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 감시와 통제를 받지 않은 채 연간 1조원이 넘는 국민 혈세를 사용해온 국가기관이 있다. 국정원이 그렇다. 이렇다 보니 예산 중 일부가 불법 정치·대선개입에 사용돼도 그만이다.
치외법권과 특혜 누려온 국정원 예산
국정원의 ‘특혜 예산’이 논란이 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5년 <한겨레>는 안기부(국정원의 전신) 감사관실 직원이었던 정병주씨의 증언을 보도한 바 있다. 정씨는 안기부가 예산(1996년도) 5596억원 가운데 쓰고 남은 돈 848억원을 정치자금으로 빼냈다고 폭로했다. 국정원 예산의 15%가 정치자금 조성에 사용됐다는 얘기다.
‘안풍 사건’도 있다. 2000년 15대 총선직전 신한국당에 안기부 자금 400여억원이 유입됐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다. 2001년 검찰은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이 안기부 예산 1157억원을 1995년 지방선거과 1996년 총선 자금으로 당시 여당인 민자당과 신한국당에게 제공했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한다.
선거 당시 당 사무총장이었던 강삼재, 돈을 세탁해 준 경남종금 서울지점장, 김기섭 전 안기부 차장 등이 중형을 선고 받았지만 강삼재는 이 돈이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했다. 김영삼은 강삼재에게 돈을 준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재판부는 이 돈이 김영삼의 정치자금으로 보고 강삼재와 김기섭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정권 통치자금도 관리, 정치자금으로 사용되기도
의혹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채 재판이 끝났지만 세간에서는 이 돈이 노태우 정권 때부터 안기부에 맡겨 관리해오던 통치자금의 일부라는 얘기가 파다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이 중정(안기부)에 통치자금을 맡겨 관리해 왔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국정원이 국민 혈세로 충당되는 예산을 정치자금이나 대선 개입 비용으로도 쓸 만큼 부패된 데에는 정치권의 책임도 크다. ‘국정원 예산’에 부여된 지나친 특혜가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이를 바로잡지 못했다.
예산 책정부터 ‘특혜’다. 국정원 예산은 총액 및 예비비로 편성된다. 기밀유지라는 명분 아래 태반의 예산이 특수활동비로 책정된다. 국회 예결위에 제출된 자료에 의하면 국정원이 연간 쓰는 돈은 1조원이 넘는다.
국정원 예산의 60%, 타 부처 예비비 등으로 숨겨진 채 사용돼
정부 특수활동비 명목에서 4000~5000억원, 기획재정부 예비비에서 3000~4000억원, 경찰청 예비비에서 800억원을 예산으로 책정 받는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통일부, 국방부, 법무부 등 각 부처 예산으로 편성돼 있지만 실제로는 국정원이 사용한 예산만 해도 2000~3000억원에 달한다.
2010년 국회 예결위 자료에 의하면 2009년 국정원에 책정된 예산은 4419억원. 하지만 실제 쓴 돈은 1조443억원었다. 국정원이 쓸 돈 가운데 6024억원을 기재부 예비비와 각 부처 예산에 숨겨 놓았기 때문이다.
‘국정원 예산’은 치외법권을 누린다. ‘국가재정법’ 22조에 의하면 사용목적이 지정되지 않은 일반예비비는 본예산 총액의 1% 정도로 책정돼야 한다. 하지만 국정원의 경우는 60%에 이른다. 본예산이 예비비와 숨겨진 예산을 합한 것보다 훨씬 적다.
영수증 필요없는 예산, 예산안 자체가 2급 비밀
예결산 심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국정원 예산은 국회 예결위가 아닌 정보위에서 비공개로 심의된다. 당연히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 설령 심의가 이뤄진다 해도 한계가 있다. 사용목적을 지정할 필요가 없는 예비비가 본예산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사후 감시도 불가능하다. 국정원법 제12조에 의하면 “세출예산을 총액으로 요구하며 산출내역과 국가재정법에 따른 예산안 첨부서류를 제출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총액만 표시해 예산을 책정 받으니 결산심의에서도 영수증을 제출할 의무가 없게 된다.
또 예산 자체를 2급 비밀로 규정해 놓아 ‘예산 내역 공개와 누설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국회 정보위 위원들만 열람할 수 있다.
제12조(예산회계)
② 국정원은 세출예산을 요구할 때 관(款)·항(項)을 국가정보원비와 정보비로 하여 총액으로 요구하며, 그 산출내역과 「국가재정법」 제34조에 따른 예산안의 첨부서류는 제출하지 아니할 수 있다.
⑤ 국회 정보위원회는 국정원의 예산심의를 비공개로 하며, 국회 정보위원회의 위원은 국정원의 예산 내역을 공개하거나 누설하여서는 아니 된다.
셀프 책정, 셀프 결산, 셀프 감사 이뤄지는 곳
감사원의 감사도 받지 않는다. 국정원법 제13조가 감사원의 직무감찰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국정원장에게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안전보장에 영향을 미치는 기밀 사항’일 경우로 한정하고 있지만 그 판단은 오로지 국정원장의 몫인 까닭에 얼마든지 전횡이 가능하다.
제13조(국회에서의 증언 등)
① 원장은 국회 예산결산 심사 및 안건 심사와 감사원의 감사가 있을 때에 국가의 안전보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가 기밀 사항에 대하여는 그 사유를 밝히고 자료의 제출 또는 답변을 거부할 수 있다.
예산 책정도, 결산도, 감사도 모두 국정원장의 권한인 셈이다. 셀프 책정, 셀프 결산, 셀프 감사가 이뤄지는 곳이 바로 국정원이다.
<정부 특수활동비의 70%를 국정원이 사용하고 있다.>
국민혈세 빼내 불법 선거 공작
이러니 국민혈세를 빼내 불법 선거 공작을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민간인 댓글 알바까지 고용해 1인당 월 300만원씩 지급해온 사실이 들통 났다. 하지만 ‘알바단’의 규모조차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적지 않은 국민혈세가 국정원이 대선개입을 목적으로 조직한 심리전단과 SNS 전담팀, ‘민간인 알바단’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이 밖에도 국민혈세로 정치·대선 공작을 했다는 의혹은 여럿이다. 국정원이 국방부에 특수활동비 명목으로 지원한 돈이 연간 1500억원에 이른다. 대선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국방부 심리전단 운영비 등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국군 사이버사령부에 국정원 돈이 투입된 사실이 드러났다. 2011년 30억원, 2012년 42억원 지원됐으며 올해에는 55억원으로 증가했다.
기밀이 요구되는 활동을 하려면 영수증 첨부도, 감사도 받지 않는 ‘융통성 큰 돈’이 필요하다는 게 국정원의 주장이다. 하지만 국정원은 이런 치외법권적 특혜를 이용해 정치와 대선에 개입하는 등 헌정질서와 민주주의의 근간을 유린해 왔다.
예결산 특혜 사라지고 국정원 감사 받아야
그런데도 남재준 국정원장은 새누리당과 청와대의 지원에 힘입어 “국정원 국내파트를 축소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말했다. 국정원 국내파트 예산은 올해도 늘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혈세가 특정 후보를 지지하고 특정 정치세력을 옹호하는 데 쓰일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감시와 통제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예결산 특혜’가 사라져야 한다. 예산이 국회 정보위가 아닌 예결위에서 정상적으로 심의돼야 하고, 특수활동비도 용도를 구분해 편성돼야 할 것이다. ‘셀프감사’ 관행도 사라져야 한다. 국정원도 감사원 감사를 받도록 법을 고쳐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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