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10월 13일동해에서 작전 중이던 인민군 구잠함 233호의 장병 20여 명이 전사하였다. 그들은 미국 항모강습단의 전격적인 동해진입과 기습타격전연습 강행으로 조성된 긴장된 상황에서 해상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불의의 사태를 만나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사진은 구잠함 233호와 유사한 중국인민해방군 소속 400t급 037형 구잠함을 촬영한 것이다. (image credit=sinodefense.com) © 자주민보, 한호석 소장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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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2월에 작성된 국정원 비밀문건
김대중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에 이룩한 가장 큰 공적은 사상 처음 현직 대통령으로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상봉하고 6.15 공동선언을 채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000년에 6.15 공동선언을 채택한 김대중정부의 ‘뒷모습’은 전혀 다르게 생겼다.
1999년 2월 김대중정부는 “북한 급변사태와 통일대비책을 정리한 비밀문건”을 작성하였다. 그 비밀문건의 존재는 2013년 1월 이정훈 <신동아> 편집위원이 발표한 글에서 드러났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그 비밀문건을 작성한 주체가 구체적으로 김대중정부의 어느 부처였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비밀문건의 성격과 내용을 보면 국가정보원이 그 비밀문건을 작성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국정원 비밀문건에 따르면, 북의 급변사태에 대한 김대중정부의 대응은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되는데, 위기관리단계→통일추진단계→실질통합단계가 그것이다.
첫째, 국정원 비밀문건에서 말한 위기관리는 북의 정권붕괴조짐이 나타난 초기에 긴급히 대처하는 대응행동을 뜻한다. 국정원 비밀문건에 들어있는 대응행동의 구체적인 내용은 너무 황당해서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고, 다만 김대중정부 시절의 국정원이 위기관리단계에서 예상한 여러 긴급대응행동들 가운데 진보세력에 대한 탄압이 포함되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국정원 비밀문건에 따르면, “위기관리단계에서는 남파간첩출신, 사회주의지하혁명조직 구성원, 친북좌익이념단체의 인물, 재야-노동운동단체의 핵심인물, 북한공작조직과 연계혐의가 있는, 내사와 수사-공작 대상자 등은 (국정원이) 경찰, 검찰, 기무사와 함께 특별관리한다”는 것이다. 국정원이 기존 감시대상을 특별히 관리한다는 말은 그들을 체포, 구속, 처형한다는 것을 뜻한다. 최근 통합진보당, 전교조, 자주민보, 개별적 진보인사들을 포함하는 진보세력 전반에 대한 무차별적인 탄압은 국정원 비밀문건의 위기관리단계에서 언급한 진보세력에 대한 탄압을 연상케 한다. 지금 국정원은 그들이 말한 ‘위기관리’를 연습하고 있는 것일까?
둘째, 국정원 비밀문건에 수록된 ‘통일추진단계’는 김대중정부가 북에서 ‘개혁정권’을 세우는 단계다. 그 단계에서 국정원은 ‘북한지역평정합동대책반’을 운영하게 되는데, 그 대책반 공작원들이 북측 각지에 파견되어 “북한에 심어놓은 우리 공작망(부식첩망)과 탈북자, 한국에 협조하는 북한주민 등을 활용해” 북의 집권당과 정부와 군부의 핵심세력을 “분류, 선정해 제거하거나 격리, 체포, 수감”한다는 것이고, “소극적 저항세력은 동향을 감시하며, 회유, 순화시킨다”는 것이다. 김대중정부는 북의 핵심세력을 제거하는 것과 동시에 북의 ‘개혁세력’에게 “정보, 자금, 장비를 제공하여” ‘개혁정권’을 세우는 비밀계획을 속에 품고 있었다.
