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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련 출신 종북인사 조성우? 함께 활동한 원희룡, 나경원은 괜찮고?

청년운동가 출신 국민후보 선출자 전지예 씨가 지난 10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연합 비례대표 국민후보 선출을 위한 공개 오디션에서 소감 발표를 하고 있다. 2024.03.10. ⓒ뉴시스
또다시 선거를 앞두고 색깔론이 등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매체들은 이른바 ‘종북세력’이 야권연합 비례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을 숙주로 국회에 진입하려 하고 있다며 공포마케팅에 나섰다. 이런 논리의 핵심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과 범민련 출신의 조성우 연합정치시민회의 공동운영위원장이 자리하고 있다. 범민련이 지난 1997년 대법원에 의해 이적단체로 규정된 것을 바탕으로 시작된 논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27년이 흘러 더불어민주연합 비례대표 국민후보 선출을 위한 공개 오디션을 거쳐비례대표 1번으로 선출된 전지예 금융정의연대 운영위원 등을 ‘급진좌파’, ‘종북’, ‘반미’로 몰아세우는 근거가 됐다.

 

 

1997년 범민련 이적단체 판결 빌미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야권비례후보 선출 ‘종북몰이’ 3단논법


논란의 불씨를 지핀 건 조선일보다. 야권연합 비례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이 지난 7일 서류심사를 통해 비례대표 국민후보 선출 공개 오디션 진출자 12명을 결정하자 조선일보는 바로 다음 날 ‘진보당 활동 인사, 시민단체 몫 비례 후보로’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상임 심사위원단 가운데 한 명이던 조성우 위원장을 “과거 이적(利敵) 단체로 규정된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실무회담 대표를 지낸 인물로,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구속된 적도 있다”고 주장했다.

후보가 확정된 뒤에는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의 비례순번 1번 후보로 한·미연합훈련 반대 시위를 벌여온 겨레하나 활동가 출신 전지예 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총학생회장이 선출됐다. 겨레하나는 이적단체로 규정된 범민련 간부 출신(조성우)이 이사장은 맡은 단체”라는 보도가 나왔다. 조·중·동은 물론 한국일보, KBS 등 여러 매체가 똑같은 내용의 기사를 쏟아냈다.

야권의 비례대표 후보 선출과 이를 통해 뽑힌 후보를 종북으로 몰아가는 논리는 ‘A=B이고, B=C라면 A=C’라는 식의 3단 논법과 비슷하다. 범민련은 이적단체다. 조성우는 범민련에서 활동했다. 조성우는 겨레하나 이사장이다. 겨레하나 활동가 출신인 전지예 금융정의연대 운영위원은 이적 또는 종북이라는 식이다.

어설퍼 보이는 논리지만. 국민의힘이 거들고 나섰다. 박정하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11일 논평을 내고 전지예 씨가 겨레하나 출신임을 거론하며 “이 단체는 이적단체로 규정된 범민련에서 실무회담 대표를 지냈던 조성우 씨가 운영하는 단체로 반일, 반미, 종북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왔다”고 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운동권 특권 세력, 부패 세력, 종북세력의 합체”라고 주장했고, 윤재옥 원내대표도 “기형적 선거제도가 더불어민주연합을 통해 반미·종북세력에게 국회의 문을 열어주는 ‘종북횡재’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 후반 불어온 민간 통일운동 열풍
문익환 목사, 황석영 작가, 임수경 씨 등 방북


하지만, 조성우 연합정치시민회의 공동운영위원장을 매개로 한 ‘종북몰이’엔 논리적 함정이 있다. 1997년 범민련이 이적단체 판결을 받을 당시 조성우 위원장은 범민련 활동을 그만둔 지 3년이나 지났고, 조성우 위원장이 활동할 당시 범민련은 대중적 통일운동 단체로 노태우 정부에서도 활동을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8년 3월25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문익환 목사가 육촌동생 문익준, 문순옥 등 친척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모습. ⓒ통일의집 제공


범민련은 1980년대 후반 거세게 일어났던 민간통일운동의 결과물이다. 1987년 6월항쟁 등 민주화의 물결은 통일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분단 논리와 냉전적 사고가 우리 사회를 억압하는 중요한 문제임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통일운동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 교회 선언’을 발표하며 분단 50년을 맞이하는 1995년을 ‘평화와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했다. 이 선언이 계기가 돼 통일운동의 물결은 대학가와 문화예술계, 종교계 등으로 퍼져나갔다.

