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후쿠다무라 사건의 한 장면 [사진-영화 갈무리]
영화 후쿠다무라 사건의 한 장면 [사진-영화 갈무리]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관동 일대에서 발생한 간토(관동)대지진은 전대미문의 제노사이드 사건인 '조선인에 대한 집단학살'과 함께 기억되어야 할 참극이다.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이다. 

100주기에 이른 지난해까지도 한국사회는 무지와 무관심을 넘지 못하고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는 계기로 삼는데 실패했다.

양심적 일본 시민사회가 '사죄'하지 않는 일본에 부끄러움을 표시하며 준비한 추도행사에 대해 한국정부는 일부 인사들이 정부 승인없이 참석했다는 이유로 과태료를 부과하는 괴이한 작태를 보였다.

물론 일본 정부는 철저히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100주기에 맞춰 간토(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을 다룬 일본인 감독의 극영화가 발표돼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모리 다쓰야(森達也) 감독이 연출한 '후쿠다무라(福田村) 사건'

일본내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후쿠다무라'사건을 소재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을 다룬 영화이다. 

지난해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 경쟁부문 최우수작을 수상하고 관객들의 호평에 힘입어 올해 제47회 일본아카데미상 우수감독상을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연구소가 지난 3일 '2024 일본서벌턴영화제' 첫 작품으로 선정한 작품 상영에 앞서 설명에 나선 모리 다쓰야 감독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연구소가 지난 3일 '2024 일본서벌턴영화제' 첫 작품으로 선정한 작품 상영에 앞서 설명에 나선 모리 다쓰야 감독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연구소는 지난 3일부터 시작된 '2024 일본서벌턴영화제' 첫 작품으로 이 작품을 선정해 교내 도서관 5층 휠라아쿠쉬네트홀에서 상영했다.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인지 '1923년 9월 후쿠다무라사건'이라는 우리말 제목을 달았다.

지난해 부산 국제영화제 이후 처음으로 국내에서 상영되는 것이라고 한다.

2시간 30분에 이르는 짧지 않은 상영시간 내내 '조선인'이 수시로 등장한다. 조선인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죽여도 된다'는 공감이 있었다. 조선인에 의한 약탈과 방화를 적시한 일본 내무성의 전문에 자경단을 구성해 '적절한 대책을 세우라'는 지시는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1시간 가까이 영화는 1923년 9월의 상황을 설명한다. 

지진 발생 다음날인 9월 2일 도쿄에 계엄령이 시행되고 3일 요코하마, 4일 후쿠다무라가 있는 지바현으로 확대되는 대혼란이 벌어졌으며,  당시 유일한 미디어였던 신문은 확인없이 '조선인이 무리를 지어 공격한다. 약탈과 방화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 공포를 더욱 키웠다.

당시 식민통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은 '불령선인'의 역습에 대한 두려움이 일본내에 집단적으로 공유된 상황이라는 것이 여러 등장인물의 경험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마을의 노인은 영웅담을 듣고 싶어하는 재향군인들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는 모두 죽는다'는 공포의 체험을 되뇌이고, 조선에서의 생활을 접고 아내와 함께 귀향한 사와다는 4년전인 1919년 3.1운동 직후 경기도 수원의 제암리 감리교회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잔인한 학살에 간접적으로 가담한 트라우마를 잊지 못한다.

식민지배에 동원됐다 돌아온 재향군인들은 군복을 일상복으로 착용하고 자신들의 무용담을 자랑하며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에게 천황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을 호소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조선인들에 대한 공포심을 감추고 있다.

마을의 부녀자들은 이런 와중에 덩달아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가고 그런 마음은 조선인에 대한 멸시로 나타났다.

그런 와중에 마을에는 외지에서 온 행상단 15명이 며칠 머무는 일이 생긴다.

'에타'(부락민)라고 불리며 일본 사회에서 천민으로 취급받던 이들이다. 배탈, 설사에 특효약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정로환'과 두통약, 감기약 등을 팔기 위해 행상단을 꾸려 촌락과 도시를 다녔다. 

지진과 조선인 살해의 흉흉한 소문이 돌던 1923년 9월 6일이었다. 서둘러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기 위해 도착한 도네강의 나루터에서 그들은  '조선인'으로 오인한 재향군인과 자경단으로 구성된 마을민들에게 집단 살해당했다.  