셋째, 국정원 비밀문건에 수록된 ‘실질통합단계’는 국정원이 북에 세운 ‘개혁정권’이 조선로동당을 해산하고, ‘공산잔재청산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고, ‘잔재청산대책위원회’를 운영하는 단계다. 국정원 비밀문건에 따르면, ‘잔재청산대책위원회’는 그들이 북에서 청산할 대상자를 1등급에서부터 6등급까지 분류하고, 1등급에서 3등급까지는 ‘사법처리’한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추진한 주무부처였던 국정원이, 6.15 공동선언이 채택되기 불과 1년 4개월 전에 위와 같은 비밀문건을 작성한 것은 경악과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그 비밀문건이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로 작성된 것인지 아니면 국정원 고위관리가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고 단독적으로 작성한 것인지 판단할 근거를 찾을 길 없으나, ‘햇볕정책’을 선전하면서 6.15 공동선언에 서명하기까지 한 김대중정부가 ‘북한정권붕괴’에 대비한 ‘북한평정공작’을 준비하는 비밀문건을 임기 내내 속에 품고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처럼 막 뒤에서는 ‘북한정권붕괴’를 바라고 ‘북한평정공작’을 준비한 김대중정부가 막 앞으로 잠깐 모습을 드러내며 6.15 공동선언에 서명하였으니, 그런 서명을 골백번 다시 한들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국정원은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하여 6.15 공동성명에 서명한 뒤에 그 비밀문건을 폐기하였을까? 그렇지 않다는 데 사태의 재앙적 위험성이 있다. 국정원 비밀문건은 6.15 공동성명 이후 폐기된 것이 아니라 김대중정부 임기가 끝난 뒤 후속정부로 계승되어오면서 지난 13년 동안 더욱 보완되었다. 1994년 8월 11일에 발간된 <시사저널> 250호 보도기사에 따르면, ‘북한정권붕괴’에 대처하는 ‘북한평정공작’을 담은 비밀계획은 1970년대에 박정희정부가 원래 ‘충무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작성한 것인데, 전두환정부와 노태우정부를 거쳐 김영삼정부에게 계승되면서 ‘통합계획’으로 보완되었다고 한다.
가장 근자에 국정원 비밀문건의 계승과 보완에 대해 언급한 보도기사는 <조선일보> 2011년 3월 28일부에서 발견되었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당시 이명박정부 시절의 국정원이 “북의 급변사태에 대비하여 수립한 ‘00계획’에도 공산주의유물유적은 말소시키고, 일부는 보존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다는 규정이 포함”되었고, 군부는 북의 급변사태에 대처하여 실행할 군사작전계획의 일환으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을 제거하는 방안을 수립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김대중정부의 뒤를 이어 등장한 노무현정부가 대북침공구상을 대북작전계획으로 완성하려던 미국의 기도를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알려진 노무현정부의 ‘뒷모습’은 전혀 다르게 생겼다. <중앙일보> 2004년 10월 8일 보도에 따르면, 정문헌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공개한 통일부 국감자료는 북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나는 경우 노무현정부가 실행할 ‘응전자유화계획’을 수립해두었음을 밝혔는데, ‘응전자유화계획’이란 이전 정부들로부터 계승한 ‘충무계획’을 더 보완, 발전시킨 것이다. 정동영 당시 통일부장관은 정문헌 의원의 서면질의에 답변하면서 “충무9000계획은 통일부 주관이며 현재 충분히 보완, 발전시키고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보면, 노무현정부도 이전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북한정권붕괴’를 바라면서 ‘북한평정공작’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막 뒤에서는 ‘북한정권붕괴’를 바라면서 ‘북한평정공작’을 준비한 노무현정부가 막 앞으로 잠깐 모습을 드러내 10.4 선언에 서명하였으니, 그런 서명을 골백번 다시 한들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위에서 밝혀진 것처럼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가 그처럼 속과 겉이 다르게 행동하였으니,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공개적으로 전면 거부한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에 대해서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문화일보> 2010년 1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2009년 말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정부의 ‘충무계획’과 노무현정부의 ‘응전자유화계획’을 더 보완하여 ‘부흥계획’을 작성하였다. 이런 맥락을 살펴보면, ‘충무계획’은 ‘통합계획’, ‘응전자유화계획’, ‘부흥계획’으로 계승, 보완되어 오늘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모체약정형식으로 체결된 비밀군사협정
