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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캠프 때 내세운 외교전략 ‘자강’과 ‘전략적 다양성’은 어디 갔을까

김찬호 기자
 

지난해 11월 아세안+3 정상회의를 마친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캄보디아 프놈펜 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며 마중 나온 인사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 프놈펜|강윤중 기자

지난해 11월 아세안+3 정상회의를 마친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캄보디아 프놈펜 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며 마중 나온 인사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 프놈펜|강윤중 기자

 

[주간경향] “밖으로 나갈 때마다 문제를 만든다.”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 행보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이다. 대통령은 헌법에 명기된 권한에 따라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이에 따라 최소 5년간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사용해 대외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적어도 외교 분야에선 대통령의 정책적 경쟁자가 없게끔 권한이 집중돼 있다는 의미다. 국민 역시 대통령의 외교적 결단에 대한 책임만 나눠 갖는다.

이러한 구조의 문제는 대통령의 외교정책이 지지를 받지 못하거나 결과가 좋지 않을 때 두드러진다. 외교정책이 대부분 기밀, 안보 사항으로 묶여 있는 이상 사전견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윤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글로벌 스탠다드(국제표준)’가 강조되는 상황에서는 사후 입장 선회도 쉽지 않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는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가 ‘절차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중대한 흠결이 있었음이 확인됐다’고 발표했지만 이를 공식 부인하거나 폐기하지 못했다. 이미 확정된 외교사안은 정권을 교체해도 바꿀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의미다.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역대 대통령들은 주어진 권한의 사용을 절제하며 발생 가능한 위험을 관리해왔다. 국가 간 외교에서 ‘일방적 손해’를 보는 상황 자체가 희귀한 데다 역대 대통령들이 뛰어난 측면도 있었다. ‘미들파워(중견국)는 외교능력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직업 정치인 출신의 대통령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국내 정치에서 정부·여당과 야당으로 갈라져 치열하게 다투었지만, 외교에서만큼은 모두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움직였다는 뜻이다. 한국 외교를 도식화해 보면 한미동맹을 중심축에 두고 정해진 원 궤도를 그리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 성향에 따라 원심력이 크냐, 구심력이 크냐 정도의 차이는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사실상 국내 정치의 일부인 북한에 대한 입장 차이로 발생한다는 점에서 외교정책의 실질적 궤도 변화로 보기는 어려웠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북한의 존재, 일본과의 역사문제, 미·중 간 세력 전이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만들어진 궤도는 곧 한국의 생존선이 됐다. 대통령이 이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가 준비된 대통령, 정부인지를 나타내는 표상이었다.

윤석열 정부 외교를 비판하는 목소리의 시작점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윤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향한 구심력을 강조하며 기타 국제관계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위한 동력’으로 삼는 모양새다. 궤도를 이탈하는 것이 ‘왜 위험한가’에 대한 고민을 찾아보긴 어렵다. 한·일 관계개선 문제가 대표적이다. 오히려 역대 정부의 궤도 유지를 ‘판단 오류’라거나 ‘결단력 부족’이라고 비판하며 정책 방향을 옹호한다.

반면 모순으로 지적받는 외교전략에 대해서는 설명을 아낀다. 미·중 전략경쟁이 심화되고 있는데 빠르게 편승을 하고, 북한의 위협이 고조된다고 강조하면서 대화의 문을 닫고 있는 것 등이다. 근본적으로 북한과의 관계악화로 인한 충돌 가능성 증대가 한반도의 안전을 강화시키는 것인가, 악화시키는 것인가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 충돌과 억지 사이의 경계선이 어디인지도 정부는 분명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은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 있는 정책 결정자들이 아니다. 단순히 “책임은 내가 진다. 좋아 빠르게 가”만을 외치는 대통령의 발언이 허무한 것은 이 때문이다. 생존이 걸린 문제에서 사후 책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외교전략 다양성의 실종

윤석열 정부 외교정책의 난맥상은 정책 정합성과 인사문제 등을 통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윤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주요 외교공략은 ‘한미동맹 강화’였다. 당시에도 북한의 위협이 고조됐고, 미·중 전략경쟁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선거 캠프에서 외교안보전략을 총괄하는 간사는 지난 3월 30일 사퇴한 김성한 전 안보실장이었다. 김 전 실장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의견을 말하고 토론도 할 수 있는 합리적 인사”라는 것이었다. 대선 당시 주간경향은 김 전 실장을 이재명 전 민주당 대선후보 캠프의 위성락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맞세우는 방식으로 인터뷰를 했다. 그 결과 양측 인사 이름을 가리고 보면, 전문가들도 어느 쪽이 보수와 진보를 표방하는 대선후보의 참모인지 구분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특히 김 전 실장은 인터뷰 동안 한국의 ‘자강’을 강조했다. 이는 윤석열 당시 후보의 궁극적 목표로 이해됐다.

지난해 5월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 앞서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왼쪽)과 김태효 안보실 1차장이 대화하고 있다. /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지난해 5월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 앞서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왼쪽)과 김태효 안보실 1차장이 대화하고 있다. /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김 전 실장은 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을 총괄했다. 관련 인사 중 예상치 못한 대목은 한 가지뿐이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의 재등장이었다. 이후 대통령이 내놓는 외교적 발언들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 전 실장을 잘 아는 한 외교 전문가는 “대통령의 귀를 사로잡고 있는 사람이 적어도 김성한 실장은 아닌 것 같다”며 “자강과 한·미·일 삼각공조의 하부구조로 들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말했다.

