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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두 국가" 밝힌 북한, 체제 결속 위한 것? 틀리진 않지만…

정욱식 칼럼] 평화의 재발명(3) : '가난을 탈피하는 핵보유국' 북한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 기사입력 2024.01.16. 05:02:28

 

'북한이 왜 이러는 걸까요?'

요즘 공적인 자리든, 사적인 자리든 많이 듣는 질문이다. 북한의 의도와 관련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이 글에선 '체제 결속'이라는 관점에서 풀이해보려 한다.

'북한 정권이 식량난과 경제난으로 인한 주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체제 결속을 도모하려고 일부러 위기를 조장한다'는 해석은 넘쳐난다. 특히 윤석열 정부 들어 정부 주요 인사들이 앞장서서 이러한 주장을 펴고 있다.

필자 역시 북한의 최근 도발적인 언행과 "적대적인 두 국가"를 천명한 주된 동기가 체제 결속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근거에 대해서는 완전히 생각을 달리한다. 후술하겠지만, 북한은 최근 식량 생산과 경제성장에 있어서 만만치 않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2023년 12월 31일 북한 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가 지난 26일부터 30일까지 당 중앙위원회 본부에서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회의에서 올해 각 부문 사업을 총화하고 내년 당 및 국가사업의 발전 방향을 확정해 발표했다. ⓒ로동신문=뉴스1

이중 정체성에서 국가 정체성 확립으로

그래서 체제 결속을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국가 정체성의 변화이다. 여러 변화는 근본적이고 다양하며 고도로 연결되어 있다. 우선 "조선반도 비핵화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유훈"이라는 관점에서 완전히 탈피해 "불가역적인 핵보유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정당화하는 방식이 바로 대남·대미 노선의 근본적인 재정립이다.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에서 '교전 중이고 적대적인 두 국가'로 탈바꿈시키려고 한다.

대미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 '친미를 간절히 원한' 반미 국가였던 북한은 친미를 포기하고 반미 연대를 주도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호시탐탐 북침을 노리는 한미동맹에 맞서 전쟁을 억제하고 억제에 실패해 전쟁이 일어나면 승전을 도모하기 위해 핵무장이 필수적이라고 선전한다.

이렇게 북한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를 포기하면 인민생활과 경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과거의 북한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를 중시한 데에는 경제적인 고려도 컸다. 대북 지원과 남북경제협력은 극도의 식량·경제난에 시달린 북한에 하나의 탈출구였다.

북미관계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미국이 주도한 대북 제재를 해결하지 않는 한, 인민생활 향상과 경제발전을 불가능하다고 봤었다. 그래서 예전의 북한 매체에선 '조미관계가 좋아지면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식의 북한 주민의 발언도 종종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20년부터 확연히 달라졌다. '대북 제재를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으로 정면돌파하자'는 경제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체성의 변화가 체제 결속에 도움이 될까? 김정은 정권은 그렇다고 믿고 있다. 과거에 있었던 '이중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고 "우리식 사회주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 체제 유지와 결속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중 정체성이란 이런 것이다. 통일을 국시로 내세우면서도 흡수통일을 걱정했던 이중성, 비핵화가 유훈이라면서 핵무장의 필요성을 떨쳐버리지 못한 이중성, 반미이면서도 친미가 되기를 원했던 이중성, 제재를 유발하는 행동을 하면서 제재가 해결되길 원했던 이중성 등.

이러한 이중성의 혼란이 정점에 달했던 때가 바로 2019년이었다. 2018년에 문재인-트럼프-김정은이 주도한 역사적인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시작되면서 북한 정권은 물론이고 주민들의 기대치도 크게 높아졌다.

하지만 결실의 해가 될 것으로 믿었던 2019년은 좌절의 해로 둔갑하고 말았다. '조선반도 비핵화'에 합의한 줄 알았는데, 미국은 북한의 무장해제에 가까운 일방적인 비핵화를 요구했다. 기대했던 제대는 완화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었다. 트럼프가 중단하겠다고 약속한 한미연합훈련도 재개됐다. "단계적 군축"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던 문재인 정부는 역대급 군비증강에 나섰다.

