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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민중 저항 '하메네이냐 팔레비냐' 양자택일 아냐

전지윤 사회운동가·연구평론가

misotolenin@gmail.com

사회운동가·연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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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

  • 입력 2026.01.22 08:30

  • 수정 2026.01.22 08:32

  • 댓글 1

진영 논리에 갇히면 이분법적 함정에 빠져

반제국주의만 강조하면 신정 체제 옹호로

하메네이 정권 붕괴가 친미 이란으로 이어질까

가자와 테헤란 폭력과 탄압의 본질은 동일

지옥을 낳은 것은 아랍 혁명이 아니라 반혁명

이란 민중 연대와 팔레스타인 연대는 하나

오늘날 중동 정세는 세계 정치의 모순이 가장 집약적으로 분출되는 단층선이 되고 있다. 특히 최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집단학살이 이란의 반정부 투쟁과 동시에 전개되면서, 이를 어떻게 바라볼지를 둘러싸고 여러 논쟁과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이 논쟁은 단순히 이란의 정세와 상황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는 쟁점들을 던지고 있다.

'역사는 무엇으로 움직이는가'와 '누구를 위한 반제국주의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미 제국주의와 지역 패권, 신정 독재와 민중 저항이라는 복잡한 고차방정식이 얽혀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냉혹한 현실주의를 자처하는 '지정학적 환원주의'와 민중의 주체적 역량과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강조하는 관점의 차이는 극명해지고 있다.

이란 정세를 바라보는 가장 흔하면서 치명적인 오류는 이분법적 사고다. 한쪽에서 친미 우파와 족벌 언론들은 이란에서 하메네이 체제의 붕괴가 곧 친미적이고 서구화된 이란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단정한다. 이들은 이란이 미국의 패권 질서에 편입될 것을 기대하면서, 좌파를 향해 ‘팔레스타인은 걱정하면서 왜 이란 인권에는 무관심하냐’고 비난한다.

반면, 신진영론에 빠져든 일부 경직된 좌파들은 미국과 대립하는 이란을 철저한 ‘반제국주의 국가’로 추켜세우며, 현재의 신정 독재 체제를 옹호한다. 이들에게 이란 민중의 민주화 요구는 외세의 개입을 불러올 위험한 시도이거나 친미 정권을 세우려는 음모로 치부된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에는 연대해야 하지만, 이란 민중의 저항은 결코 지지할 수 없다고 말한다.

 

8일 이란 테헤란에서 통화 가치 하락과 생활고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이란 혁명수비대 산하 민병대인 '바시지' 대원이 거리의 불을 끄고 있다. 2026.1.8. 로이터 연합뉴스

하지만 이 두 시각은 '이란 민중'이라는 역사의 구체적인 주체를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공통점을 보인다. 두 입장은 서로 적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전제를 공유한다. 즉, 중동에서 가능한 선택지는 ‘미국 편이냐 아니냐’라는 단순한 질문으로 환원되며, 그 사회 내부에서 전개되는 계급적 갈등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삭제되어 버린다.

이 과정에서 이란 사회 내부의 복합성과 모순, 그리고 아래로부터 분출하는 저항의 정치적 의미는 쉽게 잊힌다. 민중을 지정학적 바둑판 위의 장기말로 취급할 때, 그들이 겪는 실업, 빈곤, 성차별, 정치적 억압은 선택적으로 이용되거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현실의 민중은 결코 이러한 이분법의 함정에 갇혀 있지 않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이분법은 역사를 움직이는 힘에 대한 인식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한편에서는 '국제 질서와 현실 정치는 군사력과 힘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요즘 매일같이 행동하며 주장하는 트럼프와 스티븐 밀러 같은 그의 참모들이 있다. 트럼프가 베네수엘라를 침략하고 그린란드를 강탈하려 하는 배경에는 이런 신념이 존재한다.

반대편에서, 미국에 맞서서 중국과 러시아를 지지하며 북한과 이란의 핵 개발을 정당화하는 일부 좌파나 지식인도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민중의 연대’나 ‘도덕적 정당성’은 한가한 소리가 되고, 심지어 "이스라엘의 폭주를 막는 유일한 힘은 아랍 민중의 연대가 아니라 인접 국가의 군사력, 총칼과 군함과 미사일"(임명묵 작가)이라는 극단적 주장까지 등장한다.

 

이란 민중 연대와 팔레스타인 연대는 양립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울산함성'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역사의 결정적인 장면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했던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퇴한 것은 북베트남의 화력이 미군보다 우세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베트남 민중의 끈질긴 항쟁, 미국 내부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반전 운동, 그리고 전쟁의 부당함을 깨달은 미군 내부의 불복종이 결합한 결과였다.

군사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미국과 이스라엘의 압도적 군사력과 맞서는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 역시 승산이 없는 싸움이 된다. 그러나 라시드 칼리디(Rashid Khalidi), 질베르 아슈카르(Gilbert Achcar) 같은 역사가와 이론가들이 지적하듯이 팔레스타인 해방의 미래는 민족해방 투쟁, 아랍 민중의 지원, 국제적 연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결과일 수밖에 없다.

