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오(karllyu)
2010년 5월 24일,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전쟁 전사자 흉상이 늘어서 있는 용산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을 비장한 표정으로 걸어 나와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천안함 침몰은 북한군의 군사도발이라며 ▲남·북간 교역·교류 전면중단 ▲북한 선박 남쪽 해역 통과 봉쇄 ▲확성기·전단살포 심리전 재개 등 '5·24 대북 제재'를 발표했다.
그날은 6·2지방선거를 불과 열흘도 남겨놓지 않은 날이었고, 그 때문에 야권은 천안함 사건을 선거에 이용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의 의도와는 달리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를 심판했고, 선거결과는 야권 승리에 가까웠다.
2012년 10월 8일,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은 국정감사장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NLL은 미국이 땅따먹기 하려고 제멋대로 그은 선이니까 남측은 앞으로 NLL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며 '노무현 대통령 NLL 포기설'을 제기했다.
그 후 새누리당 의원들과 보수언론은 이를 무한 반복하여, 대통령선거 구도를 '종북이냐 아니냐'로 몰고 갔고, 박근혜 후보도 직접 나서 문재인 후보를 '서해 NLL을 북한 김정일에게 헌상한 노무현의 후계자'로 낙인찍어 공격했다. 그리고 그 공격은 성과를 거둬 12월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다.
헌법재판소 판결 내년 지방선거 직전 발표 가능성 높아
박근혜정부가 5일 강령 등 당의 설립목적과 일부 활동이 헌법질서에 위배된다며 통합진보당을 위헌정당으로 규정하고, 헌정사상 처음 정당해산 심판청구안을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는 뉴스를 접하며, 나는 엉뚱하게 2010년 이명박 대통령의 전쟁기념관 담화와 2012년 정문헌 의원의 '노무현 대통령 NLL 포기' 발언을 떠올렸다.
박근혜정부가 '헌법의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 수호'라는 거창한 가치를 내걸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정당 해산심판 청구와 진보당 소속 의원들의 의원직 상실 청구 그리고 진보당 해산 결정 이전 정당 활동 중지 가처분신청도 함께 냈다는 기사를 봤다. 나는 최근 선거 때마다 보수정권이 안보 문제를 선거에 이용했던 것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과연 어떤 정치적 계산을 했을까 의심하게 된다.
헌재가 각하하지 않는 한 앞으로 180일 이내에 심리를 마치고, 이 사건에 대해 결정을 해야 한다. 앞으로 180일 후면 언제인가? 내년 5월 초다. 일부 언론은 180일 이내 결정 규정은 강제규정이라기보다는 훈시규정이어서 180일보다 늦어질 수 있다고 보도한다. 어쨌든 내년 5월 중·후반에 이 문제가 다시 정국의 핵심 이슈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더구나 박근혜정부는 잊힐 만하면 통합진보당 관련 사건을 만들어 정국돌파의 수단으로 쓰고 있다. 그들은 분명 앞으로 180일 후 다시 한 번 통합진보당 사건을 정국돌파의 수단으로 쓸 것이다. 그러면 그 때가 언제인가? 바로 지방선거 직전이다.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 내년 지방선거용 기획 상품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하든 부결하든 이 사안은 지방선거를 좌지우지하는 핵심 이슈가 될 것이다. 새누리당은 지방선거 야권후보들에게 이 사안을 들이대며 소위 사상검증을 할 것이고, 박근혜 정부는 이와 관련된 모종의 새로운 공안사건을 만들어낼 것이다. 정부와 여당은 통합진보당에 대한 찬반으로 내년 지방선거 구도를 짤 것이다.
결국 이번 박근혜정부의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청구는 내년 6월 지방선거를 통합진보당에 대한 찬반으로 선거 구도를 이끌어가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공안정국의 심화로 내년 지방선거 국면을 돌파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새누리당은 6일,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와 관련 총공세에 나섰다. "대한민국 정통성 수호 위한 조치"라며, 19대 총선 야권연대까지 거론하며 민주당을 공격했다. 이 문제로 골치 아픈 국정원 대선개입 정국을 뛰어넘고, 내년 지방선거까지 이 사건을 지속시킬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새누리당이 이렇게 통합진보당을 무한 활용하는 것은 최근 선거와 여론조사에서 통합진보당을 활용할 때마다 승리하거나 지지도 상승의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지난 9월의 이석기 의원 구속을 위한 국회 체포동의안 처리도 국정원 대선개입 정국을 뛰어넘기 위한 '기획 상품'이었으나 그 효과가 적었다. 왜냐면 민주당과 진보언론, 시민단체 등에서 너무 쉽게 체포동의안 처리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반면, 이번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청구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과 단체, 정당이라면 결코 동의하기 어려운 사안이다. 따라서 이석기 의원 사건보다 훨씬 정국의 쟁점이 될 만한 사안이고, 새누리당은 충분히 효과를 볼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첫 번째 핵심 타깃은 내년 서울시장 선거와 박원순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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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인선서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박원순 서울시장이 18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 회의실에서 열린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서울시 국정감사에서 증인선서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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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과연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이 의도하는 것처럼 내년 지방선거를 통합진보당에 대한 찬반으로, 공안정국의 심화로 국면을 이끌어 가면 그들에게 유리할까? 과연 지난 대선처럼 여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할까?
