 상황을 정리할 것 ▲ 기 계획된 국방부, 청와대, 방호 계획을 확인할 것 ▲ 수도권 군부대 통제 계획을 고려할 것 등 계엄 문건 작성의 지침을 줬다.
TF의 이름은 '미래 방첩 업무 발전방안 TF'였고, 모든 문서 작업은 승인되지 않은 비인가 개인 노트북과 USB를 사용해 이뤄졌다. 계엄 문건이 장관에게 보고된 뒤엔 모두 포맷했고, 문서가 담긴 USB 하나만을 남겨뒀다.
계엄 문건은 철저한 위장과 보안 조치 속에 비밀리에 만들어졌고, 시작부터 위법하고 불순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이는 모두 소강원 처장의 '허위공문서작성, 허위작성공문서행사 사건'의 항소심 유죄 판결문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소 처장은 벌금 1000만 원에 처해졌고, 상고를 포기해 해당 판결은 확정된 상태다.
계엄 문건? 군사 쿠테타 문건
법원은 기무사가 비정상적이고 위법적인 방법으로 계엄 문건을 작성하였고, 그 내용 역시 통상적인 계엄 상황을 넘어서는 정치인 연금, 국회 해산 등의 위법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계엄 문건 작성은 기무사 임무 범위 밖의 일이라는 점도 명확히 밝혔다.
무엇보다 이러한 일들이 모두 조현천 기무사령관의 지시로 이루어졌으며, 계엄 문건이 한민구 장관에게 보고된 것도 사실이라는 점을 사실로 확인해주었다.
한편, 소 처장과 함께 재판을 받던 실무자 전 아무개 중령도 지난 해 10월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일에 맞춰 은폐를 목적으로 계엄 문건을 '훈련 2급 비밀'인 것처럼 조작한 혐의가 인정돼 벌금 300만 원에 처해졌다.
2017년 5월 당시 전씨는 계엄 문건을 2017년 3월에 진행된 키리졸브 훈련 관련 2급 비밀로 조작, 보존 연한을 30년이나 지정해 놓곤 정작 비밀보관소에는 문건을 갖다 두지도 않았으며 문건이 담긴 비인가 USB는 책상 서랍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전씨는 계엄문건 수사가 시작되자 해당 USB를 검찰에 제출했다고 한다. USB에 담긴 문건의 제목은 '전시 계엄 및 합수 업무 수행 방안', 최종 수정일은 2017년 5월 9일이었고 문건에는 특기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그런데 USB를 포렌식 하자 이전에 삭제된 문건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 장관에게 보고된 시점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작성된 문건의 제목은 '현 시국 관련 대비계획'이었고 해당 문건에는 국회 해산, 정치인 가택연금, 군부대 배치 계획 등이 담겨 있었다.
▲ 입국 직후 체포된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전 계엄령 문건 의혹의 핵심 인물인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29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을 통해 입국한 뒤 서울서부지검으로 압송되고 있다. 2023.3.29 ⓒ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 국가관 시험하는 시금석
지난 29일, 5년간 해외로 도주한 조 전 사령관이 귀국했다. 조씨는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공항에 나타나 기자들과 인터뷰까지 했다. 검찰은 수사 중 도주해 5년이나 잠적했던 지명 수배범을 수갑도 채우지 않고 연행했고, 내란음모죄를 뺀 정치 관여와 직권남용으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조씨는 31일 오후 구속됐다.
2018년 조 전 사령관을 수사하던 노만석 현 서울고등검찰청장 직무대리는 수사 당시 '내란음모죄는 성립된다고 본다'는 말을 남긴 바 있다. 노씨는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다스, BBK 주가조작 사건을 수사한 특수통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수사를 맡고 있는 서울서부지검은 보강수사를 통해 내란음모죄 성립 여부를 검토해보겠다고 한다. 이미 5년 전에 대대적인 수사를 벌여놓고, 무엇을 더 보강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계엄 문건은 '계엄령 계획'도 아니다. 계엄사령부가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인을 집에 가둘 수 있게 규정하고 있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이 문건은 '군사 쿠테타 문건'이라 명명하는 것이 옳다. 군인들이 비밀스러운 사무실에 TF까지 꾸려서 보름이 넘도록 밤낮없이 쿠데타 계획을 문서로 만들어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까지 했는데 이것을 단순한 정치 관여, 직권남용으로만 의율할 수는 없다. 반드시 내란음모죄로 기소해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여전히 조 전 사령관을 옹호하는 이들이 있다. 29일 열린 정정미 헌법재판관 청문회에서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은 "조현천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기소된 게 하나도 없다"며 대놓고 거짓말까지 하며 조 전 사령관을 두둔하는가 하면, 지난 해 9월엔 국민의힘 한기호 의원 등이 계엄 문건은 날조된 것이라며 송영무 전 국방부 장관,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등을 상대로 고발장까지 접수했다.
정치 논리 앞에 헌정 질서도, 법원의 판결도 무시 일색이다. 조현천 수사는 윤석열 정부와 여당의 국가관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헌정 질서 파괴를 시도한 내란범을 대하는 태도가 곧 그들의 헌법 정체성이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