보고 누락설, 김태효 1차장과의 갈등설 등 갖은 소문을 남기고 김 전 실장은 1년여 만에 퇴진했다. 캠프 시절부터 윤 대통령과 함께한 외교·안보 컨트롤타워의 이탈은 자연히 윤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임기 동안 약속한 것을 얼마나 이뤘는가’와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등이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윤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강조하고 김 전 실장이 대변한 ‘외교전략의 다변화’와 ‘자강’이 지금도 유효한가이다.

김 전 실장은 당시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과의 관계개선과 관련해 구체적 전략을 말하긴 어렵지만, 핵심은 일본의 진솔한 사과와 한·일 관계의 미래를 바꾼다는 것이다”라며 “최소한 우리가 모든 것을 양보하는 협상이 아닌 역사와 안보는 분리해서 갈 수 있는 정도로 협상을 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 보수가 문재인 정부를 비판한 주요 논거 중 하나가 ‘과거사 문제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며, 별개 사안인 일본과의 경제, 기술, 안보, 문화적 교류를 파탄냈다’는 것이었다. 학계는 ‘원 트랙, 투 트랙’ 전략 등을 설명하며 비판의 논거를 제시했다. 대일관계에서 ‘원 트랙 전략’은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를 일컫는다. 역사문제와 경제, 기술, 안보 등을 하나로 연동하는 식이다. 투 트랙은 역사문제와 나머지 것들을 분리한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 문재인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정확한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역사문제에 매몰돼 한·일 관계개선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라며 “오히려 성과를 내기 직전, 예상치 못했던 문제로 좌절된 경우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 대일정책도 똑같은 잣대로 평가해볼 수 있다. 지난 3월 16일 있었던 한·일 정상회담의 결과로 나온 강제동원 문제의 ‘제3자 대위변제’ 방안은 이미 회담 전부터 수차례 언급됐다. 윤 대통령 스스로 회담 직전 한 일본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일본의 가해 기업에 ‘구상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했다. 정상회담 직후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해당 질문이 또 나왔다. 이때 윤 대통령은 “만약 구상권이 행사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다시 모든 문제를 원위치로 돌려놓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 구상권 행사라는 것은 상정하고 있지 않다”라며 “부족하면 제가 더 답변을 해드릴 수 있는데 질문을 더 해주시면 좋겠다”라고까지 말했다. 사실상 일본과의 경제, 기술, 안보 협력 의제에 역사문제가 원 트랙으로 실려가버린 셈이다.

윤석열 정부의 대일외교를 둘러싼 논란을 ‘감정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것은 상황 호도이거나 설명력 부재이다. 정확히는 한·일 관계를 두고 지속적으로 제기된 논리적·이성적 외교전략의 부재에 가깝다. 이마저도 일본은 ‘한국 정부의 태도를 더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투 트랙 전략을 강조했던 학자들은 이번에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김 전 실장이 대변했던 윤석열 후보의 입장과도 이는 분명히 다르다.

자강의 실종

자강 문제는 더욱 심하게 엇나갔다. 사실 한미동맹에 국가안보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자강’만 강조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고, 오해의 소지도 있다. 그렇다고 주권국가가 ‘자강’을 말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결국 이는 한미동맹의 목표가 무엇이냐와 연결된다. 동맹이 국가의 생존을 위한 것인지, 한미동맹 그 자체인 것인지 알 수 없게 된 지금의 상황이 ‘자강’을 말하기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대선 당시 김 전 실장은 “윤석열 외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국제연대에 기초한 ‘자강’이다”라며 “국제연대의 핵심요소는 한미동맹이지만 우리 스스로도 힘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군사적 측면에서 중국을 겨냥한 한미동맹 혹은 한·미·일 군사동맹의 가능성은 낮다”라며 “한미동맹이 강조되는 만큼 한·중 관계가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 미·중 패권경쟁을 지나치게 의식해 외교적 협력 공간을 좁히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5월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에서 김대기 비서실장,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과 오찬 회동하고 있다. /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5월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에서 김대기 비서실장,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과 오찬 회동하고 있다. /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외교정책은 사실상 정반대로 갔다. 한미동맹을 향한 구심력이 그 어느 정부보다 강하게 작동 중이다. 이를 통해 북한 위협에 대한 미국의 관여 강도가 높아졌다는 점을 정부는 성과라고 설명한다. 윤 대통령이 강조하는 ‘우리의 자유와 평화를 위협하는 도발에 대해 강력한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 태세’가 결국, 미국이 제공하는 억지력임을 대통령 스스로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자강의 사전적 의미인 ‘스스로 힘을 키운다’와는 거리가 멀다. 오는 4월 말,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에서 기대되는 사안 역시 미국의 관여 확대다. 미국이 전술핵 재배치에 선을 그은 상태에서 가능한 것은 확장 억제, 한·미 연합 훈련 강화 등이다. 이미 이뤄졌거나 약속된 것들의 ‘반복’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자강이 안보 분야에서만 어렵게 된 것도 아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지원법 등을 통한 미국의 경제 분야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미국이 동맹국들에까지 무리한 압박을 한다는 비판이 나오지만, 한미동맹에 안보를 ‘올인’한 상황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는 어렵다. 또 이미 중국과의 연계 제거(디커플링)를 거의 기정사실화한 상태에서 다른 대안을 찾기도 어렵다.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강조했던 외교전략은 김 전 실장의 사퇴와 함께 꼬리를 감추고 있다. 사실상 외교전략이 ‘미국 편승’ 외에 없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이 과정에서 남은 건 되돌리기 어려운 일본과의 약속뿐이다. 정부가 예고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면 이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윤 대통령의 외교 행보를 두고 “가만있는 것이 차라리 더 낫겠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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