그해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남북 동포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의 남북 자유왕래 개방, 이산가족 생사 확인 적극 추진, 남북교역 문호개방, 비군사 물자에 대한 우방국의 북한 무역 용인, 남북 간의 대결외교 종결, 북한의 대미·일 관계 개선 협조 등이 담겨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이 선언 이후 중국, 소련 등 공산권과의 국교 수립 및 교류 확대 등 북방정책을 추진했다.

그해 8월 3일 문익환·계훈제·박형규 등 각계인사 1천14명은 ‘한반도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및 범민족대회’를 올림픽 기간인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판문점 등에서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결국 준비 기간이 짧고 정부가 해외 인사의 입국을 저지하면서 무산됐다.

하지만, 이듬해인 1989년 민간 차원 방북이 이어졌다. 3월 25일 문익환 목사가 “나는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가슴과 눈으로 하는 대화를 하러 왔다. 한편이 이기고 한편이 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길을 찾아왔다”며 평양을 방문했다. 김일성 주석을 만나 “분단 50년을 넘기지 말자. 그것은 민족의 치욕”이라며 통일을 호소했다. 문 목사가 방북하기 며칠 전인 3월 20일 황석영 작가가 방북했고, 6월 30일엔 임수경이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방북했다. 임수경의 귀환을 돕기 위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문규현 신부가 7월 25일 방북하는 등 통일운동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노태우 정부도 인정했던 범민련 활동
1990년 노태우 정부 민족대교류 선언하며
남측의 범민족대회 참가 허용
하지만, 장소 등 이견으로 무산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은 1989년 1월21일 결성대회에서 조국통일위원회를 설치하고 범민족대회를 8월 15일 판문점에서 개최키로 결정했고, 북에 그해 3월 1일 판문점에서 예비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2월 28일 범민족대회 예비회의의 사전실무접촉을 위해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인 이재오(현 국민의힘 상임고문), 조성우 등 4명이 판문점으로 출발했지만, 미군의 제지와 정부의 불허 입장 때문에 결국 무산됐다.

 

 

 

 

 

 

1990년 7월 20일자 동아일보 1면. 노태우 대통령이 그해 8월 15일을 전후해 민족대교류기간을 선포하고 남북한 자유 왕래 등을 제안하면서 범민족대회 추진이 본격화됐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쳐


이듬해인 1990년에도 전민련을 중심으로 범민족대회를 추진했다. 그해 범민족대회는 8월 15일을 전후해 판문점에서 열기로 했다. 한 해 전까지만 해도 비협조적이던 노태우 정부의 태도도 달라졌다. 6월 노태우 대통령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했고, 남북고위급회담과 체육 회담이 잇따라 추진됐다. 7월 20일 노태우 대통령이 8월 15일을 전후해 민족대교류기간을 선포하고 남북한을 자유 왕래 등을 추진하자고 제안하면서 범민족대회 추진이 본격화됐다.

노태우 정부는 7월 23일 법무·국방·통일 등 3부 장관이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범민족대회를 허용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때도 조성우 위원장은 범민족대회 남한 측 대표로 회담에 참여했다. 하지만, 개최 장소, 참가 범위 등을 두고 우여곡절을 겪었고, 결국 남측 대표는 참가하지 못한 채 판문점에서 1차 범민족대회가 열렸다. 남측은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따로 행사를 개최할 수밖에 없었지만, 2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범민족대회 남측 행사는 정부가 허가한 합법 집회였다. 3일 동안 통일노래 한마당, 영화 상영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펼쳐졌다. 1회 범민족대회를 계기로 남과 북, 해외는 범민족적 통일운동체를 결성하기로 합의하면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1990년 8월 15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2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범민족대회 남측 행사 모습 ⓒ범민련 남측본부

 

 

 

 

1994년 범민련 내부 논란 끝에 분화
조성우 위원장 등 범민련 탈퇴 민족회의 결성
1997년 범민련 이적단체 판결


1990년 12월 범민련 해외본부가 만들어졌고, 1991년 1월 23일 문익환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으며, 1월 25일 북측 본부가 세워졌다. 이후 범민련 남측본부는 민간통일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하지만, 문익환 목사를 중심으로 범민련을 해산하고, 보다 대중적인 새로운 통일운동 단체를 만들자는 주장이 나오면서 논쟁이 벌어졌다. 1994년 1월 18일 문 목사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해 7월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민족회의)가 만들어졌다. 당시 조성우 위원장은 범민련을 나와 민족회의에 참여했다.