영화 후쿠다무라 사건  포스터. [사진-후쿠다무라사건 영화 홈페이지 갈무리]
영화 후쿠다무라 사건  포스터. [사진-후쿠다무라사건 영화 홈페이지 갈무리]

여기서 잠깐. 영화의 소재로, 제목으로 쓰인 '후쿠다무라 사건(후쿠다무라지켄)'에 대해 알아보자.

일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후쿠다무라는 일본 도쿄 인근 지바현의 히가시 가츠시카군의 조그마한 마을이다. 현재 지명은 노다시.

가가와현에서 후쿠다무라로 흘러온 행상단 15명중 9명이 이곳에서 지역 2개의 자경단과 마을 주민 약 200명으로부터 살해당한 사건이다.

1923년 9월 1일 간토지역에 대지진이 발생한 뒤 5일이 지난 9월 6일 점심 무렵 흥분한 상태의 자경단원과 군중 200여명이 이들을 둘러싸고 '말투가 이상하다. 조선인 아닌가'라며 당시 일본어 발음이 서툰 조선인 식별을 위해 사용한 방법인 '15엔 50전'(じゅうごえん ごじっせん. 주고엔 고짓센)을 따라하게 하는 등 소란이 벌어졌고 이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주재소 순사는 본서에 문의한 결과 이들이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만 이미 사건은 벌어진 뒤였다.

간신히 6명의 행상단원이 살아남았으나 이미 15명중 유아 3명(2, 4, 6세)을 포함해 9명은 살해당한 상태였고 그 시신은 도네강에 버려져 유해도 찾을 수 없었다.

사건 발생 직후 현장에서는 자경단원 8명이 검거되었으나 이들은 "조선인으로부터 향토를 지킨 나는 우국지사이며, 나라에서 자경단을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결과 잘못되어서 죽인 것"이라는 주장을 폈으며,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들은 모두 확정판결 2년 5개월후 히로히토의 천황 즉위(1926.12)에 따른 은사로 석방됐다. 

출소한 인물 중 한 사람은 후에 마을의 촌장이 되고 시로 승격된 후에는 시의회 의원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를 소개하는 홈페이지에는 "오가는 정보에 혼란스럽고 생존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부추겨졌을 때, 집단 심리는 가속하고 군중은 폭주한다. 이것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라는 자성의 문구가 적혀있다.

모리 감독은 "참극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묻혀진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영화가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쓸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극영화로 만들게 된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다큐멘터리이건 극영화이건 중요한 건 역사적 진실이겠다.

일본에서도 외면하는 100년전 사건을, 관련 자료도 빈약한 상황에서, 낯선 소재를 성실히 고증하고 거기에 이야기를 입혀 영화로 만든 감독의 노력은 그런 점에서 의미있는 작업임에 분명하다.

중첩된 차별의 실상도 분명히 드러난다. 또 후쿠다무라의 젊은 아녀자가 광기에 사로잡혀 낫을 휘두르는 장면에서는 선량한 개인이 자행하는 악행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도 알수 있다.

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말했다. 집단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피부색과 국적, 민족, 신앙, 언어 등 다양한 차이가 있는데, 다수파는 소수파를 표적으로 하며, 이것이 학살과 전쟁의 원인이 된다는 것. 그렇게 인류의 역사는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야 하고 응시해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천민으로 차별받던 행상단원들은 지진으로 인한 혼란으로 장사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신분이 들통날 것을 우려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기로 한다. 

'조선인과 우리 중 누가 더 나은지'에 대해 갑론을박하기도 하는데, 죽음을 앞두고는 '조선인이면 죽여도 되냐'는 항변을 한다.

그렇지만 선뜻 동의하기 어렵고 매우 아쉽기도 한 대목이다. 

일본 관헌의 악의적 선동에 편승한 '민중의 학살 책임' 역시 엄중하다는 재일 사학자 고 강덕상의 지적을 되새긴다.

낯선 이역에서 이유없이 살해당한 조선인들이 100년이 지나도록 구천을 헤매고 있다. 그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미증유의 범죄에 대한 진상은 지금껏 은폐되고 단죄되지 않았다.

'악의 평범성'을 강조하는 것은 독립적 개인이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언제든 악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중요한 시사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평가와 단죄가 언제나 엄숙하고 진지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영화 개봉이후 여러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101년전 간토대지진 당시 아직도 규모를 확정하지 못할 만큼 많은, 최소 6,600여명의 재일 조선인이 일본 정부와 민간의 조직적인 제노사이드 범죄에 의해 목숨을 잃은 미증유의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은 어떤 이유에서든 결코 잊혀져서는 안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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