국정원과 통일부가 ‘북한정권붕괴’를 바라면서 ‘북한평정사업’을 준비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군부도 ‘북한정권붕괴’를 바라면서 ‘북한안정화작전’을 준비해왔다. 국정원의 ‘북한평정사업’이나 통일부의 ‘부흥계획’이 점령지역에 대한 행정사업계획이라면, 군부의 ‘북한안정화작전’은 북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나는 경우 즉각 무력을 사용하여 북을 점령하는 군사점령작전이다. 그런데 전시작전통제권을 갖지 못한 한국군이 그런 군사점령작전을 단독으로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한국 군부의 ‘북한안정화작전계획’은 처음부터 미국 군부의 주도로 작성되고 보완되어왔다. 아래와 같은 정보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첫째, 김영삼정부 말기인 1997년 12월 9일 미국 워싱턴에서 진행된 제29차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윌리엄 코헨(William S. Cohen) 당시 미국 국방장관과 김동신 당시 한국 국방장관이 ‘북한안정화작전’에 관한 비밀군사협정을 체결하였다. 1997년의 한미비밀군사협정이 모체약정(umbrella agreement)형식으로 체결되었다는 2010년 2월 9일 <동아일보> 보도기사를 통해 비밀군사협정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바 있다. 제29차 한미안보협의회는 공동성명에서 “양 장관은 이러한 불확실한 상황 하에서 한국과 미국이 광범위한 가능성에 대해 공동으로 대비해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는 데 견해를 같이하였다”고 밝혔는데, 그들이 언급한 ‘불확실한 상황’에서 발생할 ‘광범위한 가능성’이란 ‘북한정권의 붕괴가능성’을 뜻하며, ‘공동대비’란 ‘북한안정화작전’을 위한 공동준비를 뜻한다.
둘째, 미국의 군사전문 웹사이트 <글로벌 씨큐리티(Global Security)>에 게시된 자료에 따르면, 1999년 8월 존 틸럴리(John H. Tilelli)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은 ‘북한정권붕괴’에 대비한 전쟁시나리오를 준비하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 그 전쟁시나리오는 아직 작전계획으로 완성되지 못한 ‘개념계획(CONPLAN) 5029-99’였다.
김대중정부 시절의 국정원이 1999년 2월에 ‘북한평정공작’ 비밀문건을 작성한 것은, ‘북한안정화작전’에 관한 비밀군사협정을 체결한 1997년 12월에서부터 주한미국군사령관이 ‘북한정권붕괴’에 대비한 ‘개념계획 5029-99’를 작성하였다고 인정한 1999년 8월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미국 군부가 한국 군부를 참가시킨 가운데 작성한, ‘북한정권붕괴’에 대비한 ‘개념계획 5029’는 오랜 기간에 걸쳐 검토되고 보완된 끝에 ‘작전계획(OPLAN) 5015’로 완성되었다. ‘개념계획 5029’가 ‘작전계획 5015’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내일신문> 2013년 2월 15일 보도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바 있다.
미국 일간지 <월 스트릿 저널(Wall Street Journal)> 2013년 3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2013년 3월 22일 제임스 서먼(James D. Thurman)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과 정승조 당시 합참의장이 “급변사태계획(contingency plan)에 서명하였다.” <월 스트릿 저널>은 급변사태계획에 서명했다고 보도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북한안정화작전’을 실행할 ‘작전계획 5015’에 서명한 것이다.
지금 미국군과 한국군은 ‘북한안정화작전’을 실전급 규모로 해마다 두 차례씩 연습하면서도 키리졸브 한미합동전쟁연습이나 을지프리덤가디언 한미합동전쟁연습에 ‘작전계획 5015’를 포함시켜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은폐하고 있으며, 자연재해에 대비한 ‘인도주의적 지원작전연습’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실제로는 ‘작전계획 5015’를 연습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정보는 아래와 같다.