1997년 대법원은 범민련 남측본부를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하지만, 당시 조성우 위원장은 이미 범민련을 떠난 지 3년이 지난 상황이었다. 오히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 넘게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으로 활동한 민경우가 당시 핵심 활동가였다. 민경우는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에 의해 국민의힘 비대위원으로 임명됐다가 여러 논란으로 자진사퇴한 바 있다. 그런데 이적단체 판결 당시 범민련에서 활동한 민경우가 아닌 당시 이미 범민련 활동을 그만둔 조성우 위원장을 트집 잡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조성우 위원장은 1998년 김대중 정부에 보수와 진보를 망라하는 통일운동 단체인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민화협) 결성을 제안했다. 이후 그는 민화협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범민련이 이적단체 판결을 받은 다음 해인 1998년 조성우 위원장이 보수와 진보가 함께한 민화협 집행위원장을 맡았다는 사실은 범민련의 이적단체 판결과 조성우 위원장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근거다.

 

 

 

 

1998년 보수진보 아우른
민화협 창설 주도한 조성우
국힘 원희룡, 나경원도 민화협 활동


조성우 위원장이 민화협 1기 공동 집행위원장을 맡을 당시 박철언 자유민주연합 부총재, 오자복 전 국방부 장관 등 보수계 인사도 공동상임의장으로 함께했다. 박철언은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 정무비서관,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을 역임했고, 노태우 대통령 취임 후 전국구 국회의원, 정무1장관, 체육부 장관을 지낸 대표적 보수 인사다. 오자복도 군사령관과 합참의장 등을 거쳐 노태우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보수적 성향의 군 출신 인사다.

 

 

 

 

 

 

1991년 1월 23일 오후 2시 서울 향린교회에서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준비위원회 결성식이 열렸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


이후 조성우 위원장이 공동상임의장으로 활동할 당시엔 현재 국민의힘 소속인 당시 한나라당 소속 원희룡, 정병국 의원 등이 함께했으며, 나경원 의원도 공동상임의장으로 활동할 당시 조성우 위원장은 민화협 고문단으로 활동했다. 조성우 위원장의 범민련 경력을 이유로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겨레하나 소속 청년 활동가에게 ‘종북’ 낙인을 찍는 국민의힘과 보수매체의 논리대로라면 현재 국민의힘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는 원희룡, 나경원, 정병국 등이 과거 조성우 위원장과 함께 민화협 활동을 한 것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겨레하나는 국민의힘이나 보수매체의 주장처럼 ‘반일, 반미, 종북 활동’을 벌여온 정치단체가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지난 2004년 만들어진 평화통일 시민단체다. 주로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영양빵, 콩우유, 항생제 등을 지원하는 활동을 해왔다. 조성우 위원장이 겨레하나 이사장을 맡은 건 2015년부터이고, 2021년 민간통일운동과 관련한 노력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정부 훈장 조성우에겐 ‘이적’ 낙인
범민련이 ‘이적단체’ 판결 당시 활동한
민경우는 국민의힘 비대위원 임명
조성우와 함께한 원희룡, 나경원은
문제 삼지 않는 이중적 잣대


국민의힘과 보수매체의 논리와 잣대는 이중적이다. 조성우 위원장이 이적단체로 규정된 범민련에서 실무회담 대표를 지냈다며 문제 삼지만, 그와 함께 회담에 나선 바 있는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당시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의 이력은 문제 삼지 않는다. 이미 범민련을 그만두고 통일운동으로 정부 훈장을 받은 조성우 위원장에겐 ‘이적’이라는 낙인을 찍지만, 범민련이 ‘이적단체’ 판결을 받을 당시에 활동한 민경우는 자신들과 함께한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받는다. 조성우 위원장과 민화협에서 활동한 원희룡과 나경원은 국민의힘 국회의원 후보로 선출됐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국 ‘종북세력’이 야권연합 비례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을 숙주로 국회에 진입하려 하고 있다는 식의 국민의힘과 보수매체의 공포마케팅이 보여준 건 그들의 이중성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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