이를 경험한 김정은은 2019년 8월 초에 자신의 심정을 구구절절 담은 친서를 트럼프에게 보냈다. 자신을 주기만 하고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바보 취급하자 말라"고 썼다. 문재인 정부를 향해서도 바보라고 칭했다. 특히 "저와 제 인민들은 당신과 남한 당국의 결정과 행동을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며 본인과 주민들이 겪은 혼란스러운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리곤 이중 정체성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결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적대적인 대북관을 분명히 하는 윤석열 정부가 등장하자 김정은 정권은 정체성의 정치를 강화할 기회가 왔다고 간주했다. 올해 1월 2일에 나온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담화도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해준다. 조롱어린 어투로 도배된 담화의 요지는 '언행불일치'로 자신들을 헷갈리게 한 문재인 정부에는 '배신감'을, '언행일치'로 대북 적대를 분명히 해 자신들의 대적관을 확립해준 윤석열 정부에는 '고마움'을 표한 것이다.

핵보유국, 반미반한과 친중친러, 전략국가 등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해도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으로 인민생활과 경제발전을 이루겠다는 다짐이 성과를 내지 못하면, 체제 결속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북한은 이들 분야에서도 만만치 않은 성과를 내는 것으로 보인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

1999년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istopher Chabris)는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36명의 피실험자들에게 영상 속에서 흰 옷을 입은 3명과 검정 옷을 입은 3명이 서로 농구공을 주고받은 횟수를 맞춰보라고 했다. 화면에 집중한 피실험자들은 대부분 답을 맞혔다.

그런데 질문이 또 있었다. "영상에서 5초 동안 가슴을 두드리며 무대 위를 지나간 고릴라 분장을 한 사람을 봤나요?" 놀랍게도 절반가량이 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사람들은 대개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확증 편향 현상을 입증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Invisible gorilla)'이다.

북한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어떨까? 외부에 익숙한 북한은 주로 '가난하고 굶주리며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있는데도 핵과 미사일 개발에만 매달리는 존재'로 소비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의 피실험자들이 농구공이 오간 횟수를 정확히 맞춘 것처럼, 북한의 미사일 발사 횟수를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런데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만 만들고 미사일만 쏘는 것은 아니다. 인민생활과 경제발전, 그리고 외교적 환경에도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외부에선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만 주의를 기울인 나머지 달라진 북한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식량과 경제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대표적이다.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거나 "경제난이 심각해져 체제에 위협이 되고 있다"는 식의 진단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과거의 북한이 이러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 들어 식량난과 경제난은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했고, 2021년 8차 당대회 이후 그 추세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그런데도 외부에선 이를 잘 모르거나 믿지 않거나 모른 척한다. 때때로 자신들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대북 정보를 취사선택하거나 왜곡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9차 노동당 전원회의 결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선 글에서 다룬 것처럼, 2023년에 목표로 삼았던 알곡 생산(목표치보다 3% 초과)을 비롯한 '12 가지 고지'를 초과달성했다고 말했고, 특히 2021∽2023년 국내총생산액이 2020년에 비해 "1.4배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이게 사실이라면 북한이 지난 3년 동안 연평균 12%에 육박하는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는 뜻이다.

외부에서 이를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김정은 정권이 국내외에 '가짜 뉴스'를 유포했을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참고로 필자가 작년 12월 하순에 만난 중국의 대북소식통으로부터도 '북한의 식량 사정과 경제 사정에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처럼 북한은 '가난한 핵보유국'에서 '가난을 탈피하는 핵보유국'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한미일의 대북정책도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북한에겐 경제발전과 핵보유국 지위 추구가 양자택일의 성격이 강했었다. 2013년 3월에 선포하고 2018년 4월에 종결을 선언했던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 병진노선'은 과도기적 성격이 짙은 것이었다. 하지만 2019년을 거치면서 북한은 이 둘을 양자택일의 관점보다는 병진이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확연히 돌아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판단이 가져오고 있는 득실관계이다. 김정은 정권의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식량난과 경제난이 심해졌다면, 대북 지원이나 제재가 변수로 재등장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높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과 정보를 종합해보면 '병진노선 2.0'이 만만치 않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북한을 지원이나 제재의 대상으로 바라봐온 관성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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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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