<연합뉴스> 2010년 9월 9일 보도에 따르면, 당일 서울 용산에 있는 주한미국군기지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월터 샤프(Walter L. Sharp)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은 2010년 8월 을지프리덤가디언 한미합동전쟁연습 중에 북의 급변사태에 대비한 안정화작전을 실시하였느냐고 물은 취재기자의 질문에 대해 “한미 양국은 (북한)주민 안정화작전을 하고 있고, 이는 중요한 작전”이라고 지적하고, “두 지역(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뜻함-옮긴이)에서 도출한 교훈은 어느 지역에선 전투를 하고 다른 지역에선 안정화작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 자리에 동석한 정승조 당시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은 “안정화작전에서 지상군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한미 양국군의 강약점이 다를 수 있어 양군의 장점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식으로 안정화작전을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측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조선일보> 2012년 4월 6일 보도에 따르면, 2012년 키리졸브 한미합동전쟁연습에서 “북한급변사태 중 내전발생 시 대규모 한국군 병력을 투입해 북한지역을 안정화하는 훈련을 실시했”는데, 인민군 내부에서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격화되어 내전이 일어나는 급변사태를 상정하여 “10만 명이 넘는 한국군 수 개 군단을 평양이남지역에 투입해 강경파를 진압하고 북한지역을 안정시키는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해체와 합병을 준비한 비밀문건이 없었다
국정원은 ‘북한평정공작’ 비밀문건을 왜 1999년 2월에 작성하였을까? 그 비밀문건이 1999년 2월에 작성된 배경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북이 겪고 있었던 ‘고난의 행군’이라는 혹독한 시련이다. 국정원은 당시 혹독한 시련을 겪던 북이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급변사태에 빠지게 될 것으로 예상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예상한 국정원이 ‘북한평정공작’ 비밀문건을 작성한 것은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1999년 2월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해체되고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합병된 때로부터 불과 8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래서 국정원은 ‘고난의 행군’으로 시련에 겪는 북에서 동독형 해체와 합병이 재발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국정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통일부와 군부도 그렇게 전망하였다.
그러나 국정원, 통일부, 군부가 동독형 해체와 합병의 재발을 내다본 전망은 사실상 전망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전망은 동독의 해체와 합병에 대한 무지와 오해, 그리고 북의 현실에 대한 무지와 착각이 빚어낸 망상이라는 비판을 피할 길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는 논거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국정원, 통일부, 군부는 북을 해체하고 합병하려는 비밀계획을 가지고 있지만, 지난 시기 서독의 연방정보국(Bundesnachrichtendienst), 독일내부관계부(Ministrium fűr innerdeutsche Relations), 연방방위군(Bundeswehr)은 동독을 해체하고 합병하려는 비밀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다. 지난 시기 서독 정부는 동독을 해체하고 합병하려는 비밀계획을 갖지 않았지만, 오늘 남측 정부는 북을 해체하고 합병하려는 비밀계획을 가지고 있는 상반된 현실은 동서독관계와 남북관계를 갈라놓은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그런데 그런 상반된 현실에 대해 눈을 감아버린 남측 정부는 자기들이 서독 정부와 얼마나 다른지 알지 못하고 있다.
둘째, 지금 남측 정부는 북을 폭력적으로 해체하고 강제로 합병하려는 비밀계획을 가지고 있지만, 서독 정부는 동독을 폭력적으로 해체하고 강제로 합병하지 않았고, 동독이 자진해체와 자진합병을 택하였던 것이다. 동독이 자진해체와 자진합병을 택한 까닭은, 동독의 군대와 인민이 자기들의 사회주의체제를 외면하고 서독의 자본주의체제를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1989년 9월 동독 인민 15,000여 명이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하였고, 동독의 국방회의(Nationaler Verteidigungsrat)가 지휘하는 국가인민군(Nationale Volksarmee) 병력 175,300명은 비상대기상태에 들어갔지만 그 이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였다. 1990년 3월 18일 동독총선에서 승리하여 동독의회(Volkskammer)를 장악한 병합추진세력은 1990년 8월 23일 동독 자진해체를 의결하였고 그에 따라 1990년 10월 2일 동독이 서독에 병합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던 날 국가인민군도 와해되었다. 체제와 주권을 수호하는 마지막 물리적 수단인 군대가 체제붕괴상황을 뻔히 보면서도 그것을 저지하지 못하더니 결국 어이없게 와해된 것이다.
동독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났는데도 국가인민군이 대응하지 못하다가 결국 와해된 것은, 국정원, 통일부, 군부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인민군이 와해된 것처럼, 조선인민군도 와해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이를테면 <신동아> 2013년 4월호에 실린 기사에서 그런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 그 기사에 따르면 “(남측의) 안보전문가들은 북한도발을 우리가 환수한 평시작전통제권을 제대로 사용해보는 기회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대응에 성공하면 북한내부가 ‘충격과 공포’에 빠져 병사들이 대거 탈영하는 진짜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봤다”는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대응이라는 말은 국지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났을 때 한국군이 우세한 화력으로 인민군을 격파하는 것을 뜻하는데, 무력충돌에서 참패하여 충격과 공포에 빠진 인민군이 대거 탈영할 것이고, 그에 따라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남측 안보전문가들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남측 안보전문가들의 그런 생각은 국정원, 통일부, 군부의 대북전망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위에 인용한 내용은 국정원, 통일부, 군부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정원, 통일부, 군부가 조선인민군을 국가인민군 수준으로 얕보는 것은 오판 중의 오판이다. 그렇게 보는 논거는 아래와 같다.