물론, 아랍의 봄(Arab Spring) 이후 중동이 처해 있는 처참한 현실이 현실주의적 힘의 논리를 부추긴 것이 사실이다.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등에서는 잔인한 독재 정부가 세워졌거나, 끝없는 내전과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 남긴 트라우마는 이번 이스라엘의 가자 집단학살에도 불구하고 중동에서 기대만큼의 연대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지옥을 만들었다'고 절망하거나 '이란 정권이 이대로 무너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반응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원인과 결과를 심각하게 혼동한 것이다. 현재 중동의 비극적 상황은 ‘아랍의 봄’이 낳은 결과가 아니라, 아랍의 봄을 짓밟은 ‘반혁명’이 낳은 결과다.

'아랍의 봄'은 친미 독재 정권들과 전제 왕정들을 뒤흔든 역사적인 민중 저항이었다. 그 지역의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나서 역사를 바꾸며, '아랍인과 무슬림은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다'는 오랜 편견을 뒤집고, 희망을 가져온 순간이었다. 당시에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 독재 정권들, 전제 왕정들은 이 지역에서 자신들의 기득권과 패권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아랍 혁명의 승리와 확산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반혁명은 쿠데타로, 내전으로, 제국주의 개입으로 나타났다. 결국 아랍 혁명은 납치됐고 패배했고, 지금의 끔찍한 중동 상황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아랍의 봄이 지금의 끔찍한 상황을 낳았다'는 것은 마치 '4.19가 5.16을 낳았다'거나 '광주 항쟁이 전두환을 낳았다'는 말처럼 틀린 말이다.

지금, 하메네이 정권은 바로 이런 인식을 이용해서 이란 민중 앞에 기만적 함정을 파놓고 '혼란과 내전, 외세의 개입을 원하냐? 아니면 나를 지지하라'고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이러한 거짓된 양자택일을 거부하고, 혁명이 왜 납치되었으며 어떻게 하면 진정한 승리를 일굴 수 있을지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신정체제도 왕정 복귀도 반대한다'는 이란 민주화 지지 시위대의 행진 - 출처: 이란 출신 활동가 시야바시 샤하비 Siyâvash Shahabi의 페이스북

또, 어떤 이들은 ‘민중’이라는 개념이 단일하지 않으며 내부에 무수한 다양성과 모순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민중 저항의 의미를 깎아내린다. 자신들이 접한 하메네이의 독재를 지지하는 사람, 팔레비 왕정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사람, 혹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의 목소리를 파편적으로 수집하여 그것을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물론 민중은 정의만 추구하는 단일 집단일 리가 없으며, 내부에는 보수적 생각과 편견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사회과학적 분석은 개별적인 대화의 파편이 아니라 구조적 흐름과 객관적 지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수많은 여론조사는 이란 민중 다수가 신정 체제에 신뢰를 잃었고, 미국의 경제 제재에 분노하며, 팔레스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윤어게인'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다양한 민심’으로 주목하는 것과, 억압받는 소수자와 민주화를 열망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정치적 선택이다. 진보 좌파와 지식인의 과제는 현실을 중계하는 카메라가 아니라, 어떤 목소리가 역사적 정의와 진보를 향해 있는지 판단하며 그 힘을 키워나가는 나침반이 되도록 노력하는 데 있다.

무엇보다 이란 상황에 대한 가장 중요한 논쟁은 이란의 반정부 투쟁을 지지하는 것이 팔레스타인 연대와 양립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진영론에 빠진 일부 좌파와 현실주의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이란 정권이 무너지면 이스라엘에 저항할 힘이 약해진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란 정권이 팔레스타인 대의를 '국내적 탄압의 방패'로 악용해 왔음을 간과하는 말이다.

 

이란 정권이 10일 넘게 모든 인터넷을 차단한 것을 고발하는 인권단체 - 출처: 이란 출신 활동가 시야바시 샤하비 Siyâvash Shahabi의 페이스북

실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지금은 악명 높은 에빈 교도소에 갇혀 있는 이란의 여성 인권 활동가 나르게스 모하마디는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민간인 학살은 인류의 양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있다"라고 하면서 "외부의 비극을 언급하면서도 자국 민중의 목소리는 억압하는 위선을 멈추라"라고 이란 정권을 비판한 바 있다.

이란 정권의 박해 속에서도 국내외의 존경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계속해 온 자파르 파나히 영화감독도 "테헤란의 거리에서 시위대를 탄압하는 권력이나, 가자에서 민간인의 삶을 파괴하는 권력은 본질적으로 같은 폭력"이라고 지적했다. 이란의 일부 학생과 노동자 단체 등은 '가자에서 테헤란까지, 억압에 맞서 싸우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연대와 이란 민중 저항에 대한 지지는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은 중동의 독재 정권들이 민중의 지지를 받는 민주 정권으로 교체될 때 더 강력한 동력을 얻을 수 있다. 독재 정권이 이끄는 모래성 같은 ‘저항의 축’보다는 억압받는 민중이 서로의 고통에 연대하는 힘이 훨씬 단단하고 근본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수많은 인간의 의지와 투쟁, 연대가 빚어내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우리는 제국주의의 지정학뿐 아니라 ‘반미면 무조건 우리 편’이라는 어긋난 진영론을 모두 거부해야 한다. 테헤란의 거리에서, 그리고 가자의 폐허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두 줄기 꽃이 함께 피어나는 것에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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