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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이재명·한동훈…. 우리는 그들을 모른다?

[박해성의 여의대교] '이미지 정치'의 뒷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박해성 티브릿지 대표  |  기사입력 2024.02.15. 05:03:42

 

'이미지 정치'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제법 잘 안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 예를 들어 윤석열 대통령이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또는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을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우리는 그가 어떤 철학을 가졌는지, 그의 정치적 신념은 무엇인지, 그가 추구하는 정책의 실체는 어떠한지를 보고 그 정치인에 대해 호감을 느끼거나 싫어하는 걸까요? 아니면 대중적으로 각인된 그의 '이미지'를 보고 지지하거나 반대하게 되는 걸까요?

 

정치 커뮤니케이션과 홍보에 뿌리를 두는 이미지 정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어떤 인식을 형성하고, 감정에 영향을 미치며, 궁극적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미지 정치는 정서적 소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접근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정치에 설득된 우리는 투표와 같은 정치적 선택을 할 때 정책의 실체나 콘텐츠의 본질보다는 정치인이 창출해낸 이미지에 중점을 두게 됩니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전문가 중 한 명으로 캐나다의 사회학자이자 <자아 연출의 사회학(The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Life)>의 저자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연극적 관점에서 사회를 분석했는데, 개인들이 타인에게 전달되는 인상을 관리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사용해 일종의 사회적 퍼포먼스에 참여한다는 주장이 핵심입니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정치인이 여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의도적인 페르소나(실제와는 별개인 일종의 사회적 성격)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대선 캠페인에서 희망, 변화, 통합을 강조했는데요, 잘 알려진 '희망' 포스터가 그의 메시지를 상징했습니다. 미국의 예술가인 셰퍼드 페어리가 디자인했다고 합니다. 빨간색, 베이지색, 그리고 파란색의 단색으로 오바마의 얼굴을 표현하고, 하단에는 'HOPE'란 문구를 새겼습니다. 이 그림은 포스터와 스티커로 제작되었고 미국을 넘어서 전 세계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공감이 가는 일관된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확고한 카리스마와 단단한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보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정치·선거 컨설턴트로서 저는 정치인의 승리와 성공의 조건으로서, 또 시대적 트렌드를 반영하는 현상으로서 이미지 정치를 이해해 왔습니다. 다만 정치의 본질, 정치인의 인격과 철학은 우리의 관심에서 사라진 채 이미지라는 껍데기, 환상만 좇게 되는 거대한 흐름이 영 불편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설 연휴에 우연히 보게 된 한 편의 영화가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깊이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프레지던트 메이커(Our Brand Is Crisis)>는 2015년 미국 영화입니다. 데이빗 고든 그린이 감독하고 산드라 블록, 빌리 밥 손튼 등이 출연했습니다. 볼리비아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미국 정치 컨설턴트들의 이야기입니다. 대통령 후보자는 대중의 호감을 사기 위해 거짓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컨설턴트들은 양심의 가책 없이 승리만을 위해 싸우는 전문가들로 묘사됩니다. 과장된 부분이 있습니다만, '저건 그냥 영화적 허구야'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2002년 볼리비아 대선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고 하는 이 영화는, 좋은 정치를 가지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윤석열 후보자는 어떤 정치인으로 보였을까요? 그를 선택한 사람의 편에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소신 있는 공직자, '공정'과 '자유민주주의' 기치를 내걸고 한순간에 정치 전면에 나선 신선한 도전자, 문재인 정부의 실정을 부각하며 '어퍼컷'을 날리는 속 시원한 보수의 대변자. 정치 신인이었던 그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다소 극적인 내러티브와 기성 정치에 환멸을 느끼던 시민들의 호감을 얻은 아웃사이더 이미지가 자리했습니다. 

 

 

 

 

 

 

 

이미지 정치의 대표적인 문제는 내용보다 스타일을 우선시하고 내면보다는 외형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입니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한 포장으로서 이미지와 상징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본질이 드러나는 순간 대중의 실망과 불신과 회의는 당연한 귀결이 됩니다. 대통령 선거 기간 내내 우리는 결국 한편의 정치 쇼를 관람했던 게 아닐까요? 고프만의 사회학에 따르면 영 착각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는 4월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저는 이번 선거에 나선 여야의 후보자들이 어떤 정치를 하겠다는 건지 도통 알지 못하겠습니다. 운동권 정치를 청산하기 위해 국민의힘을 찍어달라는 것도, 윤석열 정부를 심판하기 위해 민주당을 선택해달라는 것도, 유권자로서 받아들이기에는 영 불쾌한 호소입니다. '동료 시민'과 같은 뭔가 새로운 스타일로 자신의 정치를 상징하고픈 한동훈 위원장이나, '검찰 정권의 희생양'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이재명 대표만 믿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나의 삶과 지역사회의 운명을 맡겨달라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멜론을 처음 먹어본 어떤 꼬마가 "엄마, 이 과일에서 메로나 맛이 나"라고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시늉, 흉내, 모의(模擬) 등을 뜻하는 '시뮬라르크(simulacre)'라는 개념을 설명할 때 종종 쓰는 비유죠. 실제 존재하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혹은 오히려 더 생생하게 인식되는 것들을 일컫습니다. 애초에는 멜론의 맛을 흉내 내 메로나라는 아이스크림을 만들었겠지만, 이제 멜론의 맛은 메로나를 통해 더 일상적으로 경험되는, 원본과 모조품의 가치 전도가 벌어집니다. 

 

이미지 정치가 위장 정치, 가짜 정치라고까지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미 우리는 거의 모든 일상에서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다만, 정치인의 이미지 안에 감춰진 실체를 직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정치가 진실과 책임에 기반을 두고 작동되도록 하기 위한 우리 유권자들의 책임 있는 역할은, 정확한 정보와 이성에 따른 선택일 것입니다. 오는 4월 총선에서는 저마다의 지역에서 멜론과 메로나를 신중하게 분별해 한 표를 행사해보면 어떨까요? 

 

사족을 붙이자면, 희망 포스터를 제작한 페어리는 7년이 지난 후 '희망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라는 말로 오바마 정부를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투표 같은 간단한 일조차 하지 않으면서 오바마 대통령이나 다른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좌절감을 느낀다"고 미국인들의 행동을 촉구했다고 합니다. 

 

ⓒpixabay.com

박해성 티브릿지 대표는 여론조사 전문가이자 정치·선거, 빅데이터, 공공정책 분야의 컨설턴트입니다. 2019년부터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2년 대통령직속 자문기구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돼 지역산업·경제분과위원장을 맡아 국가적 과제 해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직업인으로서, 비판적 시민으로서의 감수성과 현실을 직시하는 균형감각을 신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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