국가인민군은 당시 동독에 주둔하던 소련군에게 의존하였다. 소련군이 철군하는 경우 국가인민군이 버티기 힘들 정도로 의존도가 높았다. 그와 달리, 조선인민군은 모든 종류의 핵탄과 전략무기들을 자력으로 생산하는 군사력 강화에 힘쓴 결과 군사강국대열에 들어섰으며, 그 보다 더 중요하게는 정신무장이 매우 강하다. 북에서는 전략무기보다 정신무장을 더 중시하는데, 북의 정신무장상태를 이 말해주는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잠함 233호 최후와 대각봉호의 최후
2013년 11월 1일 북의 언론은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해군 제790군부대 소속 구잠함 233호 장병들이 안장된 묘에 조화를 진정하고 묵상한 소식을 보도하였다. 제790군부대는 동해함대에 소속된 부대다. 구잠함(sub chaser)이란 적 잠수함을 탐지하여 격침시키는 전투함인데, 대잠수함작전 이외에도 연안경비, 호위, 정찰, 기뢰부설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구잠함 233호 장병들은 2013년 10월 중순 “전투임무를 수행하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었다고 한다. 북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그들의 시신을 모두 찾아 안장해주며 장례도 잘해줄 데 대한 은정 깊은 조치”를 취하였고, “묘비와 란간은 어떻게 만들며 돌색갈은 어떤 것으로 해야 하는가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지도하였고, “묘비들에 용사들의 생전의 모습을 새긴 돌사진을 붙일 데 대한 지시”를 주었고, 직접 묘소에 찾아가 애도하고 묘비에 자신의 이름을 묘주로 써넣으라고 말하였다. 만일 구잠함 233호 장병들이 해상훈련 중에 단순사고로 순직하였다면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그렇게까지 특별하게 배려하였을 리 없으므로, 구잠함 233호 장병들은 어떤 작전상황에서 전투임무를 수행하던 중 전사한 것이 분명하다. 보도영상을 보면, 묘비에 “2013년 10월 13일 전사”라고 새겨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2013년 10월 13일 구잠함 233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2013년 10월 19일 <로동신문>에 실린 ‘위험계선을 넘어서는 북침핵전쟁위기’라는 제목의 해설기사에 따르면, 미국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USS George Washington)가 “조선서해에 들어온 것은 여러 차례이지만 조선동해와 남해에 이어 서해에 진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일보> 2013년 10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조지워싱턴호는 2013년 10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남해에서 실시된 한미일 3자연합해상훈련에 참가하였고, 12일에는 서해로 진입하였다. 남측에서는 당시 조지워싱턴호가 동해에 진입하였다는 보도가 전혀 나오지 않았는데, 북측에서는 조지워싱턴호가 먼저 동해에 진입한 뒤에 남해와 서해로 갔다고 보도하였다.
북측 보도를 읽어보면, 당시 미국은 항모강습단의 남해출동정보만 언론에 흘려주고, 남해에 출동하기 전에 동해에 전격적으로 진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항모강습단이 언론보도를 차단한 채 동해에서 기습공격연습을 감행하였음을 말해준다. 항모강습단이 그처럼 동해에 전격 진입하여 기습공격연습을 감행하는 것을 간파한 북의 동해함대가 그에 맞서는 대응작전에 돌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구잠함 233호는 동해에서 기습공격연습을 감행한 항모강습단을 정찰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항모강습단에 대한 해상정찰은 정찰대상에 접근해야 하는 매우 위험한 전투임무다. 더구나 정찰대상은 기습타격전을 연습하기 위해 출동한, ‘세계 최강’이라는 항모강습단이었다.