현재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무엇보다 가장 영향을 받는 곳은 내년 지방선거의 최대 격전지인 서울시장 선거다. 이번 진보당 해산심판 청구가 내년 지방선거를 위한 기획 상품이라고 한다면, 그 첫 번째 타깃은 다름 아닌 박원순 서울시장일 것이다.
새누리당은 박원순 시장에게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에 대한 입장을 물을 것이요, 인권변호사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강한 박원순 시장을 친북, 좌파로 몰아 공격할 것이다. 그를 통해 중간층을 박원순 시장에게 돌아서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서울시의 진보당 지지자는 생각보다 많다. 지난해 4월 총선 서울지역 정당득표율에서 양대 정당 득표율은 새누리당 42.3% 대 민주당 38.2%로, 새누리당이 4.1%포인트 이겼다. 반면 전체 보수진영 득표율은 47.9%였고 전체 진보진영 득표율은 52.1%로, 진보진영이 4.2%포인트 이겼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통합진보당 득표율 10.6%가 있었다.
민주당 후보로 재선에 도전하겠다고 이미 밝힌 박원순 서울시장이 재선에 성공하려면 지난해 총선에서 진보당을 지지한 유권자들의 힘을 모으지 않는 한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이 내년 지방선거를 통합진보당에 대한 찬반으로, 공안정국의 심화로 국면을 이끌어 가는 상황에서 진보적 유권자들만 생각하기에는 중간층의 이반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박근혜정부의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는 야권의 지지자들을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유권자와 상대적으로 중도적인 유권자로 분열시킴으로써 내년 지방선거 야권에게 어려움을 주고, 특히 박원순 서울시장의 재선가도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물론 선거를 앞두지 않았어도 이 사안은 민주진보세력의 단결을 어렵게 하고, 입장 차이에 따른 분열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안이다.
박근혜정부, 민주주의 후퇴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어
이런 정치적 어려움 때문에 지금 민주당 지도부는 이 사안을 두고 주춤거리고 있다. 새누리당과 보수진영의 종북 프레임에 빠지게 될까봐 위축된 모습이다. 박근혜정부의 정당해산 심판 청구는 비판하지만 진보당에 대해서도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안철수 의원도 "행정부가 해산청구를 한 것은 유감이지만 헌재의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고 밝혔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나 안철수 의원이나 이전부터 통합진보당과의 야권연대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져왔던 만큼 이런 유보적 입장, 진보당과 거리두기 입장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민주당과 야권이 아무리 진보당과 거리두기를 하려고 해도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인권과 정치적 자유를 침해하고, 민주주의 일반을 후퇴시킬 것이다. 민주당과 야권이 이에 저항하면 종북 프레임으로 공격하면 되니 성큼성큼, 거칠 것 없이 그리 해올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이라는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6일 "반국가단체·이적단체 강제해산법과 해산정당 소속 의원 자격 상실법, 반국가사범 비례대표 승계 제한법 등을 우선적으로 상정해 처리하도록 하겠다"며 헌법재판소의 진보당 해산 결정에 대비해 관련 입법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제 더 이상 민주당과 야권이 종북 프레임이 두려워 진보당과 거리두기를 할 시점은 지난 것이다. 이미 박근혜정부의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청구 자체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폭거다. 이석기 의원에 대한 사법처리와 통합진보당 해산 문제는 전혀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박근혜정부가 이석기 의원의 잘못된 모습을 빌미로 민주주의 전체에 대한 침해로 나아가는 것은 막아야 한다.
야권은 정치적 유·불리를 넘어, 유신부활에 항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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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장실질심사 마친 이석기 의원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9월 5일 오후 경기도 수원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뒤 법원을 나서며 취재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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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석기 의원은 진보의 승리와 발전보다는 진보의 위기와 후퇴에 기여한 바가 더 많은 사람이다. 그의 무분별하고 어리석은 행동이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에게 빌미를 제공하여 지금의 위기를 초래했다. 그가 지금껏 보여준 여러 모습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이석기 의원이 잘못했더라도 그가 소속된 통합진보당이 헌법에 규정된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며 정부가 해산심판 청구를 제출한 것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헌법 가치를 훼손한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정당 활동의 자유야말로 가장 중요한 헌법적 가치다.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에서 국민이 국정에 자신의 견해를 반영시킬 통로는 선거이며, 선거에서 국민의 뜻을 대변해서 심판을 받은 존재가 바로 정당이다.
정당 및 정치세력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국민의 몫이며, 정당 존립여부는 선거를 통해 유권자들이 표로 결정해야 한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 정당에 대한 심판을 통해 구성하는 정부가 정당 활동의 자유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민주주의의 부정이다.
당장은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의 공안정치 심화, 통합진보당을 정치에 이용한 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른다. 최근 얼마 동안은 그래왔다. 그리고 그것에 강력히 반대하는 것이 야권을 종북 프레임에 빠지게 해서 야권에게는 손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점을 지났다. 이석기 의원 비판과 진보당 해산심판 청구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정치적 유불리를 뛰어넘어 민주주의 후퇴와 유신 부활을 막기 위해 분명한 항거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
국민을 믿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의 반복되고 심화되는 공안정치는 역풍을 맞을 것이다. 결국 자충수가 될 것이다. 그동안 통합진보당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진보당 지지자들이 많이 언급했던 마틴 니묄러의 시가 있다. 지금이야말로 이 시가 적합한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이 나를 잡아갈 때
(마틴 니묄러)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사민당원들을 감금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유태인들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나를 잡아갈 때,
나를 위해 항의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유창오 기자는 새시대전략연구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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