조지워싱턴호가 10월 10일 뱃머리를 동해에서 남해로 돌렸다고는 하지만, 핵추진잠수함이 언제 어디서 출몰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동해함대는 여전히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긴장상태는 구잠함 233호 장병들이 전사한 10월 13일까지 지속되었다.
400t급 구잠함 승선인원은 78명인데, 구잠함 233호 장병들이 안장된 묘소에 세워진 묘비는 약 20기다. 그러면 약 58명에 이르는 다른 장병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구잠함 233호가 미국 핵추진잠수함과 교전 중에 피격되었다면 78명 장병들 가운데 생존자는 몇 사람 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구잠함 233호가 해상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불의의 사태로 위급한 순간에 처했을 때, 20여 명의 장병들이 자기 목숨을 바쳐 다른 50여 명의 장병들을 구하고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위급한 작전상황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기에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그들의 묘 앞에서 그처럼 애도하였을 것이고, 그들의 묘비에 ‘희생’이 아니라 ‘전사’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북에서 펴낸 각종 자료들에 따르면, 인민군은 전쟁승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조국과 동지를 위해서 라면 불길 속에도 몸을 던지고 바닷물 속에도 뛰어드는 정신무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북에서는 인민군이 ‘총폭탄정신’으로 무장되었다고 말한다. 구잠함 233호 장병들도 그런 정신을 발휘하며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그렇게 정신무장을 갖춘 조선인민군을 자기 체제가 무너질 때 총 한 방 쏴보지 못하고 와해된 국가인민군과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013년 7월 9일 <아사히신붕>에 실린 보도기사 한 편이 눈길을 끌었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2013년 2월부터 약 6개월에 걸쳐 일본 서해안지역인 니가다현(新潟縣) 바닷가와 아키타현(秋田縣) 바닷가에 떠밀려온,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북측 주민 시신들을 연이어 발견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시신들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화를 가슴에 품고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언론은 “대다수의 시신들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의 초상화를 품고 있었다. 조난 당시 필사적으로 꺼낸 것으로 보인다. 대다수가 붉은 통을 안고 있었다. 붉은 통 안에는 비닐로 정중히 싼 초상화가 손상되지 않은 채로 들어 있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되어 머나먼 일본 서해안까지 밀려온 것일까? 이 의문을 풀어준 것은 <로동신문> 2013년 10월 29일 보도기사였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그들은 2012년 12월 어느 날 러시아 연해주에서 가까운 동해 동북부 해상에서 조난을 당해 침몰한 14,000t급 화물선 대각봉호의 선원들이었다. 당시 사고해역에는 강풍을 동반한 엄청난 풍랑이 몰아치는 바람에 항해가 불가능하였다. 강풍과 파도가 대각봉호 선체를 연속 강타하자 대형화물들이 무너져 한쪽으로 쏠리면서 무게중심을 잃은 대각봉호는 침몰하기 시작하였다. 배에서 탈출하라는 본국의 다급한 무선교신을 거듭 받았건만, 그들은 “조국의 한 부분이고 살점과도 같은” 대각봉호와 운명을 같이 하였다. 북측 보도기사에 따르면, 그들은 “김정은 동지를 잘 모셔주기 바란다”는 마지막 무선교신을 보내고, 최고영도자들의 초상화를 보관한 수밀함통을 가슴에 품었다고 한다. 사나운 파도에 수밀함통이 자기들 품에서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끈으로 자기 몸에 단단히 묶은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광란하는 겨울바다 속으로 사라져갔다. 성난 풍랑 몰아치는 망망대해에서 바다에 빠지면 시신조차 찾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아는 선원들이었기에 그들은 자기 시신이 몇 달 뒤 누구에게 발견되리라고 예상하고 죽더라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니었다.
북의 현실을 알지 못하는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지금 저 군사분계선 너머에는 대각봉호 선원들과 같은 평범한 인민들이 그런 정신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북측 인민들을 자기 체제를 저버린 동독 인민들과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북의 현실과 동독의 과거사를 억지로 결부시키는 발상이야말로 오판 중의 오판이다.
하기에 국정원, 통일부, 군부가 작성한 비밀문건을 다시 생각해야 하며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이 아닌 6.15남북공동선 우리민족끼리정신에 따라 대화와 협력을 통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만이 가장 바른 방도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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